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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Sep 14. 2021

밤의 계절이 또 돌아왔다.

(시골살이의 재미, 가을의 꽃 코스모스)

밤의 계절이 돌아왔다. 초봄에 푸릇한 새싹이 나오던 밤나무, 여름 들어 검푸른 잎으로 나타났다. 검푸름이 바람에 젖어 한없이 평화스러움을 주던 계절, 서서히 여름이 익어갔다. 그리고 하얀 밤꽃이 피기 시작했다. 여심을 자극한다는 밤나무 꽃, 앞 산을 하얗게 물들였었다. 갑자기 여름이 주춤거리더니 가을바람이 불었다. 여름 자리에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푸름을 과시하던 밤나무, 어느새 밤송이가 입을 쫘악 벌리고 알밤을 쏟아내고 있다. 아침나절 앞산에 올랐다.


뜰 앞에 있는 작은 도랑 위,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코 앞이 앞산이다. 산에는 낙엽송이 주를 이루지만 곳곳에 다양한 나무들이 들어서 있다. 벚나무가 있고, 야광나무도 있으며 곳곳에 오리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아카시 나무도 빼놓을 수 없다. 나무마다 계절을 따라 멋진 맛을 주는 앞산이다. 나무 중에서 백미는 역시 밤나무다. 꽃과 알밤을 주며 오래 전의 추억을 건드려 주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앞 산에 안개가 왔다.

붉은 알밤을 쏟아내는 계절이 온 곳이다. 오래 전의 추억이 가득 담긴 밤이다. 소풍이면 단골로 등장하던 찐 밤이었고, 운동회에도 빠질 수 없는 품목이었다. 지금은 많은 먹거리로 그 위치를 잃었지만 먹거리가 부족하던 시절엔 소중한 먹거리 노릇을 했던 밤이다. 가을이면 밤나무 밑이 반질반질하도록 발걸음이 잦았다. 새벽부터 알밤을 주으러 선두 다툼을 벌였다. 중요한 주전부리 감으로 비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추석이나 설이 되어야 얻어 입는 새 옷, 거기엔 커다랗고도 많은 주머니가 있어야 했다. 위 옷에도 주머니가 있어야 했고, 바지에는 앞으로 두 개에 뒤로도 두 개 있어야 제격이었다. 주머니가 많아야 딱지도 넣고, 구슬도 넣어야 했으며 제일 중요한 알밤도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 윗 주머니가 언제나 볼록하게 나와 있어야 든든했고 또 뿌듯했었다. 어제나 흐뭇하게 해 주던 주머니엔 또 있어야 할 것이 있었다. 언제나 작은 주머니 칼이 있어야 했다. 주머니마다 알밤을 주워 넣어야 했고, 밤을 까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칼이 없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입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해오던 간편한 방법이었다. 앞니로 겉껍질을 벗겨 훅 뱉어 낸다. 다시 앞니를 이용해 속껍질을 득득 벗겨 뱉어 내면 해결된다. 밤에는 속껍질이 드문드문 묻어 있지만 문제 될 것이 없다. 조금 남아있는 속껍질로 씁쓸함에 떫은맛을 주지만 그쯤이야 문제 될 것이 없다. 밤에서 나오는 고소함이 입안으로 가득 퍼지는 때문이다. 잊을 수가 없는 고소한 맛이었다. 

메밀묵과 찹쌀떡 그리고 군밤이 떠 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허름한 불빛 아래 어둑한 골목을 지켜주던 리어카가 생각나고, 붉은빛 연탄불이 생각나게 하던 군밤이었다. 탁탁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던 밤 껍데기가 그리워지고, 두툼한 털모자로 무장한 군밤 파는 아저씨가 생각나는 군밤이었다. 허름한 신문지에 둘둘 말아 주던 군밤, 외면할 수 없는 추억의 맛이다.


세월이 변해 밤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추억이 있는 사람들에겐 주전부리 감이지만 젊은 세대들에겐 관심 밖의 먹거리가 되고 말았다. 가끔 찾아오는 아이들도 관심이 별로 없다. 알밤을 깎아 놓아야 먹는 정도이고 삶아 놓아도 시큰둥하다. 연탄불보다는 에어프라이를 먼저 생각하고, 알밤보다는 피자와 통닭을 먼저 생각하는 시절이 되었다. 귀한 먹거리가 뒷전으로 물러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알밤을 그리워하고 찾아주는 지원군이 있다.

거기엔 나무다리가 있다.

아련한 추억을 간직한 세대가 있어 밤을 줍고 파는 곳이 있다. 찹쌀떡과 더불어 겨울밤을 훈훈하게 해 주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세대들이다. 허름한 창문 너무에서 들러오던 소리가 그립다. 입 주변이 시커멓도록 밤 껍데기를 뱉어내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운동회날 먹던 찐 밤이 그립고, 소풍날 먹던 밤이 기억되는 것이다. 아직도 여행지 곳곳에는 군밤이 있고, 밤막걸리가 멋진 맛으로 버티고 있다. 재래시장에선 할머니들의 주 종목이 되기도 한다. 추억의 그리움을 소환해주는 맛과 멋이 있는 밤이다.


아침에 도랑을 건너 앞산으로 올랐다. 밤나무 밑에 붉은 밤이 떨어졌다. 제법 커다란 밤이 수북하다. 곳곳엔 산짐승이 먹다 남은 밤 조각들이 널려있다. 다람쥐와 산 짐승의 먹이려니 하는 생각에 미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곳곳에 있는 밤이 너무 많아 위안을 삼으며 밤을 줍는다. 밤을 모아 놓으면 반기는 사람이 있을까? 오래전엔 어머님이 좋아하셨지만 그것도 그리움이 되고 말았다. 주머니가 볼록하도록 밤을 주워오면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모습, 아직도 눈에 선한 그리움이다. 이제는 어머니 대신 아내가 좋아한다. 붉게 물든 밤을 좋아해 다행이다. 오늘도 주머니가 볼록하도록 알밤을 주워 도랑 위 외나무다리를 건너오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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