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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곰 Jun 05. 2024

어쩔 수 없이, 잠시 멈췄다. 그래도 괜찮다.

'뉴질랜드는 어떤 커다란 막에 감싸져 있어 다른 세상과 시간의 속도가 다른 게 아닐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나라. 그런데 생각해 보니 '각 나라마다 시간의 흐름이 모두 다른 게 당연하지 않나?'라는 결론에 닿았다. 내가 사는 뉴질랜드는 한국보다 삶의 속도가 느리다.


뉴질랜드는 느리다. 아니면 한국이 빠른가?


느릴 것이라고 예상했고 내 예상이 맞았다. 그래서 불편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게 웬걸,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각오한 것보다 빨라서 놀랐다. 한국 운전면허증을 뉴질랜드 운전면허증으로 바꿀 때 임시 면허증을 발급해 주면서 2주 안에 면허증이 발송될 것이라고 안내받았다. 운전면허증은 3일 정도 지난 후에 우편으로 도착했다. 전구를 인터넷 배송 주문을 했다. 한국처럼 다음날 배송이 왔다. 다음번에 시킨 물건은 4일 후에 도착하고, 어떤 건 2일 후에 도착했다. 마트에서 물건을 배송 주문했다. 배송 슬롯이 다 차지 않았다면 당일 배송도 문제없다. 다만 이건 나의 삶의 반경에 제한된 결과이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한국의 빠른 일처리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그런데 조바심을 내봤자 나만 손해 아닌가. 나는 느긋하게 여유를 가져보기로 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아야 한다. 의외로 나는 어렵지 않게 이 속도에 적응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한국이 너무 빠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껏 빠른 게 편리하고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느린 것은 답답했고, 빠른 결론은 명확했다. 아마 그래서 나는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나 보다. 늘 뭔가에 쫓기는 삶을 살았다. 나를 쫓아온다고 생각한 것의 실체는 없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이 나를 만족시키지는 않았다. 나는 어쩌면 스스로 나를 쫓았는지도 모르겠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나만의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했다. 다 이렇게 산다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나 자신을 채근했다. 쉬고 있지만 쉬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항상 바빴고 그에 비해 막상 손에 쥔 것은 별로 없었다. 


천천히 길 따라  일단 걷자

유튜브에서 외국인들이 한국의 식당 테이블마다 있는 호출벨을 보고 신기해하며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호출벨은 주문을 할 준비가 된 손님과 종업원과의 간결하고 깔끔한 소통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뉴질랜드엔 호출벨이 없다. 손님이 오면 자리로 안내한 뒤 메뉴를 주고 자리를 떠난다. 얼마 후에 손님에게 주문할 준비가 되었냐고 묻고 준비가 안 됐다면 조금 후 다시 찾아온다. 메뉴 선택이 끝났지만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는다면 기다려야 한다. 언젠간 나에게 주문을 받으러 올 것이다. 뭐랄까, 어느 순간 나는 이것이 불편한 시스템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불편함 때문에 상대와 대화를 나누게 되고 인간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느꼈다. 식사하는 중간에 몇 번씩 찾아와 음식은 괜찮은지, 불편한 건 없는지, 더 필요한 건 없는지 묻는다. 한국에서는 내가 불편하거나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벨을 누르면 된다. 상대의 얼굴을 보고 웃을 일도, 오늘 날씨에 대해 대화를 나눌 일도 없다. 빠르고 간결한 일처리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리 만무하며 불필요한 대화는 줄어든다. 각자 주어진 역할만 충실하게 해낸다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나쁜 일도, 좋은 일도, 말 그대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일 처리만 두고 봤을 땐 호출벨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공간이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그 장소가 친절과 감사로 가득 찬다면 나는 그것이 더 마음에 든다고 말할 것이다. 


어느 것이 더 나은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누구는 바쁜 회사원인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냐고 되물을지도 모른다. 그저 내 인생의 여정 중, 걸음을 잠시 멈춘 김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처음엔 멈춘 내가 불안했다. 계속 걸어야 하는데 멈춰져 있는 내가 뒤쳐진다고 느껴졌다. 어느 방향이든 가보려고 애도 썼다. 하지만 계속된 방황 속에서 나는 그저 고요하게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서 그전에 보이지 않았던 여러 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느림은 내가 발견한 것들 중 한 가지다. 


