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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 Oct 30. 2022

작은 마음

마음의 병에 시달리다



해가 넘어가 계절이 바뀌었다. 코로나가 시작된 지 3년차의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른 나뭇가지에는 꽃망울이 올라오며 사방에 봄기운이 넘실대기 시작하였지만, 나는 봄같지 못했다. 



자꾸만 악몽을 꿨다. 일어나고 나면 금새 흐릿해지지만, 문제에 놓여 긴장하고, 무언가를 해야만 하고, 누군가에게 쫓기는 그런 꿈이었다.


한번은 웬 예술 학교에 첫 기수로 입학하는 꿈을 꾸었다. 4일 정도 공부를 하더니 갑자기 시험을 쳐야한단다. 그런데 공부를 하나도 안해서 불안해 미쳐버리는 식의 꿈이었다. 또 다른 날은 친척 결혼식을 참석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운 결혼식이었다. 장시간 이어진 엄숙한 진행에 지친 상태로 피로연을 갔는데, 아뿔싸 백신패스를 검사하는 거다. 난 꿈 속에서도 여전히 백신을 맞지 않았나 보다(건강과 수술 때문에 백신을 맞지 못한 상태였다). 잘 차려입은 직원이 방역 패스를 검사하자고 하는데 난 쫓겨날까봐 두려워하며 꿈이 끝났다. 매번 이런 꿈을, 하루에도 두세번씩 꿨다. 그러니 잠이 깊을리 없다.


아예 잠을 못 드는 밤도 많았다. 불면증이 심할 때는, 그저 눈만 감고 긴 밤을 꾸역꾸역 넘겼다. 시각을 제외한 감각은 도리어 지나칠 정도로 또렷했다. 그러고 있으면 내 속도 모르고 창밖은 어스름하게 밝아오곤 했다. 그렇게 아침을 맞으면 전혀 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희한하게도 가난에 대한 불안이 시작되었다. 현재의 나는 전혀 그럴 이유가 없고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은 지금뿐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내가 언제까지 지금처럼 돈을 벌 수 있을까? 큰 돈이 드는 일-예컨대 또 다른 큰 병-이 생기면 어떡하지? 혹은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돈이 얼마인데'라는 망설임이, 사소한 결정마다 따라 붙었다. 그러니 먹는 데 돈을 쓰는 것도, 노는 데 돈을 쓰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 성대로 일하는 데 몸을 놀리지 못하는데 감히, 그런 돈이라니.  



부쩍 부러운 것도 늘어났다. 정신없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만 아무 것도 발전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몸이 힘들어서 사람 만나는 게 힘든 게 아니라 마음이 위축되어서 사람을 만나는 게 힘들었다. 일찌감치 자가를 마련한 친구, 취미 부자여서 혼자서도 늘 바쁘고 재미나게 사는 친구, 세상 물정에 밝은 동료. 모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에너지가 넘치고 무언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는 주변 사람을 보면 나도 의욕이 나고 그들의 행복에 나도 진심으로 행복했는데, 어쩐지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초라해지는 느낌도 별로이고 별로인 느낌도 별로다. 마음이 더없이 못나졌다. 



그럴 수록 기운을 내서 몸을 돌보고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을 탐구해야 된다는 것은, 머리로만 아는 일이었다. 마음에서 재미라는 게 소멸한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억지로 돌아봐도 소용이 없었다. 지난 몇년간 치열하게 쫓아다녔던 공연도 이제는 감흥이 없었고 무엇보다 두 세시간씩 불편한 좌석에 꼼짝 않고 앉아 있을 자신도 없었다. 열심히 읽던 책도 귀찮았다. 슬프면 글이라도 써질 줄 알았건만 글은 몸은 덜아프고 생각은 가라앉을 때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결정적으로 내 평생에 가장 열정을 발휘한 먹는 것조차, 의욕을 잃었다. 자꾸만 속탈이 나고 어지러우니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겁났다. 이런 감정이라니. 인생의 이 다음이 전혀 기대가 되지 않았다. 되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두렵고 버거웠다. 이전의 인생들은 갖고 싶은 걸 갖지 못해서 괴로웠고 지금의 인생은 갖고 싶은 게 없어서 절망적이다.


그렇게, 내가 얼마나 나약한 사람인지를 뼈저리게 알게 될 뿐이었다. 와르르. 마음이 무너지는 소리가 매번 들렸다. 아무런 의욕도 낼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외모도 엉망진창이니 더욱 기분이 위축되었다-두어달은 누룽지 끓인 것만으로 연명한 탓에 조금씩 살이 빠지는 게 그나마 좋은 소식 정도다. 늘 머리숱이 너무 많아 고민이었는데, 아픈 사이 머리숱은 눈에 띄게 줄어 두피가 비칠 정도였다. 내 몸도 아프고 세상에는 역병이 창궐하고 전쟁이 나고 경제는 어려워지고...세상이 멸망하려나, 그런 생각에나 무시로 잠겨 있었다.   


