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는 매우 아름답고 또 귀여운 나라다. 아름다움을 담당하는 건 뉴질랜드 자연 그 자체이고, 귀여움을 담당하는 건 개와 아기들이다. 뉴질랜드는 시선이 닿는 곳마다 훌륭한 대자연이 펼쳐져있고 그것과 찰떡같이 잘 어울리는 개와 아기들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아름다운 것과 귀여운 것, 둘 다 사랑하는 나는 뉴질랜드의 길고 음산한 겨울을 이것들로 위로 삼으며 보내고 있다. 저처럼 아름다움과 귀여운 것을 사랑하는 분들은,
Welcome to NewZealand!
지난번에 행복한 개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엔 사랑스러운 아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정확하게는 놀이터 이야기다. 나는 지금 Devonport Library에서 글을 쓰고 있고 내가 앉아있는 좌석 앞쪽으로는 넓은 놀이터가 있다. 3-4살 정도의 어린아이들은 하루 종일 놀이터의 주인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주인의 자격으로 그곳을 구석구석 자유롭게 만끽한다. 아이들의 부모는 곁에서 그들을 주시하고 있지만 아이들의 탐험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세상을 만들고 탐험하며 조금씩 세상을 넓힌다.
어느 날, 돌 정도 되어 보이는, 아니 어쩌면 10개월쯤 됐을만한 아기가 놀이터의 작은 언덕을 기어 올라가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언덕엔 클라이밍 할 수 있게 군데군데 발판이 박혀있었다. 내가 봤을 때 그 언덕은 그리 완만하지 않았다. 나는 꽤 가팔라 보이는 언덕을 오르는 아기를 보자마자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아기의 엄마는 언덕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녀는 아기를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직 다리 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아기는 한발, 한 손, 휘청 휘청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기가 발을 잘못 딛고 뒤로 넘어질까 봐 나는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 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그 아기는 나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불안한 걸음으로 결국 언덕의 정상에 올랐다. 무심한 듯 지켜보던 엄마는 아기에게 환호를 보냈다.
아기는 정상을 정복했다. 더 이상 오를 곳은 없다. 휴, 이제 엄마가 아기를 안아 땅으로 내려줄 차례다. 하지만 아기 엄마는 아기를 안지 않았고 아기도 엄마를 찾지 않았다. 아기는 다시 두 손과 두 발로 언덕을 딛고 한발, 한 손을 반복하며 반대쪽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단지 입을 벌린 채, 언제라도 아기가 떨어질 것 같은 상황이 오면 바로 뛰어갈 수 있는 자세로 아기가 땅에 무사히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아기는 무사히 땅에 내려왔다. 그다음은 어땠는지 상상이 되는가?
아기는 다시 언덕을 올랐다. 이럴 수가.
뉴질랜드의 놀이터는 한국의 놀이터보다 조금 더 모험심을 요구한다. 외나무다리, 흔들 다리, 그물 사다리, 그물 계단, 외줄, 그 외줄을 타고 오른 정상은 어른이라도 조금 무서울 정도의 높이다. 아이들은 이 높이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향한다.
그네의 종류도 다양한데 누워서 타거나 2,3명이 함께 타는 넓은 그물 그네가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평범한 그네, 그리고 아기들이 탈 수 있는 바구니 그네가 있다. 아기들의 그네는 보행기 의자처럼 다리를 끼울 수 있는 모양으로 되어있는데, 아직 손과 허리 힘이 발달하지 않은 아기를 태울 수 있다. 나는 몇 개월 되지 않아 보이는 아기를 그네에 태우고 밀어주는 아빠를 본 적이 있다. 아기가 그네를 타는 모습을 아마 처음 본 것 같다. 여기는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를 위한 공간이다.
그 외에 휠체어가 탈 수 있는 시소도 있고, 누군가가 밀어줘야 앞으로 가는 기차도 있다. 처음엔 기차를 스스로 밀어야 하는 놀이 시설이 불편하다고 느꼈다. 자동으로 움직이게 만들면 부모도 편하고 아이들도 더 즐겁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놀이터에 갈 때마다 기차를 끙끙대며 미는 부모나 아이들을 본다. 모두 힘들게 밀지만, 왜인지 타는 사람도 미는 사람도 모두 웃고 있다. 다음엔 기차를 밀던 아이가 타고 기차를 타고 있던 아이가 친구를 위해 밀어준다. 그들은 서로를 배려하는 방법을 놀면서 배우고 있다.
