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과 고요함 사이
바쁘지 않지만 이상하게 바쁜 겨울 어느 날, (대부분의 날들이 이렇게 지나간다.) 카톡이 왔고 나는 한참 후에 메시지를 확인했다. 카카오톡의 모든 알람을 모두 꺼뒀기 때문에 메시지가 온 것도, 더불어 오지 않은 것도 알 수 없다. 한국에서도 소리와 팝업 알람은 껐었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의 개수를 알려주는, 앱 위에 붙는 빨간 동그라미 숫자까지 꺼버렸다. 이제 카카오톡은 내가 먼저 찾지 않는 이상 어떤 신호도 보내지 않는다.
뉴질랜드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생활 정보를 얻거나 궁금한 점이 있을 때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1000여 명이 참여하고 있는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 들어갔었다. 1000명 중 대게 10명 이하의 사람이 대화를 나누지만 하루에 몇백 개의 숫자는 금세 쌓였다. 나는 성격이 급하고 빨간 숫자가 쌓여있는 걸 견디지 못한다. 숫자를 없애야 다시 고요함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메시지를 확인해 숫자를 없애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쌓여 있었다. 숫자가 높을수록 마음은 급해진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대화를 읽지 않고 그저 숫자를 없애는 일을 하고 있었다. 몇백 개의, 나에게 필요한 정보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긴 대화를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하는 게 이상했다. 하루에 몇 번씩 숫자를 없애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을 며칠 하다가 오픈 채팅방에서 나왔다.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 사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방대한 정보에 파묻히고 있었다. 꽤 도움 될만한 정보들도 많았지만 반면에 모르고 살아도 그렇게 손해 볼 것들도 아니었다.
다른 나라에 살다 보면 한국과 다른 시스템과 문화를 배울 시기가 필요하다. 그 나라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은 줄어들겠지만 언어가 원활하지 않다면 막연한 불안함이 늘 마음 한구석에 존재한다. 인생은 언제 어디서 큰 일(작은 일도 타국에서는 큰일이 된다.)이 터질지 모르고 그 일이 터졌을 때의 막막함은 ‘앞이 캄캄해진다’라는 옛말이 딱 맞다. 그래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그 자체는 큰 위안이다. 다만 내가 필요하지 않은 정보들이나, 이미 알고 있거나, 전혀 관심이 없는 정보를 반복적으로(새로운 사람은 늘 유입되기 때문에) 보게 되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결국 그 방을 나오긴 했지만 알람을 끈 결과는 생각보다 좋았다. 일상이 조용함으로 유지되는 것에 안정을 느꼈다. 막연한 불안을 갖고 사는 해외 살이엔 표면적으로라도 고요함이 필요했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12시간이나 걸리는 곳에 살게 된 나를 급하게 찾는 사람은 없다. 대게는 안부였다. 날씨에 대한 이야기나 근황을 묻는다.
“매일 똑같지, 뭐.”
매일 비슷한 하루를 살고 있다는 건 크고 작은 새로운 일이 생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건도 사고도 없는 무난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말은 지루함을 품고 있지만 불안으로부터는 먼 말이다. 안부를 묻는 지인들에게 매일 똑같이 살고 있다는 나의 말을 가볍게 들었을 테지만 나는 늘 지루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바쁘지 않지만 이상하게 바빴던 날 온 카톡은 열쇠로 연을 맺은 분에게서 온 것이었다.
“만두 만들까?