어떤 심리검사든 자살 의사를 확인하는 질문들이 몇 개씩 포함되어 있지만 볼때마다 늘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었다. 그런데 그 질문들이 새삼스러웠다. 철부지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깜빡였다. 그렇구나, 누군가에게는 진지한 질문이었겠구나. 그런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매번 세상을 배운다. 아니라고, 우습게 봤던 것들을 이해하게 되는.  




그래도 죽어지진 않았다. 갑자기 혜성이 날아와 지구가 터져버리기를 슬쩍 소망해보기는 했어도 죽을 용기까지 나지는 않았다. 아직은 그래도 살아있는 이성이, 그럴 일이 아니라고 나를 달랬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힘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었다. 얼마나 지금까지 팔자 좋게 살아왔으면 이까짓 거 가지고. 


그래도 나를 일으킨 건 내가 아니라 현대 의학, 그리고 사람들과 시간이었다.


내과 의사는 내 허리 사정을 듣더니 호르몬 상태 때문에 진통제를 강한 성분으로 처방하지 않으면 잘듣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다시 정형외과 의사에게 전달해서 진통제 용량을 늘렸다. 몇달만에, 고통이 물러갔다. 그 주말, 공원을 걸으며 고통 없이 보낸 짧은 시간을 잊지 못한다. 


좀 다른 진단을 받을까 싶어서 간 다른 정형외과에서 엉겹결에 도수치료도 시작했다. 뭐든 좋았다, 나를 낫게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작한 도수치료에서 치료사가 그렇게 말했다. 


꼭 낫게 할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내 얼굴이 너무 죽상에다가 목소리도 모기만하게 힘이 없는 꼴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끝없는 절망 속에서 그 확신에 찬 위로가 정말로, 정말로 고마웠다. 



디스크 치료로 유명한 재활의학과 교수의 영상도 보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낫는단다. 튀어나오고 터진 디스크가 흡수되고 줄어들면서 낫는단다. 다만 그게 얼마나 걸릴지, 그때까지 삶의 질이 얼마나 나쁠지의 문제일뿐. 디스크 수술 후기도 더 보았다. 별일 아닌 듯이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그러나 왜 의사들은 적극적으로 추천하지 않는가? 호르몬 기관을 수술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버려두면 호르몬이 엉망이 될 것이었다. 허리 수술은 달랐다. 찬반 논란이 뜨거웠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되는대로 하자, 라고 먹어지지 않는 마음을 먹으려 애썼다. 기운이 떨어지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야지.



엄마는 나를 끌고 수영장을 등록했다. 수영은 걷기와 함께 허리디스크 환자에게 허락된 몇 안되는 운동 중 하나이다. 코로나로 텅텅 빈 수영장 레일에서 나는 발장구를 칠 기력도 없어 천천히 걸어다녔다. 처음 얼마간은 물이 무섭고 어릴 적 수영을 가르치던 강사들의 강압적인 말투가 떠올라서 기분이 불편했지만, 얼마 지나니 물이 편안해졌다. 기분 좋은 압력으로 온 몸을 휘감아 지나가는 물의 흐름이 부드러웠다. 물 그림자는 잔잔한 물결에 따라 일렁이다 내가 팔을 부드럽게 휘두르면 다시 다른 파동을 그렸다.  


수영이 좋았다. 수영을 가는 날이 기다려졌다. 나는 취미가 수영이야. 혼잣말을 해보았다. 오랜만에 취미라는 게 생겨서 기뻤다. 건강한 취미여서 더 좋았다. 체력도 조금씩 늘었다. 어느새 발장구도 칠 수 있었고 두바퀴 정도는 한번에 수영할 수 있었다. 




허리 진통제를 먹고 괜찮은 시간이 조금씩 길어졌다. 이전엔 약을 먹어도 여섯시간 정도 지나면 또 다리가 저려왔는데 이제는 열두시간 내내 제법 통증을 잊을만했다. 하루에 두 번 먹는 약이니 그 정도면 통증을 잊고 하루를 지낼 수 있었다. 



초여름, 수영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선선했다. 새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그리고 그늘을 따라 일렁이는 볕내음. 초록이 찬란한, 평일 오후 한 시.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간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아 평화롭다.


일부러 소리내 말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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