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일주
7살 차이 나는, 성별도 다른 동생이란 별세계의 존재이다. ‘소가 닭보듯’ 이라는 관용어가 이때만큼 어울릴 수 없을 거다.
나와 내 동생이 그랬다.
더군다나 7살 차이는 한국의 교육 과정을 생각하면 상당히 절묘한 숫자가 되고야 마는데,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때에 내 동생이 태어나, 내가 중학생이 되어서야 동생은 초등학생이 되었고, 내가 대학생이 되어서 어른의 기분을 만끽하기 시작할 때 동생은 이제 막 입시의 서막을 연 그런 식인 거다.
딱히 우리 둘 사이가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별세계의 존재와는 다툴 일이 없다. 우리 둘은 긴 시간 동안 각자의 세계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았을 뿐이다. 오히려 굳이 고르자면 사이가 좋았던 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동생과 장장 20여일에 이르는 남미 일주 여행을 동행하게 된 데에는 전적으로 부모님의 조바심이 큰 역할을 했다. 늘 그렇듯 대담한 계획을 세우길 좋아하는 딸이 평범한 여행지도 아닌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갈 거라고 하니 불안이 극에 달한 부모님은 동생을 꼬드겼다. 네가 같이 가서 누나를 봐줘야 하지 않겠냐며. 예나 지금이나 천하의 집돌이에 만사에 의욕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나 싶다. 의외의 책임감이었을 수도 있지 싶다.
하여간에 우리는 한해가 끝나가던 12월의 막바지에 인천공항에서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알파카
#1 구토 사건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에 대하여
동생과의 동행은 처음부터 참으로 순조롭지 못했다.
출발 전 흥에 겨워 공항 라운지에서 잔뜩 포식한 동생은 첫번째 기내식까지 먹고 나서 잠시 눈을 붙이는 듯 하더니 별안간 몸을 벌떡키고는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구토를 했다. 미처 화장실을 달려갈 여유도 없이 크게 속 탈이 난 것이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즉흥적이었는지를 묻는 Q&A 형태의 일기장에 나는 막 '오늘은 여행을 떠나는 날이므로 즉흥이란 있을 수 없는 날'이라는 글을 적은 참이었다(그리고 그 기록은 다른 색의 펜으로 휘갈긴 '동생이 비행기 앉은 자리에서 급토. 즉흥도 1000000'이라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역한 냄새가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등줄기에서 차가운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정말이지 세상에서 소멸해버리고 싶었다.
"Is he your son?"
아. 아직도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금발 승무원 목소리가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엄청난 프로 정신으로 무언가를 꾹꾹 눌러내고 있던, 도에 지나칠 정도로 친절했던 말투.
일단 동생을 화장실로 보내고, 승무원이 건넨 물티슈로 비행기 바닥을 박박 닦아냈다(그녀는 정말 친절했지만 치우는 걸 함께 도와주지는 않았다). 근처 승객 누구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점잖게 앉아 있었지만, 나는 너무도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지구 내핵으로 꺼져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동생은 한참이 지나서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로 돌아왔고, 우리는 그가 입었던 옷과 신발을 모두 버려야했다. 분명 방향제를 미친듯이 뿌렸는데도, 냄새가 어디선가 계속 올라왔다.
그 뒤 경유지인 미국 댈러스에 도착해서 나는 동생에게 새 신발을 사주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여행 내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볼리비아 우유니에서 아르헨티나의 국경마을 라끼아까로 이동하는 극한의 11시간 버스 이동에서 동생은 말그대로 곡기를 끊었다. 이동 중 언제 어디서 쉬는 시간을 가질지, 화장실은 제대로 갈 수 있을지, 그 화장실은 과연 사용할 수 있는 것일지(결국 화장실이랄 건 없었다. 동네 주민들이 버스 이동객들을 위해 간단한 음식과 물건을 파는 간이 건물에서 두어번 버스가 멈추어 설 때, 화장실이 필요한 사람들은 건물 뒤편 황야로 나섰다...)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또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음식은 고사하고 물조차 입에 대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는 걸 옆에서 보고 있자니 정말 눈물나게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초콜렛 따위를 몇번 권했지만 동생은 단호했다. 그리고 나도 차마 그 이상 적극적으로 동생에게 무엇을 권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물티슈로 닦아내면 정체모를 검댕이 끊임없이 묻어나오는 낡은 의자 시트, 비가 새고 외풍이 들어 밖보다 더 추운 버스 실내는 우리의 처참한 상황을 더 처참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최대한 눈을 붙이려 하면서 그 시간을 견뎌냈다.