한국에서는 사람을 많이 만나며 살았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약속이 있었고 바쁘면 일주일 내내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혼자였던 적이 없다. 지금까지 혼자 살아본 적도 없고 결혼 후 가족이 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바랄 정도로 복작거리는 삶을 살았다. 그런 데다가 뉴질랜드로 이사 간다는 명목으로 이주하기 전 몇 달은 오직 사람을 만나는 게 내 일정의 전부였다. 그런 이유로 뉴질랜드에 도착해 아는 사람 0명으로 시작한 새로운 세상이 꽤 마음에 들었다. 만날 사람이 없고 약속이 없는 새로운 경험은 처음으로 타인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자유의 시간을 갖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요를 깨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우리 집을 찾아 올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러니 문을 노크할 사람도 없다. (가끔 여호와의 증인이나 알 수 없는 종교의 선교, 기부를 요청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몇 번 내 집 문을 두드렸지만, 더 나중 일이다.) 문 앞엔 동양인 여자 두 명이 서 있었다. 두 분 모두 한국 사람이었는데, 한 분은 우리 앞집에 사는 이웃이었고, 다른 한분은 나에게 열쇠를 건네주러 왔다고 했다. 둘은 우연히 우리 집 앞에서 만났고 인사를 건넬 겸 같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커피 권유를 했지만 두 분 다 일정이 있어 거절을 했고 어색하고 짧은 첫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두 분과는 지금도 가끔 커피를 마신다. 앞 집 분과 나는 가끔 산책을 하며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고충을 나누거나 업무에 관한 대화 등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자신 없는 솜씨지만 가끔 음식을 나누기도 한다. 우리 집 애들은 앞집 이웃이 해주신 음식을 정말 맛있게 먹는다. 부디 앞집 아이들도 내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길 바란다. 일을 하고 계셔서 우리는 주로 주말 데이트를 하는데, 꼭 알아야 할 (쓰레기 수거 방법 변경이나 날짜 등 생활 정보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알려주신다. 수많은 이웃 중 내 앞집에 한국 사람이 산다니, 큰 행운이다.
열쇠를 가져다주신 분은 내가 이사오기 전, 우리 집에 살았던 분과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고 했다. 둘은 아이들이 어릴 때 만나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각별한 사이가 된 것 같다. 우리 집에 살던 분은 아이가 졸업을 하면서 뉴질랜드를 떠났고 부동산에서 제공한 열쇠 말고 개인적으로 복사해 사용했던 여분의 열쇠를 그분에게 부탁해 다음 세입자인 나에게 전해준 것이다. 세심한 마음이 감사했다. 외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괜히 더 반가운, 그런 기분이었겠지. 내가 다른 나라 사람이었다면 굳이 애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분과도 가끔 만나 식사를 한다. 우리는 주로 멋진 풍경이 펼쳐진 곳을 찾아가 걷는다. 뉴질랜드엔 걷기 좋은 길이 사방에 널렸다.
두 분 다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나는 특별히 바쁜 업무나 일정은 없지만, 여전히 모든 시간이 전부 내 것이라는 느낌이 주는 안정감을 방해받지 않는 느낌이라 좋다. 그 시간에 게으름을 피우거나 무료하게 흘려보낸 날이 더 많지만 그것도 나만의 것이라는 게 좋았다.
0에서 2가 됐다.
닉, 그를 빼먹을 수 없지. 닉은 작년 뉴질랜드에서 제일 가깝게 지냈던 이웃이다. 20대의 젊은 아빠였던 그는 내 옆집에 살았는데, 그의 밝은 성격덕에 우리는 가깝게 지냈고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우리 집엔 작은 텃밭 공간이 있었는데, 막연히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동경한 나는, 이 작은 텃밭 농사를 꽤 즐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소박한 농사의 꿈은 뽑아도 뽑아도 다시 자라나는 잡초의 놀라운 생명력 때문에 내려놨다. 친환경 농작물을 생산해 줄 꿈의 장소에서 골칫덩어리로 전락해 방치된 텃밭의 잡초를 베어주었고, 도둑이 자전거를 훔쳐갔을 때도 경찰에 신고해 주겠다며 나를 위로했다. 밖에서 훤히 보이는 창고 유리창이 원인이었을 거라며 창문도 박스를 이용해 모두 막아줬다. 도둑을 잡거나 물건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가 없었다면 난 며칠 동안 잠도 못 잤을 것이다. 가끔 우리 집에 찾아와 큰 애와 기타를 같이 치기도 했고 내가 한국에 갔을 때 택배를 대신 보관해주기도 했다. 여러 가지 그의 장점 중, 내가 가장 사랑했던 건 항상 밝게 인사를 건네는 큰 목소리였다. 항상 밝고 긍정적이었던 그를 만나면 내 불안도 같이 작아졌다. 그는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들어줬고, 알려줬고, 같이 기뻐하고 슬퍼했다.