뉴질랜드는 대체적으로 공원이 무척 넓은데 놀이터도 마찬가지다. 놀이터 옆 잔디 공터는 기본으로 붙어있다. 우리나라 놀이터 바닥처럼 말랑 말랑한 재질이고 그 옆은 나무 톱밥이 깔려있다. 나무 톱밥 옆은 그냥 흙바닥이다. 아이들은 흙 위에서 뛰어다니고 점프하고 눕고 걷는다. 맨 발에 흙을 잔뜩 묻힌다. 놀이터에서 노는 상당수의 아이들은 맨발이다. 뉴질랜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마트에서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을 보고 놀란적이 있다. 심지어 아빠도 맨발이다. 뉴질랜드에서는 맨발로 다니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 바꿔 말하면 맨발로 다닐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흙을 밟고, 모래를 밟고, 잔디를 밟고 아이들은 자란다. 서울에서 맨발로 길을 다닐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당연한 얘기다. 맨발은 자연 속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자연과 자연이 만나 자연스러움을 만들어낸다. 나는 그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흙을 밟고 나무를 오르며 풀 위에 누워 쉬는 모습을 보며 삶 속에 녹아있는 여유를 느낀다. 이건 다르게 말하면 행복이다. 이제는 맨발로 다니는 아이, 어른을 만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우리 아이들도 바다에 갔다가 집에 가는 길엔 항상 맨발이다. 바다에서 모래를 밟고, 잔디를 지나 시멘트 바닥을 밟고 집에 도착하는 여정 중에 어색함은 없다. 자연스러운 일상이라서 좋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느끼지 않아서도 좋다. 뉴질랜드는 내가 나로 살 수 있는 나라인 건 틀림없다.
아기들과 개는 이곳에서 가장 행복한 생명체이다. 지금도 내 앞의 놀이터에서 밝은 웃음을 지으며 그물 사다리를 오르는 아기와 꼬리를 흔들며 잔디 위를 뛰고 있는 푸들이 보인다. 그들 덕에 뉴질랜드가 더 행복해 보이는 것 같다. 아침엔 비가 한 바가지 내리더니 지금은 해가 쨍하다. 얼굴을 내민 해처럼 아이들도 하나 둘 놀이터에 얼굴을 보인다. 밧줄 하나에 매달려 한참을 놀다가는 아이들이 보인다. 그동안 뉴질랜드는 심심한 나라라고 말했었는데, 어쩌면 내가 자극에 너무 익숙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자극이 없고 심심하기 때문에 더 깊게 즐길 수 있다. 짜릿한 엔도르핀이 솟구치는 기쁨보다 공 하나로 즐거울 수 있는 이곳의 여유가 좋다. 나는 한국에서 잔잔한 행복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서울은 매일 바쁘고 가만히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없는 도시였다. 그동안 책에서만 봤던 작고 잔잔한 행복이 뭔지 나는 뉴질랜드에 와서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뉴질랜드는 놀이터에 진심을 담는다. 항상 시설을 깨끗하고 안전하게 관리한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시설도 있지만 나무를 이용한 놀이 시설이 많다. 그리고 놀이터엔 공공 화장실이 꼭 있다. 넓은 운동장 옆에도 공공 화장실이 있다. 화장실 때문에 놀이의 흐름이 끊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놀이터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여러 가지를 겪으며 꿈을 품는 곳이다. 모험심을 기르고 어려운 도전을 성공하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놀이터의 주인으로서 일정 시간을 보내면서 자란 아이들의 모험심과 도전정신은 분명히 커질 것이다. 청소년 시기엔 체육 활동이나 운동을 잘하는 아이들이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고 한다. 다양한 삶을 꿈꾸고 계획하며 자라는 이곳의 아이들이 보기 좋다. 아마 그들은 놀이터의 주인이었을 때 좀 더 스릴 있는 도전을 즐겼을 것이다. 뉴질랜드에 아이들이 어렸을 때 왔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 아이들은 이미 커버려서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귀여운 아기들을 보며 흐뭇해하는 나이가 됐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잔잔함 속에서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