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씩 만들어 보세요. 1994년 11월 16일
좋은 사람, 착한 사람, 훌륭한 사람.
이런 것은 다른 사람이 이루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씩 만들어 가는 거란다.
예쁜 사람, 부지런한 사람, 깨끗한 사람, 공부 잘하는 사람, 연구하는 사람.
예지가 생각한 사람.
하나씩 만들어 보세요. 1994.11.16. 엄마.
아직도 성장 드라마나 소설이 좋다. 이제는 꽤나 공고해진 성격이나 진로가 한 번에 바뀌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걸 머리로 되네이고, 현실로도 느끼지만 사람은 변화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본성은 쉽게 변하질 않는다.
중학교 때 첫 MBTI 검사를 한 뒤로 여태까지 한 번의 변화도 없이 살아왔는데, 그 해석에 따르면 나는 이상주의자 기질이 두드러진 NF형 사람이다. 사람을 철석같이 믿고 특히 사람의 변화를 지지하는 사람. 그래서 성장드라마도 소설도 좋고, 자라고 변하는 사람들이 좋다. 그리고 나도, 내가 그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아직 그렇게 더 변할 수 생각할 때 더 활력이 생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변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일 때가 있다. 오늘 친구와의 대화에서 박명수 씨의 명언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은 거다'라는 말을 내뱉으며 둘 다 공감의 웃음을 내뱉었다. 맞다, 어쩌면 진짜 늦었다. 어떤 변화의 시점이 빠르면 그만큼 실천하고 노력할 시간이 많아지니까 이미 해왔던 사람에 비해서는 반박할 수 없게 늦은 거다. 근데 다시 한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분의 바닥을 치고 나면 드는 생각이 있다.
'내가 시도하는 건 처음이잖아.'
내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이상, 내 인생에서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는 충분히 변할 수 있다. 늦은 것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 실천하는 건 처음이니까. 그리고 정신 승리처럼 덧붙이자면 인생이 생각보다 짧은데 그 반대급부로 생각보다 긴 것을 종종 봤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서 부족한 듯 아쉽지만 생각보다 남아돌아서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도 많다.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은 시간에 따라서 달라진다. 처한 환경에 따라서 원하는 모습이 다르고, 같은 상황이라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기존에 있는 모습을 바꿔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한다. 우아한 할머니가 되는 게 목표였다가 할머니가 되려면 그전엔 어떤 아줌마가 될지 고민해야 하니까 단단한 어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이 '어떻게 되는 건' 한순간에 될 일도 아니다. 사람이 변하는 일은 시작이 반이 아니고, 습관이 되면 겨우 반이 된다.
엄마의 쪽지처럼 내가 생각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 방향을 설정하는 것도 나로부터 시작되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스스로 해야 되는 일이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 자신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 보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나 자신이다.
그나저나 다른 건 다 알겠는데 저 쪽지 속에 '연구하는 사람'은 뭐였을까.
하나씩 만들어보세요.
RE :
엄마,
어릴 적부터 엄마는 다른 사람이 이루어주는 것보다는 내가 스스로 하나씩 나를 만들어가는 걸 많이 알려주려고 했던 것 같아.
생각한 만큼의 사람이 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더라 엄마. 특히 꾸준함이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래도 이 쪽지를 발견했으니까 한동안 다시 엄마가 말한 대로 내가 생각한 사람을 하나씩 만들어야지 싶어.
엄마를 포함해 그 누구도 나를 나로 만들어주진 않으니까. 나이 들어갈수록 더 그렇겠지. 언젠간 내가 생각한 사람을 만들지 않아도 그런 사람이 되겠지?
2020.03.17 예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