또 여행 내내 우리는 국내선을 여러 차례 탑승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좌석에 구토 봉투가 제대로 준비되어 있는지 반드시 확인했다. 그리고 또다시 벌어질지 모르는 위기 상황에서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연습까지 했다(농담이 아니다. 진짜다). 그러니까 봉투를 집고 빠르게 열고 정확하게 조준하는 연습을 말이다. 정말 웃프기 그지 없었지만, 우리 둘 다 매우 진지했다.
#2 볼리비아 라파즈와 우유니 사막
"쿠스코가 생각보다 좋은 곳이었다는 데 충격받았어"
여행의 첫 방문지였던 페루 쿠스코는 여행이 계속될수록 점점 평가가 높아졌다. 5박을 하면서 날짜상으로는 대략 일주일간 머물렀던 그곳은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가 모두 풍성하고 깨끗하게 잘 정돈된 도시였다. 한국으로 치자면 경주같은 관광지답게 중심 광장에서 호객 행위는 심하지만 익숙해지고 나면 맘편히 거절할 수도 있고 사방에 경찰도 많이 배치되어 있어 안전하다는 인상이었다.
Morena Peruvian Kitchen, Cusco
쿠스코에서 제일 맛있는 식당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전체적으로 가격은 높은 편이지만, 인테리어도 예쁘고 메뉴도 영문으로 잘 준비되어 있는데다가 종업원들도 친절해서 기분 좋게 식사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날 저녁에서야 발견한 게 너무 아쉬울 정도였다. 특히 음식도 물론 훌륭했지만, 인생 최고의 스무디를 이곳에서 경험했다. "strawberry, passion fruit & lime smoothie" 용과와 라임이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딸기 스무디에 훌륭한 상쾌함을 부여했다!
본격적인 충격과 공포는 볼리비아에 입성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남미 중부에 위치한 볼리비아는 남미 여러 국가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1인당 국민총생산(GDP)가 가장 낮고 빈곤율이 높은-국가이다. 그러니까 페루에서 볼리비아 국경을 통과할 때부터 고난은 시작되는데, 일단 페루를 나가는 것만 약 한시간 반 정도 걸렸다. 동네 주민들이 길거리 음식을 파는 좌판이 대기줄 옆으로 늘어서 있는 가운데 흙먼지를 마시며 이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볼리비아의 '입국' 대기가 시작된다. 여기까지 총 두시간이 더 걸린다. 볼리비아 비자를 한국에서 미리 발급받아 올 수도, 이 때 바로 발급받을 수도 있지만 어느쪽이든 같은 줄에서 다같이 대기해야하긴 마찬가지이다.
페루-볼리비아 국경의 싸늘한 풍경.
"살려줘" 단말마 같은 동생의 외침. 남미 여행의 필수품이 있다면 단연코 마스크이다. 흙먼지와 매연에 폐가 고통에 차 울부짖는 걸 느낄 수 있다.
