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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주는 철 나들이는 비켜갈 수 없다.

(봄 나들이의 추억)

by 바람마냥

계절마다 삶을 불러낸다.

계절은 어김없는 봄이 되어 싱숭생숭하다. 인생에서 가장 슬프다는 말, '그때 그걸 해 볼걸!'이라는 기억을 떠 올려 본다. 지금 아니면 평생 할 수 없다는 철학 아닌 신념과 인생에서 가장 슬프다는 말을 기억하며 차를 몰고 나섰다. 계절마다 가는 곳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봄이 왔으니 연례행사를 하고 싶어서다. 계절 따라 어느 곳이 좋을까? 고희의 세월은 나름의 계절별 여행지를 만들어 냈다. 팔다리가 성할 때가 아닌 가슴이 뛸 때 가고 싶어서다. 세월이 만들어 준 계절별 여행지, 눈을 감아도 갈 수 있는 곳이다.


봄의 합창이 시작되었다.

봄이 왔다. 바람이 알려준 소식이다. 얼른 차를 몰고 나서는 길은 서해안 길이다. 아기자기한 서해안의 야트막한 바닷길, 거기엔 구수한 아낙들의 사투리와 맛깔난 먹거리가 있어서다. 언제나 기억나는 곳은 봄철의 간자미요 새조개에 주꾸미가 떠오르는 곳이다. 홍성의 남당항도 좋고, 왜목마을 가는 길의 장고항이나 성구미가 좋았었다. 조금 더 수고로움을 더한다면 마량포구나 홍원항도 멋스러움이 있는 곳이다. 간자미에 꽃게와 가을 전어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거제의 멸치 쌈밥도 잊을 수 없다. 갓 잡아 올린 멸치를 양념에 무쳐낸다.


하얀 쌀밥에 올려 푸짐한 한쌈을 욱여넣으면 남도의 맛과 향이 입안으로 들어온다. 갖가지 양념에 푸성귀와 어우러진 남도의 멸치 쌈밥,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봄 맛이다. 붉은 동백이 그리우면 선운사를 찾는다. 선운사 뒤뜰에 핀 동백, 나무에도 열렸고 땅에도 피었다. 눈이 머물 수 없는 붉음에 눈이 멀면 풍천장어를 찾아야 한다. 전국에 걸려있는 풍천장어와는 다른 맛에 서해의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어 좋다. 4월 초면 고창 청보리밭도 일품이다. 여름이 왔다. 더위에 시달린 몸을 어떻게 추스를까?


여름은 더 풍성하다.

호반의 도시 춘천이다. 춘천에서 속초를 거쳐 태백이나 정선 나들이는 후회한 적이 없다. 소양호를 가기 전에 닭갈비 맛을 보고, 감자를 떠오르게 하는 빵가게 그리고 속초를 향하는 길이 아름다워서다. 이런 길을 외면하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속초에서는 중앙시장을 비켜 갈 수 없다. 젊은이들 물결에 밀려 신선한 회를 주문하고 숙소로 향하는 설레는 밤길이다. 숙소에 펼쳐진 회 한 접시에 소주가 곁들여졌다. 아내와 함께 하루를 묵으며 온천까지 즐기는 속초 여행, 아바이 마을의 그리움과 이마트 뒤편의 진미막국수가 기다린다. 와, 이런 맛에 젊은이들도 줄을 서는구나!


태백으로 향하는 길은 길가에서 만난 닭국수가 생각 나서다. 멋스러움과 맛깔난 맛에 운전을 멈출 수가 없다. 맛과 양에 기가 죽고, 부른 배를 잡고 나오는 길은 언제나 뿌듯하다. 정선에는 푸름과 뿌듯함이 있다. 설악이 길러낸 나물이 시장에 가득해서다. 할머니의 한주먹 인심이 흐뭇해 찾아가지만, 언젠가부터 시골스러움이 감춰진 도시화된 시장에 멈칫거린다. 혹시나 하며 찾아 가지만, 도시화 물결이 왜인지 시골 시장은 어설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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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알밤이 가을을 알려준다.

