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 걸리다
한여름을 넘어가면서 나는 자신감이 생겼다. 3개월마다 한번씩 하는 호르몬 검사에서도 봄에 했던 검사보다는 나은 결과가 있었다. 호르몬 약의 복용량도 조금씩 줄여보았다. 두통은 더 이상 없었고 배앓이 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수영도 열심히 다녔다. 수영 다니는 횟수를 주2회, 주 3회에서 주 5회까지 늘렸다. 그렇게 다음 호르몬 검사 때는 약을 그만 먹어도 된다는-이젠 모든 게 정상이라는-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 기대하던 때였다.
나는 덜컥 코로나에 걸렸다.
긴 코로나 시국에도 주변 사람들은 제법 무사했다. 나도 다행히 회사가 재택 근무를 하는데다 어차피 몸이 안좋아 별다른 외부 활동을 하지 못하니 큰 탈이 없었다. 물론 사이사이 유사 코로나 같은 날은 많았지만, 매번 검사를 받아도 음성이었다. 수술한 것 때문에 그래, 겨울이라 그래, 냉방병 때문에 그래, 다른 이유야 얼마든지 있었다. 어쨌든 별 탈이 없었어야 했다. 나는 수술 일정과 몸 상태 때문에 백신을 전혀 맞지 않은 상태라, 엄마는 더 나를 신경 썼다.
그러던 엄마가 덜컥 코로나에 먼저 걸렸다. 전날 목이 칼칼하다고 할 때만 해도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서 그럴 거라고 가족 모두 생각했는데, 결국엔 아니었다. 나이 때문에 크게 앓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엄마는 무난하게 초반 며칠을 보냈다.
나는 그래도 기운내서 즐겁게 살아보자는 결단으로 하필 오랜만에 집에서 먼 동네로 나들이를 나섰을 때였다. 아침만 해도 괜찮았는데, 정오즈음 되니 몸이 뜨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번이고 절로 목에 손을 댔다. 목이 뜨끈했다. 목구멍에 가시가 돋아난 듯 불편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찜찜함에 근처 약국에서 자가키트를 사서 검사를 하는데, 한 줄이 나왔다. 역시, 하고선 일행을 기다리다 심심해서 키트를 다시 한 번 들여다 보는데 희미하게 두번째 줄이 보였다. 순간 주변이 음소거가 되었다. 얼굴이 굳는 동시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다시 한 번 키트를 들여다봐도 똑같았다.
주말에다 낯선 동네여서 어렵사리 문을 연 병원을 찾아갔다. 결과는 확진. 드디어, 기어코, 결국에는.
병원을 나서는데 열감과 함께 황망함과 두려움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그 중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서 벌개진 얼굴로 대충 씻고 죽을 네 숟갈 먹고 약을 삼켰다. 열이 끓어 잠이 오지 않는다. 앞으로 일주일은 이렇게 가지 않는 시간을 보고 있겠지.
약기운으로 졸고 있을 때였다. 현관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요즘 세상에 도둑이 이렇게 대낮에 들리는 없다고 생각을 하는 차에 갑자기 엄마가 뿅 나타났다. 열 때문에 헛것인가 했는데 진짜 엄마였다. 얼떨떨하게 어떻게 온건지-와도 되는 건지-물었다. 내가 확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선 몇시간을 보건소와 구청에 전화를 했고 기어코 연결이 되어서 사정을 설명하고 허락을 받아 왔단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대단하다, 우리 엄마. 나는 엄마같은 엄마는 못 되겠네.
신기하게도 엄마가 오니 몸이 반짝 괜찮아진 것 같았다. 심지어 허기가 느껴져 이것저것 마구 먹어댔다. 엄마는 늙은 사과를 파줬다. 강판이 있었으면 어릴 적 아팠을 때처럼 사과를 곱게 갈아줬을테다.
엄마와 달리 나는 꽤나 앓았다. 둘째 날 새벽에는 열이 펄펄 끓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이대로 뇌가 녹는 건 아닐까 싶었다. 새벽 내 엄마가 물수건과 아이스팩을 되는대로 얼굴과 머리에 처덕처덕 붙여주었다. 딱딱하고 축축했지만 가릴 새가 없었다. 절로 신음 소리가 나왔다. 그 다음날 밤에는 목이 아파서 잠이 깼다. 목구멍이 실시간으로 난도질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분명 잠들 때만 해도 거슬리는 수준이었는데 새벽을 지나면서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였다. 병원에서는 일반적인 코로나 증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약을 처방하는데 나는 호르몬 약과 허리 진통제를 이미 잔뜩 먹고 있는 걸 또 열심히 설명해야 했다.
코로나가 시작된 지 꽤 지난 때라 그런지 보건소의 전화는 싱겁게 끝났다. 이틀째야 걸려 온 전화에서 보건소 직원은 내 증상을 묻더니 일반관리군에 넣겠다며 빠른 쾌유를 빈다는 사무적인 인삿말로 마무리했다.
3일차가 지나자 크게 앓는 건 줄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견딜만한 상태가 되었다. 엄마는 이 정도인 게 장하다며 나를 북돋았다.
엄마가 먼저 일찍 일어나 아침을 챙겨 먹고 혼자 놀고나면 나는 늦게 일어나 아침을 삼켰다. 점심 나절을 넘어가면 더 기운이 나서 집 정리도 하고 엄마와 제대로 된 점심식사를 같이 했다. 오후 내내는 엄마와 따로 또 같이 놀았다. 엄마를 위해 재밌는 영상도 찾아주고 드라마도 틀었다. 엄마가 열심히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나는 그 옆에서 반쯤 내용을 같이 보면서 딴짓을 했다. 엄마가 놀기 편하게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그러고 있으면 어느새 해가 지고 그러면 금새 잘 시간이 되었다. 엄마랑 나란히 누워 위험하게도 서로 몸을 기대고 잠이 들었다.
나보다 일찍 격리가 끝난 엄마는 격리가 해체된 날 새벽 바로 본가로 떠났다. 올때도 신기루처럼 나타나더니 갈때도 야밤을 틈타 도깨비처럼 사라졌다. 엄마는 며칠 잘 챙겨줘서 고맙다고 덕분에 쓸쓸하지 않게 잘 지나갔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나야말로 고맙지 뭐. 꿈같이 나타나 새벽에도 나를 돌봐주고 끼니도 챙겨준 건 엄마인데.
덕분에 우리는 서로 외롭지 않았다. 갑자기 홀로 된 밤 나는 어른인 척 엄마를 보내고 답장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핸드폰을 한손에 꼭 쥐고는 한참을 뒤척이다 홀로 잠이 들었다.
엄마가 떠난 뒤 며칠은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혼자 있으니 시간이 더뎠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바쁘게 하기에는 머리가 빙빙 돌았다. 몸무게를 재보니 역대 최저 몸무게가 나왔다. 열심히 반년을 다이어트에 매진했을 때에도 달성하지 못했던 수치였다. 아픈 게 최고네, 혼자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렇게 더이상 재밌지 않은 드라마를 멍하니 돌려보며 꾸역꾸역 마지막 며칠을 버텼다.
격리가 해제된 이후에도 어지럼증은 한동안 이어졌다. 목도 잠겨서 말하기가 영 불편했다. 원래도 몸이 안좋았으니 후유증이 언제까지 갈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떨어진 체력을 기다려주며 여름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