볼리비아의 수도인 라파즈조차 사정은 별반 좋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도에 위치한 수도'와 같은 낭만적으로 들리는 수식어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볼리비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육류는 닭인데, 다름이 아니라 소나 돼지는 기르는 데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ATM 기계가 있는 부스는 사람이 들어가면 안에서 문을 잠글 수 있도록 잠금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숙소는 분명 호텔이었는데도 객실 바닥에는 정체모를 기름때가 껴있었고, TV는 있는데 리모콘은 없지를 않나, 결정적으로 수건이 비치되어 있지 않았다. 여행을 다니면서 비상용으로 챙기는 개인 수건을 쓰긴 처음이었다. 교통 상황도 열악해서 도심을 걷고 있으면 경적 소리에 귀가 따가웠다. 제일 최악은 시내 매연이었다. 동생보다 덜 민감한 나조차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메슥거릴 정도였다. 도대체 현지인들은 어떻게 이런 공기 속에서 살고 있나, 진심 진폐증이 걱정될 지경이었다. 한나절을 시내를 걸어다니니 목이 아파왔다.
"공기의 소중함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킬리킬리 전망대Mirador Killi Killi
힘겹게 언덕길을 올라가면 라파즈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언덕의 꼭대기까지 빨간 지붕의 집들이 가득 차있다. 무엇보다 시내 매연으로부터 벗어나 청량한 공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심신이 지친 나와 내 동생은 그 결과 정말 내 여행에서 처음 해보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발적으로 한식당을 찾아간 것이었다. 무려 동생의 제안이었다-'무려'라고 표현한 것은 한국에 있을 때 평소 녀석의 식생활은 패스트푸드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행책자에 안내되어 있던 라파즈 시내 Corea Town이라는 한식당을 찾아갔다. 음식 가격은 여행책에서 안내하고 있는 것의 정확히 두 배정도였다. 그래도 맛은 생각보다 그럴싸했다.
"버거킹 XX."
여행내내 속이 불편했던 동생은 한식을 먹고 너무 좋아서 그야말로 미쳐날뛰었다. 뭐랬더라, 가게가 와이파이가 없는 것조차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했나.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그 당시 여행일기에 다음과 같은 길고 긴 후기를 남겼다:
'일단 양상추의 아삭함이 아직 살아있어서 배추 김치의 그것과 견줄 만하고, 열무김치는 제법 잘 익은것이 흡사 매우 엔지니어링이 잘 된 노래를 듣는 듯 하다. 김치찌개는 뒤로 갈수록 질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배추 김치가 적당한 긴장감을 주면서 잘 조화되면서 완주까지 무난히 갈 수 있게 하였다. 이중 최고는 단연 열무김치로 엄청나게 밸런스가 잘 잡힌 나머지 이걸 먹는 순간 눈앞에 가보지도 않은 전라도 시골 김치 명인 할머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돌아오는 길, 매연과 소음으로 가득 찬 라파즈 시내가 조금은 더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동생은 그 다음날 점심으로 버거킹을 먹었다.
"내가 여행잔지 중앙아시아로 끌려가는 고려인인지 구분이 안돼요, 가끔은."
이 모든 불편함 혹은 불쾌함을 넘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볼리비아를 방문하는 건, 전세계의 여행자들의 로망인 우유니 사막 때문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캄보디아를 앙코르와트가 먹여살리듯, 볼리비아는 우유니 사막이 먹여살리고 있다고 하면 딱이겠다.
아 그렇지만 우유니 사막으로의 여정은 정말이지 앞부터 뒤까지 무엇 하나 순탄한 게 없었다.
밤늦게 우유니에 도착하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투어는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그게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 들 정도의 거친 날씨였다. 숙소는 정말 눈 뜨고 본 것 중 최악이었다. 내가 호사를 누릴 거란 기대를 한 건 아니었지만, 호텔 세탁실 안쪽에 간이로 만든 옥탑방은 정말 돈받고 팔 객실이라고 할 수 없었다. 물이 나올까말까 하는 샤워실이 밖에서 훤히 들여다 보이는 수준의, 프라이버시 따윈 없는 상태였으니 말 다했지. 동생과 나는 정신이 와르르 무너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육신이 한조각으로 유지된 채 무사히 우유니를 벗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그날밤 지직거리는 낡은 브라운관 TV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한 채, 동생은 어둠 속에서 폐부에서부터 올라오는 욕설을 내뱉었다.
