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들녘의 가을 준비

(새벽 자전거에 실려, 남아프리카 테이블 마운틴에서)

by 바람마냥

벌써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서늘하다. 잠결에 일어나 문을 닫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아래층에선 아내가 일어났는지 사람 소리가 난다. 다시 눈을 감아도 잠은 올 것 같지 않아 일찍 일어나기로 했다. 시간을 보니 6시가 되었다. 무엇을 할까? 여러 가지 생각 끝에, 바람이 시원해 자전거를 타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그렇게 하기로 했다. 창고에 두었던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섰더니,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들녘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


가느다란 소로 길로 접어들자 벌써 들판에 가을이 오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실하게 자란 고추가 붉은 열매를 달고 으스대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고추는 쑥스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고 새벽이슬을 맞고 있다. 기나긴 장마에 진절머리를 내던 고추는 나도 모르는 병마에 시달리고, 힘들게 맺은 열매마저 성치 못해 이내 올 해는 할 일을 하지 못해 미안해한다. 어느 날 햇살이 찾아와 남은 기운 다 쏟아 일어서려 해도, 어느새 다시 찾은 장맛비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름시름 앓던 고춧대는 더 이상 버틸 힘마저 소진해지고, 이내 농부의 보살핌을 외면하고 말았다.

IMG_E7390[1].JPG 평화로운 시골의 아침

실하게 자란 고추는 아직도 할 일이 남아있는 듯이 싱그러움을 자랑하고, 멀리서 부지런한 밭주인 부부가 고추에 소독을 하고 있다. 이제 소독을 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키울 수 없는 세월, 열무 한 포기도 그냥 먹을 수는 없다. 텃밭에 뿌려 놓은 열무는 싹이 나오면서부터 무엇이 갉아먹는지 앙상한 줄기만이 남아 있다. 커다란 소독약 통을 경운기에 실어 놓고 경운기가 열심히 약을 뿜어낸다. 남편이 약을 열심히 뿌리는 대신, 아내는 약이 나오는 줄이 고춧대를 다치게 할까 봐, 남편이 약을 뿌리는데 힘이 들까 봐 안간힘을 다하면 줄을 보살핀다. 골마다 뿌리는 뿌연 물안개는 붉어가는 고추에 앉아 농부의 거룩한 땀방울을 지켜낼 것이리라. 이렇게 하여 고추를 얻어야만 자식들의 학비로 쓰이고, 시골에서 가용 돈으로 쓰임에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부부는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도 그 일을 멈출 수가 없다.


봄부터 여름까지 농부의 땀에 보답을 다한 옥수숫대는 어느새 가을 옷으로 갈아입었고, 아직 소임을 덜한 옥수수는 뻘쭘하니 서서 햇살을 기다리고 있다. 햇살을 맞으며 아직 덜 영근 알갱이를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너그러운 농부는 가을 옷으로 갈아입은 옥수숫대는 베어서 가지런히 뉘어 놓았고, 아직 덜 익은 옥수수가 익기를 바라며 멀찍이 서서 기다리고 있다. 봄에 싹을 틔워 여름 비에 시달린 옥수수는 따가운 햇살에 익고, 불어오는 바람에 영글어 구수하고도 당찬 맛을 선사했다. 초여름에 개꼬리가 나온 후, 그 아래에 하얀 암꽃이 꽃을 피워내니 수줍은 수꽃이 바람을 타고 암꽃에 내려앉으면 작은 옥수수는 열매를 맺는다. 옥수수가 익으면 길가에 앉아 오는 손님을 기다리기도 하고, 간간히 심심한 입을 즐겁게 달래주는 우리들의 멋진 간식거리가 되기도 한다.

IMG_E7377[1].JPG 고추가 자기 몫을 했다.