가을이 왔다. 알밤 떨어지는 소리가 알려준 계절이다. 어김없이 부석사를 찾는다. 절집 오르는 양옆 붉은 사과가 그립고, 노란 은행잎이 불러서다. 절집에서 바라보는 태백준령은 후회가 없는 여행길이다. 바다 내음이 좋은 안면도엔 소나무 숲 속 대하가 생각나고 꽃게가 떠오른다. 지나는 길엔 무학대사가 생각나는 간월암이 있다. 간월암의 단순함과 짭짤한 어리굴젓이 생각 나서다. 하얀 쌀밥에 얹힌 어리굴젓 한 젓가락, 가을이면 기억나는 그림이다. 허리 굽은 할머니의 삶이 담긴 어리굴젓에 비벼 먹는 비빔밥이 그리운 간월도, 붉은빛이 감도는 꽃게탕이 가득한 안면도가 기억나는 계절이다. 가을 하면 마곡사도 있지 않던가?


화려한 마곡의 가을 단풍을 어찌 외면할까? 도랑에 뿌려주는 가을 단풍과 어우러지는 밤 막걸리 한 잔이면 지는 햇살마저 잊고 만다. 절집에 절을 하며 보내는 가을 한 나절, 골짜기 가을 하늘은 유난히 파랑이다. 돌아오는 길에 만나는 세종시 영평사의 구절초도 잊을 수 없다. 하양이 만들어내는 풍경, 구절초가 있고 하얀 달이 어우러지는 그림이다. 어떻게 이런 풍경을 상상이나 했을까? 자그마한 절집을 에워싸고 피는 하얀 구절초가 주는 그리움과 호젓함에 눈을 감고 만다.


하얀 눈도 맛을 거역할 수 없다.

겨울은 발길은 남도를 향하게 한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은 율포 해수탕과 태백산맥의 고향 벌교의 꼬막이다. 고슬고슬한 쌀밥에 맛깔난 꼬막정식, 언제나 입맛을 서두르게 한다. 여기에 이름도 생소한 짱뚱어탕 한 그릇이면 만사가 귀찮아지는 맛이다. 여수의 향일암으로 발길을 잡는다. 윤슬이 반짝거리는 남해바다의 향일암이 떠오른다. 언젠가 불길로 가슴이 아팠지만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도 좋고, 갓김치가 주는 남도의 맛은 얼떨떨하다. 야, 이런 맛을 안겨주는구나! 절집이 주는 품위와 맛을 찾아 떠나는 봄날의 나들이 장소다.


맛을 거론하며 전주이고 전주 하면 비빔밥이다. 어디를 논하든지 20여 년의 단골집인 가족회관을 피할 수 없다. 유난스럽지도 않은 수수한 맛을 보여주는 특유의 비빔밥은 변함이 없다. 깜짝 놀란 풍경이다. 하얀 모시 바지저고리를 입은 어르신, 정갈하게 주문한 비빔밥에 소주를 한 병을 곁들였다. 연거푸 술잔을 기울여 한 병을 비우시고 유유히 일어나시는 어르신, 두고두고 잊지 못할 멋이었다. 가끔은 한잔의 막걸리로 세상을 논할 수 있는 거나한 주막도 좋은 추억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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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나들이는 서글펐다.

계절 따라 찾아가는 여행길, 봄소식에 서해안으로 길을 잡았다. 아름다운 항구 성구미는 거대한 포클레인이 점령한 지 오래되었으니 장고항으로 향하는 길, 삶의 버거움이 내려앉은 항구는 말이 없다. 길가 좌판 사투리가 사라졌고, 간자미와 실치 무침은 흔적도 없다. 불경기 모습인지 인간의 흔적이 없는 것이다. 왜목으로 향하는 길엔 간자미 무침이 기다렸다. 긴 줄을 섰던 여행 차량과 멋스러운 오토바이 행렬도 없다. 줄줄이 들어선 대형카페만 보인다.


왜목마을로 들어서도 한적함은 여전하다. 어렵게 찾아낸 간자미 무침은 오래 전의 맛이 아니었다. 사라진 성구미항구에서 만났던 그 맛, 투박한 아주머니가 설렁설렁 간자미를 썰어냈다. 봄 미나리와 엇 쓸린 오이가 어울리고, 실치 무침은 서비스라 했다. 허리굽은 할머니는 쑥을 팔고, 냉이를 사라 했다. 맛과 멋이 사라진 봄나들이는 봄날의 서글픔이었다. 갑자기 섬진강이 떠올랐다. 지리산이 섬진강을 따라 흐르고 은어와 재첩이 벚꽃을 부르는 화사한 길이다. 서둘러 직선 위에 올라 되돌아오는 길, 거친 세월이 만든 봄 나들이를 지우고 남도의 섬진강을 그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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