다음날 새벽, 우리는 대망의 소금사막 투어에 올랐다. 날이 흐리고 비가 추적추적 계속 내렸다. 말인즉슨, 황금빛 태양이 찬란하게 떠오르는 모습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밤새 장대비가 내렸으니 사막에 물이 가득 차있을 거란 기대에 다들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비는 그칠 생각을 않고 투어 차량도 왼쪽 뒷바퀴에 문제가 있는지 계속 운행을 멈췄다. 두시간여의 덜컹거리는 이동 끝에 드디어 차가 정차하긴 했으나, 흉한 날씨에 풍광은 전혀 기대하던 것과 거리가 멀었다. 결국 별 소득 없이 다시 세시간 걸려 숙소로 복귀했다. 시간도 약속된 일정보다 늦어진데다 조식도 제대로 먹지 못해 사람들 인심이 흉흉했다.
우유니 소금사막Salar de Uyuni
투어는 새벽에 출발하는 선라이즈 투어와 데이&선셋 투어로 구성되어 있었다.
도대체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오후 일정도 엉망진창이었다. 부실한 아침 식사 후 바로 데이 투어를 출발했지만, 이와중에 다카르랠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카르랠리라니! 이와중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동차 경주대회라니!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이 대회 때문에 포장도로가 모두 통제되면서 우리의 투어 차량은 거친 황야를 뺑돌아 이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결국 소금 호텔이니 하는 모든 나머지 일정을 취소하고 우리는 좋은 소금 사막 포인트를 찾아 떠났다. 거의 폭동이 일어날 분위기였다. 동생도 어둡고 거친 표정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상태였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차창 너머로 드디어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른 사막이 나타나더니 드디어 물이 찰랑거리는 사막이 등장했다. 차량이 멈추고 가이드가 장화를 나눠주었다. 장화를 신고 있는데 먼저 내린 동생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기쁨을 탄성을 질렀다. "와-!!!!!!" 아무런 꾸밈이 없는 진짜 탄성이었다. 순간 내 마음도 확 풀어졌다. 엄청난 행복감이 밀려왔다. 예민한 도시남인 동생에게 오지로의 장기 여행 자체가 맞지 않는 것 같아, 여행 내내 걱정도 되고 미안도 하고 짜증도 난 참이었다. 그런데 누구의 강요도 아닌 본인 스스로의 감정으로 행복해하는 걸 보니 그제야 안도감이 들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네가 즐거워서 다행이야.
일몰 시간이 가까워지자 또다시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결국 '선셋' 투어도 실패한 채 예정보다 일찍 우리는 숙소로 귀환했다. 악천후에 다카르랠리, 엉망인 일정에 허술한 업체의 대응까지 모든 불행에 몸도 마음도 지쳐 상태로 돌아오는 길, 동생은 조용히 속삭였다. "누나 고마워"
우유니 소금사막Salar de Uyuni
마지막까지 이 풍경을 보기 위해 정말 많은 대가를 치뤘네
우유니까지의 방문은 정말이지 너무 많은 대가를 치뤄야 한다. 황열병 예방 접종, 볼리비아 비자 발급, 우유니 현지의 열악한 시설. 이 모든 걸 해내더라도, 관광 시즌인 우기에도 며칠 비가 안왔다거나 하면 기대했던 풍경을 못볼 수 있다는 크나큰 위험 요소가 있다. 물론 현지 여행사가 어떻게든 좋은 포인트를 찾아준다고는 하지만, 그 때문에 차량 이동시간이 늘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또 쉽지 않은 일이다.
#3 아르헨티나, 소고기와 문명으로의 복귀
"우유니 있다오니 모든 게 다 너무 좋아 보여."
그래도 우유니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동한 이후부터 여행은 비교적 순탄했다. 문명으로의 복귀였다.
우유니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동하는 새벽 버스를 기다리며.