밭둑 아래엔 아직도 장마가 할퀴고 같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제방에 무너져 아직도 상처가 깊이 남아있기도 하고, 여기저기에 쓰레기 몸살을 앓고 있다. 간신히 삶의 터전을 잡은 갈대는 언제 장마가 왔으냐는 둥 밝은 햇살에 반해 싱글거리지만, 줄기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 닭의 장 풀은 기어이 살아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장맛비에 쓸려 난 고마니 풀은 멈춘 비가 고마운지 꽃을 피우고 자리했다. 물가엔 무심한듯한 오리 가족이 소풍을 나왔다. 어미 오리가 새끼오리를 데리고 물썰매를 타고 있다.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고, 다시 내려갔다 올라오기를 반복하는데, 멀찍이서 한쌍의 두루미가 부러운 듯 오리 가족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도 많은 새들이 찾아오는 냇물은 아직도 싱그러운 소리를 내며 장마의 흔적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길가의 들깨가 무럭무럭 자라 가을을 준비하고 있으며, 언덕에 아스라이 매달린 호박 줄기엔 싱싱하고도 명랑한 꽃을 피워 환하게 웃고 있다. 한치의 땅도 헛되게 놔두지 않는 농부의 알뜰함이 묻어나는 깨밭이고, 호박 줄기이다. 커다란 제방의 남은 땅을 일구어 들깨를 꽂아 놓았고, 군데군데 구덩이엔 호박씨를 묻어 놓았었다. 큰 일에 바빠 농부의 일손이 가지 못했어도 들깨와 호박은 보란 듯이 키를 키우고 열매를 맺었다. 논자락엔 벼이삭이 나와 고개를 숙인 것도 있고, 씩씩하게 이삭을 달고 있는 벼이삭에도 서서히 가을 색이 밀려오고 있다. 하늘 높이 자란 붉은 수수가 내려쬐는 햇살을 받으며 밝게 빛나고 있다. 밀려오는 가을바람에 몸을 맡기고, 저 멀리 흘러가는 파란 구름에 넋을 잃었다. 그 사에 언제 왔는지 빨간 고추잠자리가 맴을 돌고, 한이 맺힌 듯 여름 매미가 목청을 높인다. 어느 매미는 처절한 목소리로 님을 찾고, 어느 매미는 구수한 목소리로 오는 가을을 노래한다. 이렇게 풍성한 가을이 오는 사이 시골살이엔 또 고민이 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고민 덩어리이다.

IMG_E7397[1].JPG 오리 가족이 마실을 나왔다.

살아감이 수월해진 시골 동네엔, 언제 부터인지 찾아오는 수많은 동물들이 사람의 삶을 같이 나누자며 추근대기 시작했다. 텃밭에 열무가 그렇고, 배추가 그러하며 모든 과일이 그렇다. 밭 둘레에는 그들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미안한 망이 처져야 했고, 자그마한 수수에도 망을 씌워야 했다. 고구마밭이 남아 있지를 않았고, 채소밭이 성치 않았으니 동물이 먹고 남은 것을 사람이 먹어야 하는 시절이 됐음은 어떤 의미일까? 농부의 처절한 몸부림은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모든 채소밭에 울타리를 쳐야 하고, 과일나무에도 새가 찾지 못하도록 새 그물로 막아야 하는 시절이 되었다. 그래도 인자한 농부는 화내지 않고 오늘도 세심한 붓질로 커다란 밭에 푸름을 심어 놓았다. 그래서 그들도 즐거운 삶을 영위하지만, 농부도 어느 때는 불편한 마음 다스릴 수가 없다.


농부의 부지런함은 가을로 들어서는 가을배추를 심고, 무를 심어 어느새 파란 캔버스가 그득해졌다. 점점이 뿌려 놓았던 푸름이 어느새 그득한 밭고랑이 되었음은 농부 예술가의 아름다운 몸짓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여기에 햇살이 찾아오고 아침저녁으로 이슬이 맺혀 푸름은 어느새 익어 검푸름으로 변해있었다. 배추가 자라고, 무가 튼실해져 온 밭이 가득해지면 이 가을도 서서히 겨울 자리를 비워주며 내년을 준비하리라. 그 가을을 위해 농부는 검푸른 억새가 나풀대는 개울가의 물을 길어 푸름에 살을 찌우려 오늘도 새벽잠을 털고 일어났다.

IMG_E7386[1].JPG 아침 자전거길은 참, 좋다.

가을 들녘이 완전히 황금 갈색으로 뿌려지면, 개울을 찾던 오리가족도 자취를 감추고 이를 부러워하던 두루미도 따스함을 찾아 떠날 것이리라. 그러면 농부는 배추와 무를 뽑고, 여름내 거둔 고춧가루를 빻아 김장을 해야 한다. 큰 제방에 익어가는 깨를 털어야 하고, 숲 속에 숨어 익은 호박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일 년의 양념이 되고 겨우내 호박범벅을 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널따란 들녘에 벼 수확이 거의 끝날 무렵, 텃밭에 심은 배추를 뽑아 절여야 하고, 울 밑에 자란 골파와 갓을 뽑아 씻어야 한다. 저녁에 잘 생긴 무를 썰고, 갓을 잘게 썰어 각종 양념과 섞어 놓는다. 새벽에 씻어낸 배추를 버무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엄마표'김장을 할 것이다. 올 겨울 김장이 끝나면 내년에 먹을 것은 뒤 울에 묻어 놓으면 봄철에 맛깔난 시골 김치를 먹을 수 있다. 김치 냉장고에 보관한 김치보다 훨씬 맛있는 김치를 이웃집도 좀 주고, 아들네도 주면 대단한 김치가 되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딸이 사준 김치 냉장고에 넣어 두고, 가끔 찾아오는 아들과 딸의 빈차를 가득 채워주면 고단했던 시간은 사그라들며 부모 마음은 든든하리라. 여기에 양념에 요긴한 들기름을, 붉게 익은 호박 덩이까지 실어주면 허전했던 마음까지 가득히 행복할 테니 이 가을은, 그렇게 익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