닉의 둘째가 태어났고 그와 가족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나도 이사를 했다. 닉이 비워 준 그 집으로 말이다. 닉이 이사를 할 예정이던 그때, 나도 살던 집 계약이 끝나는 시기였다. 학교와 가까운 이 동네를 떠나고 싶지 않았는데 그 당시엔 집이 턱없이 부족했다. 코로나가 끝나고 뉴질랜드로 유입되는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던 시기였다. 한 개의 집 렌트 매물에 수십 명이 몰려들었고 직업도 없는 내가 집주인의 선택을 받을 확률은 무척 낮았다. 닉은 내가 그의 집으로 이사 갈 수 있도록 부동산에 나를 추천했다. 두 명의 추천인 중 한 명으로 그의 이름을 올렸고 치열한 경쟁 없이 집을 구했다. 덕분에 나는 지금 그가 살던 집에서 지내고 있다. 아마 나는 그를 평생 기억할 것이다. 기타를 치며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말이다.
닉까지, 0에서 시작해 3이 됐다.
고백하자면, 처음 겪은 고요한 삶은 좋기도 했지만 힘들기도 했다. 갑자기 밀려든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방법을 몰랐다. 처음엔 멍하니 보냈다. 만날 사람도 없고, 작업을 하기엔 재료가 없었다.(재료가 없었던 게 작업을 하지 못했던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이 당시에는 이게 이유라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고 작은 일이나 큰일이 생길 때마다 우울함이 찾아오기도 했다. 남편이 많이 보고 싶은 날도 있고, 친구들과 수다를 한참 떠들고 싶은 날도 있었다. 사람이 그리운 날들이 지날 때마다 우울은 차곡차곡 쌓였다. 점점 말수가 줄었고 신나는 일도 많지 않았다. 만약 내가 영어를 더 잘했으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언어를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일상을 공유할 사람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여태 사람에 둘러싸인 삶을 살다가 처음 혼자가 되고, 어쩌면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혼자의 시간이 많아지는 건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도 같이 많아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작년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일 년을 보내고 두 번째 뉴질랜드 삶을 시작했을 때 글을 쓰기 시작했고(정확하게는 한국에 방학 동안 들어갔을 때였다.) 작업도 시작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계획만 앞서 있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생에 대해 깊이 고민한 적이 없다. 항상 뭔가를 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매일매일 바쁘게 움직였고, 나는 그것이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나는 작업을 통해 타인의 삶에 어떻게 접근할 건지,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한 번도 진지하게, 그리고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건 되게 어이없는 말이지만, 진짜 그랬다. 약속이 생기면 사람을 만나고, 작업에 대해 그럴싸한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고만 고만한 것들로 이룬 것들이었다. 그럭저럭 열심히 인생을 살았고, 어려울 땐 어려워서 여유가 없었고 살만해지니 살만해서 그만큼만 생각했다.
그래서 작년을 꽤 힘들게 보냈다. 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대비한 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실 나는 뉴질랜드의 삶을 준비하지 않았다. 내 장점이자 단점인
‘어떻게든 되겠지.’
가 보기 좋게 실패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다 됐는데, 이번엔 어떻게 안 됐다. 갑작스럽게 진행된, 충분히 준비하지 않은 유학 결정, 가족이 떨어져 사는 것, 영어권 나라에서 영어를 못하면서 발생하는 불편한 점, 날씨, 사회 정서, 운전, 음식 등 뭐 하나도 한국 같지 않았다. 나는 이런 것들도 다 어떻게 잘 될 줄 알았다.(물론, 아예 없지는 않다. 여전히 어떻게든 되는 것들도 있다. 다행히.)
