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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미술쌤 옐로 Oct 06. 2021

글을 그리면서 그림을 쓴다

07. 어떻게 채울까 고민과 선택의 시간


저수지에 물을 채운다.

바구니에 과일을 채워 넣는다.

화분에 흙을 채운다.

냉장고에 음식을 채워 넣는다.     



가만 보면 담는 대상의 역할에 따라 채워 넣는 대상이 달라진다. 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채운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림의 역할은 무엇이고, 그림이 채워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구도를 잡아 보기 좋게 대상을 배치하고 농담과 원근을 살려 색을 채워 나가는 것만을 의미한다면 오히려 간단해 보인다. 우리는 늘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요에 의해 교육기관에 등록해 강습을 받거나, 각종 자료와 영상을 보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 기회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어서 배움에 대한 의지만 있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처음 시작하는 분들은 가르침에 따라 그림을 채워 나가는 것부터가 출발이기도 하다.  


    

그림은 대상을 재현하는 것만으로 의미하는 게 아니기에 고민스럽다. 이제 시작하는 사람이든, 늘 해오던 사람이든 어떻게 채울까에 관해 많은 고민과 선택을 해야 한다. 스킬이 뛰어나다 해서 피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며, 어쩌면 더 어려워지기도 한다. 화분에 흙을 채우는 것은 식물을 심기 위해서이다. 흙 채운 화분이 그림에 등장한다면 조금 더 생각해 보게 된다. 단순히 화분의 형태나 질감을 잘 표현해 화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과정이 남게 된다. 그림은 보는 사람에게 감상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림 안에 깃든 아름다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형태적인 면만 바라본다면 정확히 표현하는 것에 집착할 필요가 있어 보이지만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는 것에는 정확한 형태만 필요한 것이 아닐 때가 많다. 때론 왜곡된 표현이 감상자에게 잘 전달되기도 한다.    


  

한 장의 그림은 각각의 의미로 기억된다. 물방울 하나가 그저 예뻐서 그릴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희망이, 또 누군가에겐 그리움을 표현하는 대상으로 그려질 수도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물방울 하나가 그저 예뻐 보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눈물로, 누군가에겐 추억으로 비칠 수 있는 것이 그림이다. 작가의 의도가 고스란히 전달되기도 하고, 그 의도 위에 감상자의 감정을 뒤섞이기도 하는 것이 그림이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에 훅하고 들어오는 그림도 있다. 그림이 바뀐 게 아니라 현실의 상황과 감정이 바뀌면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그림이 마치 나를 대변해주듯 위로가 되기도 하고 기쁨이 되기도 하면서 감정이입이 된다. 그런 그림은 가까이에 두고 싶고,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어떻게 그려보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분들과 대화를 한다. 표현하는 방법에 어려움이 있는 것인지 표현하고 싶은 내용이 진짜 없는 것인지 구별이 필요하다.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분은 표현하는 방법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다. 그분들은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해서 모르겠다는 마음을 스스로 극복해 나갈 수 있다.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겠다면 조언을 구하고 연습하고 노력해 나가면 된다. 예시를 보여드리는 것만으로도 극복해 내는 분들을 보며 감탄할 때가 많다. 그런 분들께는 배우게 되는 것도 많아 오히려 도움을 받기도 하고 예상을 뛰어넘는 모습에 희열을 찾아오기도 한다.      



최근에 고불고불한 선에 색 변화만 줘서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해낸 작품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한 번은 내가 소개했던 책을 구해 와서 보여주었다. 절판되어 사기 힘든 책을 중고 사이트마다 검색해 구한 것이다. 절판되었다는 말을 했기에 이렇게까지 구해오실 줄 몰랐다. 당시만 해도 구매에 어려움이 있으면 안 되니까 책 소개를 신중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던 게 사실이다. 작품을 보고 나서야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 이해가 갔다. 그새 완벽한 재탄생이 이루어진 것이다. 본인만의 스타일을 찾아낸 것에 놀랐던 게다.   


   

그 책을 첫 시간에 소개했던 이유는 그림을 너무 어려워하지 말고 가볍게 시작해도 좋다는 뜻을 전달하고 싶어서였다. 선이 매끄럽지 않아도, 색이 어설프게 칠해진 듯해도 좋은 그림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우리 주위엔 아주 많은 그림이 있고, 각각의 그림마다 정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고맙게도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해 준 것도 모자라 그런 특징을 본인만의 스타일로 만들어 간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유쾌하고 상냥한 성격이랑 꼭 맞아 보여서 누가 뭐라 해도 그분과 찰떡궁합으로 보여 뿌듯하기까지 했다. 처음부터 그분의 스타일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역시, 목적이 있는 사람은 모르겠다는 마음을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힘이 있는 게 맞았다.     



반면 목적이 막연한 분은 그림 그리는 방법만 알면 다 해결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늘 공허하다. 갈수록 더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인해 그림을 계속할 의지까지도 약해진다. 어떻게 채울지는 끊임없는 고민과 선택의 시간이다. 흰 종이만 펼치면 어떻게 채울까로 막막할 때가 많다. 이번엔 어떤 주제를 어떤 소재로 어떻게 표현하는 게 좋을지에 대해서 수십 수백 번 갈팡질팡하는 게 그림을 시작하는 첫 번째 걸림돌 같다. 구상하다가 지치는 느낌을 받는다. 표현하고 싶은 내용이 진짜 없는 분보다 표현하는 방법에 어려움이 있는 분께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이유도, 모르겠다는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는 게 자기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채울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선택의 시간을 인내할 줄 알아야 지치는 느낌이 덜하다.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다는 것과 그림을 쉽게 채울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차원으로 생각된다. 나는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다는 말은 해도 그림을 쉽게 채울 수 있다는 말은 해본 적 없다. 도화지의 어느 한 부분이 휑해 다른 소재를 더 채워보자고 한다. 그림 구성이 좋아 잘 채웠다고는 한다. 그러나 쉽게 채울 수 있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잘 표현하는 분을 보면 그림을 잘 채우고 있다고 생각하지, 쉽게 채운다고 생각지 않는다. 내 그림의 역할과 채워야 하는 것이 분명해질 때까지 어떻게 채울까는 언제나 어렵다. 나만 어려운 게 아니라 누구나 어렵다는 사실이 가끔 위안이 되기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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