잠깐 쉬었다 가도 괜찮지


뉴질랜드의 느림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버스다. 버스 기사는 서두르지 않는다. 노인이나 휠체어나 유모차가 버스를 이용할 때는 더욱 그렇다. 뉴질랜드 버스는 계단이 없다. 버스 앞쪽은 노약자석과 휠체어 공간이 있다. 버스는 승객이 모두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린다. 어느 날 승객이 모두 탔는데 출발하지 않는 버스를 무슨 문제가 생겼나? 하고 생각했다. 버스카드를 찾느라 어지러워진 가방을 정리 중인 나이 든 승객이 자리에 앉자 버스는 출발했다. 버스 기사도, 가방을 정리하는 승객도 아무렇지 않다. 나라면 가방을 정리하지 못한 채 일단 의자에 앉았을 것이다. 나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었을 테니까. 우리나라는 다른 사람들이 나의 헝클어진 가방을 정리하는 동안 버스가 출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피해'라는 범주를 다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질랜드 버스에서의 경험은 그들만의 시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확신하게 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혼자 고장 난 시계처럼 빨랐다가 느렸다가를 반복했다.


또 한 가지 사례가 있다. 작년, 면허증을 발급받으러 갔을 때였다. 내 서류를 처리해 주시는 분이 사용하던 볼펜이 어느 순간 나오지 않았다. 그분은 나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구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드디어 나온 그의 손에는 볼펜 심이 쥐어져 있었고 다시 내 앞으로 와 볼펜 뚜껑을 열어 다 쓴 심을 빼고 새 심을 갈아 끼웠다. 그리고 옆에 있던 빈 종이에 새 볼펜심이 잘 나오는지 테스트 한 뒤 서류 작업을 계속 이어갔다. 내 뒤에는 10명 정도 되는 사람이 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무척 여유로웠는데, 나는 등에서 땀이 났다.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혼자서 만든 시선이다. 한국에서 뉴질랜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내 앞에서 일을 처리하는 사람도 서두르지 않았고, 내 뒤에 줄을 선 사람들도 급하게 재촉하지 않았다. 모두가 같은 속도에 맞춰져 있는데 한국에서 온 나만 태엽이 빨리 감기는 느낌이었다. 이 속도가 어색했다. 서류 작업이 모두 끝난 뒤 그는 나에게 보험까지 친절히 설명하면서 기다리는 시간을 늘렸다. 나는 차가 없다고 말하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관공서엔 번호표도 없고, 앉아서 기다릴 수 있는 의자도 없다. 당연한 얘기다. 번호표가 없기 때문에 의자도 있을 필요가 없다. 다들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누구는 힘들고 지칠 만도 한데 아직까지 번호표가 사용되지 않는 걸 보면 아직은 대다수가 이 시스템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작년부터 나도 볼펜심을 교체하며 사용하고 있다. 다 쓴 펜을 버리고 새 펜을 구입하는 것보다 심을 교체하는 쪽이 금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편안하다. 100개의 볼펜 중에서 최고로 좋은 것을 고르기 위해 서로 비교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절약된다. 대신 나머지 99개의 볼펜을 사용해 볼 수 있는 기회도 사라진다. 볼펜을 그저 기능적인 측면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뉴질랜드는 한국보다 조금 느리고 또 심심하다. 


오리와 흑조처럼 둥실둥실 천천히, 물결이 흐르는 대로 힘을 빼고!


일 년 동안 뉴질랜드에 살면서 태엽을 조금씩 느리게 돌리는 연습을 했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진 않았지만 경험을 통해 조금씩 내 속도도 느려졌다. 그들과 속도가 비슷해졌을 때 나는 어딘가 편안함을 느꼈다. 그러면서 조금씩 빈 공간이 생겼다. 무언가에 늘 쫓기면서 살던 마음이 조금씩 사라졌다. 마음이 텅 비어 버렸다. 가끔은 아직도 조급함이 밀려올 때가 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매일매일을 보내버리는 일이 낭비라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천천히 숨을 고른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예전엔 그것을 암흑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넓은 평야라고 생각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함은 똑같지만 눈에 펼쳐진 땅의 끝은 보이니 어디로든 걸으면 되겠지. 걷는 걸 좋아하고 시간도 많으니 일단 걷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느려진 태엽이 다시 빨라질지, 아니면 계속 느린 시간으로 살게 될지는 모르겠다. 내 바람은 한국이 조금 느려지면 좋겠다. 뉴질랜드만큼 심심해야 사람이 보이고 바람도 보이고 구름도 보이고 하늘도 보인다. 그러니 한국이 조금 심심해져도 될 것 같다. 그럼 빠름과 느림의 그 중간 어디쯤에서 딱 균형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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