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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 Oct 22. 2021

경험한 만큼!


정신을 차려보면 남부럽지 않은 어른이 되어 있다. 10대 시절 어른의 삶을 상상하며 쓰던 소설 속 주인공조차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는데, 어느새 이렇게 당혹스러우리만치 시간이 주욱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진짜 상상하던 어른이 되었는가 하면 그건 전혀 아닌 것 같다. 예전처럼 울음으로 세상을 버텨내지 않는 스스로를 보면서 '이젠 제법 감정이 메마른 어른이 되었군' 하고 내심 뿌듯하다가도, 어린 날의 기억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스스로를 보면 여전히 나는 같은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것만 같다.


우리는 모두 항상 어린 아이인걸까? 어린 시절의 상처가 지금의 한계가 되어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가끔 잘 나가던 유명인들이 어이 없는 언사로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은 무슨 결핍이 있길래 어렵게 얻은 성공을 저리 허무하게 잃나 싶다.

오랜 시간 마음에서 잊혀지지 않던 탈무드의 일화가 있다.


소가 멍에를 진 일이 있는지 없는지는, 멍에가 닿는 부분의 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멍에를 진 소는 그 부분의 털이 눌려 있으니까요. 또, 눈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멍에의 무거움을 경험한 일이 없는 소의 눈은 똑바로 앞을 보고 있지만, 멍에를 지게 되면 눈빛이 침착하지 않고, 사팔뜨기처럼 됩니다. 일 년 내내 멍에 쪽으로 눈을 주기 때문입니다.

- 탈무드, <빨간 소>  


한 아랍인이 한번도 멍에를 진 적 없는 소를 제례용으로 사려는 유태인에게 그 소를 팔면서, 그를 골려주고 싶은 마음에 밤새 그 소에 처음으로 멍에를 지웠다가 이를 눈치챈 유태인에게 결국 그 소를 팔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이야기의 주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비슷하게 과욕을 경계하라는 것이지만, 오랫동안-정말 오랫동안-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멍에를 진 소는 티가 난다'라는 내용이었다. 소가 멍에를 진 적이 있는지 털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은 육체적인 증거를 의미하고 눈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은 정신적인 증거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이 이야기는 인생의 굴곡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긴다는 메시지에 가까웠다. 그것이 단 하룻밤의 경험이더라도 말이다. 하필이면 소재가 멍에인 것도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했다. 멍에는 '삶의 짐'에 대한 아주 흔한 비유이니까.




결국 경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경험은 우리를 규정한다. 


지인 중에 마음이 굉장히 너그러워 늘 그 태도를 배워야지 생각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혈기 넘치는 어린 마음에 내가 쉬이 분노할 때 그분은 너그러운 태도로 상대를 이해하고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일이 풀리도록 한다. 그분이 어떻게 그런 성정을 갖게 되었는지 늘 궁금했는데, 어느 날 대화를 하다가 그것은 그녀의 부모님이 그녀에게 물려준 무형의 유산임을 알게 되었다. 그분의 아버지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지만 음악을 사랑하고 아웃도어를 즐기셨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그녀에게 다양한 악기를 가르치고 노래를 가르쳤다. 일가친척이 모이면 어느 순간 누군가 노래를 시작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모두가 화음을 넣으며 노래를 부르는 풍경이 펼쳐졌다고 했다. 또 어린 그녀를 데리고 주말이면 산으로 강으로 떠나 야생화를 알려주고 낚시를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미술과 역사에 해박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예술적 소양은 일상에서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경험을 하고 넓은 세상을 보다보니, 살면서 힘든 일이 있어도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또 다른 지인으로는 늘상 유쾌한 태도로 상대방을 즐겁게 하고 생각지도 못한 발상으로 웃음을 주는 분이 있다. 개복치도 아니고 늘 '스트레스로 사망!' 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도통 '가볍게'가 되지 않는 나로서는 그녀가 참 부럽다. 나에게 모든 걸 무겁게 만드는 희안한 재주가 있다면, 그분은 모든 걸 가볍게 만드는 부러운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어떻게 그런 발랄한 정서를 갖게 되었나 얘기를 들어보면, 아버지가 직업 군인이셔서 어릴 적부터 많은 지역을 옮겨다니며 살았던 데에서 비롯된 걸 알 수 있었다. 군인 가족에게 배정되는 관사는 주로 지방의 시골에 위치해 있어 그녀는 어릴 적부터 자연을 벗삼아 놀았다고 했다. 방과 후 뒷산에서 쑥을 캐며 시간을 보내고, 하천의 구멍에 설탕을 넣으면 가재를 잡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발령에 따라 잦은 이동이 있었고, 아마도 그녀는 그때마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빠르게 적응했어야 했을 것이다. 이것들이 그녀의 친화력과 유쾌함을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나의 모든 경험에 대해서 생각한다.


모범생으로 살아온 10대 시절은 나를 철저하게 규범적인 이상주의자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매사에 진지하고 때로는 나의 진지함이 지겨워 재밌는 사람이 되는 것을 동경한다. 한편으로 착한 사람 노릇을 하느라 정작 스스로는 결핍되어 있다는 갈증에, 오히려 맹렬하게 스스로이기를 갈망하고, 그러지 못할 때 고통을 느낀다.


사람 사귀는  늦되고 서툴러 상처받은 경험이 적잖다.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것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타인에 끝없는 호기심을 발휘한다. 나를 두렵게 하는 감정을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 반복되는 질문 끝에 그의 총체를 이전보다 이해하게 되면, 마치 점토덩어리에서 어떤 분명한 형체를 빚어낸 것만 같다. 오셀로 게임에서처럼 미지로 가득찬 세상을 조금이라도 인지의 세상으로 바꾼 것만 같다.     


여행을 많이 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풍경을, 새로운 생각을 만났다. 그래서 내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무척 상대적인 것이었음을 깨닫고 조금 더 세상을 너그롭게 볼 수 있었다.  


이 경험들은 나의 선택과 호불호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내가 퇴직금을 탈탈 털어 남미여행을 간 것도, 내가 성실한 사람, 밝은 사람, 자기 취향이 분명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나의 경험이 내 앞으로 질서정연하게 펼쳐 놓은 길을 따르는 일이었을 것이다.




경험한 만큼 세상을 보게 된다.

경험한 만큼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산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To live is to experience things, not sit around pondering the meaning of life.

- Paulo Coelho, <Al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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