하늘이 핑크빛이었다가 황금빛이었다가 해가 떠오르면서 찬란하게 빛이 났다. 선셋 투어를 하던 어제가 저랬으면 좋았을 걸. 여행은 늘 아쉬움 투성이이다.
그간 계속 흐리던 날씨도 쾌청하니 맑았고, 버스나 호텔 시설도 훨씬 양호해졌다.
현지 가이드도 한인 교포가 해주니, 속시원한 한국어 설명에 가뭄에 단비를 맞은 느낌이었다. 유럽의 파리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우리는 1일 1소고기를 했고(심지어 가격도 너무 저렴했다), 휘황찬란한 홀에서 탱고 공연을 관람했다.
El Charrúa Restaurante y Parrillada, Salta
한 마디로, ¡es Argentina, viva! 당시 가격으로 Pepper Steak는 $210), Steak Medium은 $260 양은 각각 350g 정도였다.
전날 방문했던 다른 식당보다 서비스도 더 훌륭했고 결정적으로 고기를 돌판에 서빙해주어서 좋았다. 덕분에 고기가 지글거리는 소리를 듣는 재미도 있었고 음식도 따뜻한 상태를 유지하며 먹을 수 있었다. 이 때 고기를 너무도 마음에 들어한 동생은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닭가슴살의 건강함과 최고급 안심의 부드러움이 동시에 담겨 있다. 여태까지 내가 먹은 고기는 그저 지방덩어리였다. 배부른데 멈출 수 없다."
"남미 와서 기준이 많이 낮아진 것 같아"
"뭐에 대해서?"
"..모든 것..?"
뜻밖에도 이 여행은 우리 둘에게 행복의 상대성을 가르쳐주었다.
동생이 그당시 여행일기에 그려둔 '여행의 문명 그래프'
페루: 남미남미스럽지만 기본적인 문명 상태는 유지되어 있다. 한, 두달까지는 충분히 살 수 있을 듯 하다.
볼리비아: 여길 가느니 아마존 정글에 가서 살겠다.
아르헨티나: 페루보다 더 도시도시하고 문명문명하다. 세 달까진 무난하게 살 수 있을 듯.
우리에게 다시 이런 시간이 올까?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 집에서 나고 자랐지만, 우리의 길은 많이 달라져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우리는 계속 서로 다른 인생의 길을 걷을 것이다. 아이가 여럿이더라도 부모 또한 그 각각의 아이들에게 다른 부모라고도 하니, 우리를 묶는 공통분모인 부모님에 대한 경험조차도 우린 동일하게 나누지 않은 셈이다.
그렇기에 이 여행이 너무도 소중했다. 세상 모든 일이 늘 그렇듯,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돌이켜보니 그랬다.
동생은 생각보다 즐기는 걸 좋아했고, 생각보다 든든했고, 생각보다 다정했고, 생각보다 외로웠다. 동생이 스무살이 넘어서야 또 내가 스물 후반이 되어서야 나는 녀석에 대해 더 많이 배우게 되었다.
가끔 동생과 긴 대화를 하게 되면 우리는 이 여행의 모든 추억을 곱씹는다. 모든 게 얼마나 말도 안되게 힘들었고, 또 순간순간은 얼마나 빛났는지.
여전히 녀석을 알기 어렵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아니라 정말이지 ‘알 수 없다’. 속내를 잘 말하지 않는 동생은 늘 마음 깊은 곳에 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생각을 숨겨두고 있다. 이따금씩 다소 파괴적인 방식으로 내비치는 그 어둠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나는 모종의 죄책감마저 들곤 한다. 내가 닭을 쳐다보는 소처럼 굴지 않고 누나로서 동생의 삶에 좀 더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도움이 되었을까 그래서 뭔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초콜렛 우유를 박스째 주기적으로 사두는 녀석. 틈만 나면 치킨을 시켜먹는 녀석(전생에 지렁이로 살아서 현생에서 닭에게 뜨거운 복수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도 가끔씩 주말에 "누나 점심에 피자 콜?"을 외치던, 다정한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