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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지 Feb 20. 2020

있는 모습대로 해도

아주 예뻐요. 1994년 05월 27일 


예지야 

네가 잘못한 것이 없다면,
미리 눈치 보면서,
다른 사람 마음에 들려고 하지 마세요.

있는 모습대로 해도
아주 예뻐요. 

1994.5.27. 엄마가 


내 첫 집단생활의 기억이 있을 때부터 점심시간은 엄마의 쪽지를 보면서 시작되었다.

 

대부분 '예지야'라고 시작되는 중형 포스트잇 사이즈의 쪽지. 

그 쪽지는 대부분 먹을 것들이 있는 통에 담겨 있었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고 급식이 보편화되었을 때는 수저통에 들어 있었고, 

때로는 도시락 통에, 간혹은 간식 통을 열면 발견하곤 했다. 


덕분에 늘 밖에서 뭘 먹기 전엔 엄마를 생각했다. 

그래서 요즘도 맛있는 걸 보면 '이거 엄마 사다 줘야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아빠는 섭섭하겠지만. 

어쩌면 나름의 귀여운 낙인 효과를 노린 계략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배고프고, 배부르고, 맛있고, 맛없는 모든 것에 엄마가 떠오른다. 


그 쪽지엔 대부분 일상적인 것들이 적혀 있었지만, 

간간히 엄마가 직접 나에게 건네지 못하는 말들이 적혀 있었다. 


말로는 사뭇 쑥스러운 말들. 혹은 말로 하면 그 힘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말들을 적어줬다. 

때로는 응원이었고, 대부분은 사랑이었고, 가끔은 훈계였다. 


나는 글에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탓에 물건은 열심히 잘 버리는 데, 편지는 못 버리는 편이다. 

어쩌면 이 쪽지에 엄마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생각 탓이 더 버리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쪽지는 물에 잉크가 번져 거의 알아보지 못하기도 하고, 

너무 일상적인 쪽지라 여전히 엄마가 외출한다고 하면 집에 남기는 문구와 동일하지만 선뜻 버리지 못하겠다. 

 



이 쪽지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난생처음 혼자 열흘간의 해외여행을 다녀온 뒤였다. 


파리를 가면 좋아할 거라는 주변 친구들의 수년간의 추천에 힘입어 갔던 여행의 계기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나는 그 당시 조금 지치고, 많이 다쳤지만 어디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아니, 하소연하고 들어줄 사람도 받아줄 사람도 많았지만 어디에 풀어놔도 시원한 느낌이 아니었던 게 컸다. 


'내가 누구였지'라는 질문을 다시 할 때였다. 


이렇게 스스로를 지칭하면 우습겠지만 내 기억 속 과거의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었는데, 그때의 나는 빛을 잃었다. 평생을 내가 누군지 생각하고 살았지만 잠시 그 생각을 잃었더니, 다시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공간을 옮겼다. 

서울에서 먼 곳으로. 


다행스럽게도 파리는 나랑 꽤나 잘 맞는 도시였고, 한 번쯤은 외국에서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태어나서 처음 해봤다. 책에서만 봤던 수많은 명화, 엄청난 파이프 오르간의 웅장함 (난생처음 음악을 듣고 울었던 기억을 남겼다), 아직은 겨울 공기가 차갑지만 현대미술관 앞에서 열심히 보드 타던 소년들, 멍 때리고 공원에 있는데 같이 공원에 있는 모든 사람이 멍을 때리고 있었다던지 하는 일상적인 것들. 


그리고 그곳에서 엄마가 가장 그리웠다. 

엄마, 내가 엄마랑 여길 왔으면 정말 많은 얘기를 했을 텐데. 




같이 살 때는 '저녁 먹고 들어 갑니다' 외에는 전혀 하지 않았던 문자를 썼다. 


엄마가 스마트 폰을 쓰지만 카카오톡을 하지 않는 탓에 문자를 보내야 했고, 하루에 한통만 쓰려했다. 그 편이 경제적이니까. 처음엔 '나 간다 도착해서 연락하겠다' 그리고, '어디에 도착했고, 지금은 어디다. 몇 시다.'라는 생존 문자를 보냈다. 답장이 내가 보낸 것보다 좀 더 길게 왔다. 본인은 아침에 뭘 했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엄마의 말투 그대로. 


다음엔 나도 전 보다 좀 더 길게 보냈다. 

아뿔싸, 그랬더니 더 긴 문자가 왔다. 


열흘 남짓한 여행 기간에 생각이 담긴 긴 문자를 나누었다. 사진은 아까워서 아빠한테 엄마에게 보여주라고 하고 와이파이 접속 후 카카오톡으로 보냈다. 엄마는 꿋꿋하게 문자로 사진을 보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우리 집의 풍경, 서울의 날들을. 


여전히 엄마는 내가 어떻게 자랄까 궁금해했고, 이 여행에서 내가 무엇을 깨닫고 돌아올까 기대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전히 

때로는 응원이었고, 대부분은 사랑이었고, 가끔은 훈계인 메시지를 보냈다. 


집에 돌아가면 어린 시절 엄마의 쪽지를 정리해야겠다 싶었다. 




쪽지 꾸러미는 지퍼백 속에 담겨 있었다. 

날짜 순서 없이 헝클어져 있어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렇다고 날짜 순으로 하기엔 잃어버린 쪽지도 있었다. 


여러 쪽지를 보다가 지금의 나에게 엄마가 해주는 말처럼 들리는 걸 첫 쪽지로 하기로 했다. 


네가 잘못한 것이 없다면, 미리 눈치 보면서 다른 사람 마음에 들려고 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에 마음에 드는 것보다, 

내가 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것. 


있는 모습대로 해도 예쁜, 

그것 도 아주 예쁜 나를 그대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26년 만에 꺼내 본 쪽지가 나에게 다시 깨닫게 해 줬다. 





RE : 

아, 나의 엄마.


엄마.


나는 7살에 엄마가 나에게 해줬던 얘기가 여태 필요한 사람으로 한 틈도 자라지 못한 것 같은데, 엄마는 내가 어릴 적에도 지금도 엄마네.


2020.02.17. 예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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