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히말라야 12

밤의 재발견

by 전종호


랑탕.jpg <랑탕계곡의 운무>

현대인에게 밤은 잉여의 시간에 불과하다. 문명의 시간은 낮이다. 산업과 정치는 낮에 이루어진다. 낮은 밝음이고 밤은 어둠이다. 이건 단순히 채도의 명암만을 말하지 않는다. 낮은 근면의 세계이고 선이고 돈이며, 밤은 나태와 낭비의 시간이고 악이다. 따라서 조명과 같은 기계적 장치와 의식의 각성으로 낮은 무한대로 확장된다. 노동 시간은 연장되고 학습의 시간은 밤까지 지속된다. 낮과 같은 조명 속에서 밤낮을 구별하지 못하는 닭들은 밤에도 알을 낳아야 하고, 노동자들은 밤늦게까지 연장근무를 해야 하며, 학생들은 단지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명분으로 밤을 단축하여 공부를 해야 한다. 밤은 없애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불필요의 시간이며, 내일의 낮을 위한 재충전의 의미만 가진다. 근대 이후 인간의 성공 여부는 밤을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따라 달려있다.

이러한 낮의 문명에 익숙한 사람에게 히말라야의 밤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것이다. 저녁 7시 무렵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9시쯤 희미한 태양광 전등조차 소등되면 세상은 말 그대로의 암흑의 시간이다. 전기도 없고 전파도 없다. 헤드 랜턴을 이용해서 간단한 메모만 할 수 있을 뿐, 독서는 어림도 없다. TV도 없고 와이파이도 안 되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도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인공조명에 익숙한 문명인에게 말 그대로 속수무책束手無策, 손이 묶인 게 아니라 뻔히 눈을 뜨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암흑의 밤은 정말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헤드 랜턴을 켜 놓고 하루의 일정을 정리해 본다. 출발한 시간, 쉬었던 시간, 점심시간, 또 쉬었던 시간, 오가다 본 것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들, 저녁 시간, 점심과 저녁의 메뉴 등 별로 쓰잘 것 없는 것까지 메모하고, 오늘 만났던 사람들과의 대화 중 기억에 남은 것들을 적는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오늘 밥값과 찻값으로 지불했던 소소한 비용까지 적어본다. 굳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시간 때우기다. 그래도 시간은 무진장. 이 시간부터 잘 수는 없다. 이 시간에 잠들도록 내 몸이 조건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몸은 피곤하다고 잠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되어야 잠든다. 원시의 세계에 와 있어도 몸은 문명의 산물인 것이다.

시詩 나부랭이를 쓴다고 하는 나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낮에 잠깐씩 메모한 것들을 펼치고 정리해 본다. 새로운 환경, 압도적인 대자연에 던져져 있을 때는 별의별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과거에 대한 회상과 더불어, 눈 앞에 펼쳐진 대자연에 대한 영감들이 명멸한다. 중구난방의 생각들이 휘발되기 전에 놓치지 않으려고 수첩이나 휴대폰 메모장에 적는다. 낮에 휘갈겨 쓴 것들을 밤에 꺼내놓고 보면 도무지 무슨 글씨인지 알아볼 수 없는 것도 있고, 부랴부랴 적을 때는 꽤 기발한 생각이나 문장 같았는데, 정리할 때 보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기도 하다. 버리고 옮기고 다시 이어 쓰고 정리한다. 그래도 시간은 철철 남아돌고 밤은 아직 깊어지지 않았다.