긴 여름방학이 시작된 12월 초, 우리는 한국에 돌아갔다. 한국은 추웠지만 예전만큼 싫지 않았다. 가족은 다시 모였고 나는 또다시 사람을 만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했다. 일 년 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는 많기도 했고, 별로 없기도 했다. 한국의 내 집에서 다시 안정을 찾았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항상 자리 잡고 있었던 불안이 사라졌다.
그때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많았던 뉴질랜드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사람을 만나고, 병원을 다니고, 가족과 여행을 가고, 볼일을 보느라 정신없이 바쁘던 한국에서 나는 비로소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글을 쓰게 한건 외롭고 불안했던 일 년의 시간을 보내고 난 뒤였다. 안정을 느낀 다음에야 나는 나를 글로 풀어냈다. 딱히 올해 계획을 세운건 아니지만, 나는 작업도 시작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작년엔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해내지 못했었던 일이다. 겨울 동안 매일 글을 썼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그냥 아무 이야기를 썼다. 계획이 앞서면 시작을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냥 시작했다. 이번에도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그래서, 정말 바쁜 한국에서의 겨울을 보내고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왔다. 뉴질랜드는 여름이었다.
작년과 달라진 게 꽤 많다. 매일 자발적으로 해야 할 일이,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생겼고 차가 생겼다. 차를 구입하고 제일 많이 바뀐 건 불안이 조금 덜어졌다. 대중교통을 이용했어도 충분한 삶이었지만, 언제든 내가 원할 때, 편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됐다는 건 마음에 안정감을 줬다. 나는 이렇게 점점 마음의 불안을 덜어내고 있다.
뉴질랜드에 도착하고 얼마 후, 한국에서 알고 지내는 작가에게 연락을 받았다. 아는 작가가 뉴질랜드에 갔으니 연락해 보라는 것이다. 책으로만 알고 있던,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그 작가님은 반갑게 연락을 받아줬고 우리는 한국이 아닌 먼 타지에서 처음 만났다. 그 작가님은 아는 분과 아이들을 데리고 뉴질랜드로 왔는데, 이분들도 정착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더랬다.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어서 의지하며 견뎌냈을 것이다. 그들의 우정이 보기 좋았다. 내가 연락했던 작가님은 2달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고, 그분의 친구는 2년 거주 계획이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지인이 한 명 더 생겼다. 그분은 글 작가인데 나와 다르게 뉴질랜드에 와서도 할 일이 잔뜩인, 소위 잘 나가는 분이었다. 그분은 바쁜 걸 싫어했고, 나는 그분의 바쁨이 부러웠다.
조금씩 내 외로움이 덜어지고 있다. 만나는 사람이 벌써 4명으로 늘었다. 내 외로움을 씻어내기엔 4명이면 충분하다. 안 그래도 ‘안 바쁘지만 이상하게 바쁜 뉴질랜드 삶’인데 친구가 많이 생겨 앞으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 같다. 소박한 바람은 뉴질랜드를 떠나기 전, 키위 친구 한 명을 사귀는 것이다. 이미 닉이 있지만 가까이 지낼 친구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벌써 자신이 없다.
내가 대비해도 힘든 일은 있고 대비를 안 해도 얻어지는 것들이 있다. 그러니 너무 불안해하지도, 걱정하지도 말자. 힘들고 슬프게 시간을 보냈더라도 그 시간은 나에게 의미 없이 사라지는 시간이 아니다. 동그라미였다가 세모 모양으로 변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자. 말랑 말랑해지면 어디로든 튀어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자. 겨울이 아직 3달 남았지만 작년만큼 슬프지 않다. 그저 손 시리게 이 시간을 보낼 것이다. 빨리 가길 바라지도 않는다. 손 시림을 통해 외로움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그냥 손이 시리구나. 겨울이구나.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겠구나. 오늘은 따뜻한 우동을 해 먹어야지. 하며 오늘을 보낸다.
0으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4가 된 내 친구들처럼, 애쓰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맛있는 우동을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