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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의 뜨거운 수증기 사이로 그녀의 콧노래가 흐른다.
샴푸 통을 퍽퍽 눌러 짜낸 묵직한 액체를 머리 위에 턱 올린다. 손가락 끝으로 두피를 꾹꾹 누르며 마사지를 시작한다. 거품이 풍성하게 일어난다. 향기롭고 부드럽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품이다.
그 거품 속에서, 수억 개의 나노 입자들이 조용히 일을 시작한다.
모공 사이로 파고든 입자들은 그녀의 상피세포에서 흘러나온 DNA 사슬을 낚아챈다. 찰나의 순간, 그녀만의 고유한 염기서열이 나노 입자 하나하나에 각인된다. 마치 열쇠의 모양을 탁본 뜨듯이.
이제 이 입자들은 전 세계 어디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나더라도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상황을 모른다.
빠지기 직전이던 머리카락 몇 가닥이 모낭 깊숙이 다시 자리를 잡는 게 느껴질 리 없다. 그냥 요즘 확실히 덜 빠지는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다.
머리를 헹군다. 거품이 발밑으로 흘러내린다. 수억 개의 나노 입자들이 그 흐름을 타고 배수구 속으로 조용히 빨려 들어간다. 그녀의 DNA를 품은 채로.
욕실 불이 꺼진다.
건물의 수직 하수관 속은 어둡고 뜨겁다.
위층에서, 아래층에서, 벽 하나 너머 이웃집에서 쏟아진 물들이 한 줄기로 합쳐진다. 1502호의 거품, 1205호의 거품, 304호 402호 701호. 아파트 거의 모든 집 욕실에 닥터옥의 나노샴푸 병이 놓여 있다.
각각 다른 DNA를 품은 수천만 개의 나노 입자들이 하나의 관로 안에서 뒤섞이지만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주파수를 유지한 채, 목표가 분명한 사냥꾼처럼 어둠 속을 내려간다.
지하 집수정. 아파트 수백 가구에서 흘러내린 것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는 오래된 머리카락 뭉치들이 배수망에 걸려 썩어가고 있다. 나노 입자들은 그 뭉치들 사이를 훑는다. 방금 두피에서 각인한 염기서열과 공명하는 신호를 포착하는 순간, 입자들이 멈춘다.
그리고 달라붙는다.
죽어있던 머리카락들이 파르르 떨린다. 나노 입자들이 마디마디를 연결하며 재조립을 시작하자, 한 달 전, 두 달 전, 혹은 더 오래전에 빠져나간 머리카락들이 조용히 몸을 일으킨다. 각자의 주인을 기억하는 나노들의 안내를 받으며 이제 방향을 바꾼다.
위로.
"서걱, 서걱." "스읍, 스읍."
관벽을 타고 뭔가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날 밤 그녀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창밖에서 배송 트럭 한 대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엔진 소리가 멀어지고 아파트가 조용해졌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복도 어딘가에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 택배가 던져지는 소리.
눈이 감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결에 뭔가 느꼈다. 차갑고 축축한 것이 발목 근처에 닿는 느낌. 그녀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돌아누웠다.
그 순간 침대 옆 어둠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서걱.
그녀는 눈을 떴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가로등 빛이 방 안에 얇게 깔려 있었다.
동공이 어둠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보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먼저 반응했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소름이 올라왔다.
수백 명이었다. 아니 수천 명이었다. 방 안 가득, 벽에 붙어, 천장 아래까지, 전부 그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와 똑같이 생긴 수천명의 젖어있는 그녀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명이 터져나오지 않았다. 목이 막혔다. 그냥 잠에서 깼다.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헉헉거리며 스탠드 스위치를 켰다.
아무것도 없었다. 방은 조용했다. 바닥도 깨끗했다.
그런데 냄새가 났다. 하수구 냄새와는 조금 다른, 더 오래되고 습한, 오래 젖어있던 단백질 같은 냄새.
그녀는 천천히 침대 옆을 내려다봤다.
바닥에 무언가 있었다.
처음엔 이불이 흘러내린 건가 싶었다. 그런데 그게 움직였다. 아주 조금, 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바닥을 타고 조용히 번져오고 있었다.
머리카락이었다.
수백, 아니 수천 올의 머리카락이 바닥을 덮고 있었다. 검고 젖어 있었다. 그것들은 뿌리 쪽을 앞으로 하고 아주 천천히, 그녀를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자기 주인에게로.
그녀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다시 잠에서 깼다.
불을 켜자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은 깨끗했다. 냄새도 사라졌다.
그녀는 한참 동안 침대 위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꿈이 두 번이었는지, 아직 꿈속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불을 켜둔 채 다시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욕실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물이 내려가는 소리인지, 아니면 올라오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닥터옥의 샴푸병은 욕실 선반 위에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광고 문구가 빛을 받아 희미하게 보였다.
나노 전달체는 사용자의 DNA 신호를 따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