낮이 눈의 시간이라면 밤은 귀의 시간이다. 이것저것 다 포기하고 슬리핑백에 들어가 눕는다. 어둡다. 깜깜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포기하고 그냥 누워 있는다. 어둠 자체를 응시한다. 한참 지나고 보면 신기하게도 깜깜한 어둠이 눈에 익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았던 것은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 대한 당혹감과 어수선한 부산스러움 때문이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기로 한다. 눈이 아니라 귀를 믿고 방안에 누워 방 밖에서 일어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기로 한다. 바람이 거세게 분다. 바람이 나무 꼭대기를 타고 하늘을 휘저으며 부는 것 같다. 바람이 불면서 나무끼리 부딪치는 것도 같다. 무슨 나무인지 바스락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훠이 훠이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불안하게 떠는 소리 같기도 하다. 알지 못하는 산짐승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고 집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소리가 섞여 있는 것도 같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면서 소리에 집중한다. 숨을 크게 내쉬고 들이마시면서 자연스럽게 호흡을 유지하려고 노력해본다. 나무 사이로 부는 소리를 들으며 또한 누워 호흡하는 나의 숨소리를 바라본다. 한없이 고요하다. 조용히 누워 고요함을 알아챈다. 그리고 현鉉에 튕기듯 침묵을 깨는 소리까지 밖의 모든 소리에 주의를 기울인다. 침묵은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작은 소리를 알아채는 기제다. 계곡을 울리며 쏜살같이 달려가는 바람과 숲을 흔드는 바람, 얼어붙은 계곡 얼음 밑으로 크게 소리 내어 흐르는 물소리, 서로 부딪치는 나뭇가지들, 그밖에 미세한 소리까지 세세히 들린다. 나의 영혼아, 잠잠하라.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방의 주변을 둘러보고 밖의 상황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세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각만이 아니라 소리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요한 마음으로 멈추어 서서 바라보고 귀 기울일 때만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보는 것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고서는 날아가는 기러기를 볼 수 없지만, 시각장애인은 보지 않고도 들려오는 소리로 기러기 편대를 볼 수 있다고 하더니, 우리도 마음을 알아차리고 챙기면 평소 익숙하지 않은 소리까지 심장 속으로 빨아들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거룩한 밤이다. 차분한 마음으로 마음의 창을 열기만 하면 보이지 않던 세계, 들리지 않던 소리의 우주가 나의 마음속으로 깊이 스며들다니! 소리의 세계는 즉시 상상력의 세계로 연결된다. 상상의 세계는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소리의 세계는 힌두의 신의 세계를 방문하기도 하고, 별빛 쏟아지던 지리산 장터목 산장의 밤으로 연결되기도 하고, 어린 시절 아궁이 앞에서 불씨를 지피던 어머니를 불러오기도 한다. 상상의 세계는 시나브로 잠의 미궁으로 빠져든다.

밤은 낮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다. 밤은 낮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살아있는 상수常數다. 밤은 침묵이고 침묵은 평화와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 밤이 되어야 비로소 만물의 영혼은 빛을 내고 활동한다. 밤은 물활론物活論의 세계다. 산업과 정치가 대낮의 산물이라면, 시나 음악은 밤의 자식이다. 말씀이 있기 전에 세계는 어둠 속에 있었고, 어둠은 고요 속에서 세계를 잉태한다. 고요는 텅 빔이고 충만이며, 생명의 바다다. 세계는 밤의 고요 속에서 다시 살아 춤추며 움직인다.


아궁이의 불이 고요의 끝에 가 닿는다/ 거역할 수 없는 고요의 혀가 불길을 당기고/ 밤새 어둠을 살라도 고요를 쫓지 못한다/ 살아있는 것은 불이 아니라 적막이다/ 세상을 등지고 온 몇몇이 불 앞에 앉아/ 목을 조이는 울음을 삼키고/ 칠흑의 고요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전기도 전파도 닿지 않는다/ 한 줌의 온기로 목숨을 버티며/ 하릴없이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 아궁이에는 꺼질 듯 작은 불이 타고/ 하늘에는 별이 호수처럼 비추는데/ 불 앞에서도 흐르는 별 아래서도/ 마음은 비고 시리다/ 집에서 멀리 떠나 맞는 히말라야의 밤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비단 몸서리치는 추위 때문만은 아니다/ 세상 싸움에 지친 눈물 때문도 아니다/ 깊고 큰 산에 들어와 마주한/ 저 고요의 바다/ 텅 빈 묵음을 더는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요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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