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외계인일지도
내 고향 깐따삐아 별에서 수억 광년 떨어진 아오테아로아로 오게 된 건 작년 1월이다. 비행 중 알 수 없는 우주선 결함으로 가까운 행성에 불시착했다. 행성의 이름은 아오테아로아.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우주선이 크게 망가져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수리를 해야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당분간 아오테아로아에서 지내고 있다. 다행인 건 아오테아로아인들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아무도 내가 외계인인걸 모른다.
깐따삐아 별에서 내 직업은 화가였는데, 아오테아로아에선 일을 할 수 없다. 그들의 말을 모르기 때문이다. 외롭고 심심하지만 고장 난 내 우주선을 고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이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 그들의 언어를 배워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언어 체계와 구조, 글자의 모양이나 소리까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다. 다행인 건 내가 가진 컴퓨터 시스템으로 그들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글자로 세상을 읽고 짐작하며 살고 있다. 아오테아로아에는 나 말고도 다른 외계에서 온 동지들이 꽤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떤 이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아오테아로아에 정착한 친구도 있고, 어떤 이는 말 배우기를 포기하고 그들과 소통을 단절하며 살고 있는 친구도 있다. 그는 다만 고요하게 살뿐이다.
*'아오테아로아'는 마오리언어로 뉴질랜드를 뜻한다.
가끔 나는,
고향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지구에 불시착한, 지구인들 틈에 섞여 살고 있는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나는 지구인이 확실하지만, 소통을 못하고 사는 건 사람의 언어를 모르는 외계인이나 영어를 말하지 못하는 나나, 사정은 비슷하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 영어를 배웠다. 영어 성적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한국의 높은 교육 수준 덕에 꽤 많은 단어를 알게 됐고, 독해도 어느 정도 가능했다. 그동안 해외여행을 다니며 영어로 소통했을 때 문제된 적도 없었다. 심지어 괌에선 원주민의 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한 적도 있었고 그때도 별 탈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괌에서 맺은 인연으로 그들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 나는 그들의 가이드가 되어 서울의 여러 곳을 안내했다. 지금은 연락이 끊어지긴 했지만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도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여유로움이 마음속에 있었다. 내 영어는 정말 엉망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서로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딱히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해외에서 살 계획도 없었고 해외 출장이 잦은 직업이거나 영어로 업무를 해야 하는 직업도 아니었다. 내가 영어를 배워야 할 이유는 한 가지도 없었다. 오직 취미 삼아 듀오링고를 오랫동안 했고, 지금생각하면 그거라도 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갑자기 결정된 뉴질랜드 이주로 반년은 마음도 바쁘고 몸도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때도 나는 영어를 치열하게 준비하지 않았다. 집에서 가까운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영어 수업을 뉴질랜드 가기 전 두 달 동안 다닌 게 전부다. 수업은 책 읽기와 문법 공부였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회화만 공부할 것이다. 언어의 첫 번째 목적은 소통인데 입으로 공부하지 않고 눈으로 공부를 했다. 영어를 읽고 이해는 할 수 있는데, 입으로 그 문장을 말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나는 내가 읽고 뜻을 이해한 문장은 당연히 입으로도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나는 정말 간단한 구조의 영어 문장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이건 정말 바보 같았다. 혼자 어떤 상황을 상상하며 대화를 주고받을 땐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었다. 천천히 생각하고 문장을 만들어 입으로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황은 내가 예측하지 못하게 급하게 시작됐고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 섞여 문장 하나도 만들지 못하고 끝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내가 영어를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나는 그들이 나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올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는데 대화가 시작됐을 때가 그렇다.
대게는 스몰 토크가 문제다. 그놈의 스몰 토크!
우리 집 뒤에 달리기 하기에 좋은 멋진 산책로가 있는데, 바다를 옆에 끼고 길게 뻗어있는 길은 사람과 자전거, 개들이 한데 어우러져 산책을 즐기는 곳이다. 혼자 이 길을 자주 가는데 작년엔 많이 달렸고, 올해는 무릎 때문에 걷고 있다. 남편과 통화를 하거나, 머리가 복잡할 때, 생각할 문제가 있을 때, 기분이 좋을 때, 옆구리 살이 늘었을 때, 해가 떴을 때, 석양이 질 때… 내가 그 길을 걷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혼자다. 길을 걷다 보면 마주 오는 사람을 만나기 마련인데, 절반의 키위는 인사를 건넨다. 아침이면 ‘Good morning!’이나 ‘Hello!’, ‘Hi!’다. 아무리 영어를 못해도 인사는 할 수 있지. 나도 상냥한 미소와 함께 그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적절히 친절한 모습으로 예의 있게 상대방을 존중하며 안부를 담은 인사는 기분 좋은 마음으로 산책을 이어갈 수 있게 한다. 이 적절한 평화가 깨지는 순간은 걸음이 멈춰져 있을 때나 상대방이 과하게 친절한 경우에 생긴다. 혹은 유머 감각이 많은, 코미디언이 꿈이었던 사람이거나.
산책로는 길이가 1.5Km 정도이고 나는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그러니 3Km를 걷거나 뛰는 셈이다. 작년 아이들과 달리기를 한참 했을 때였다. 아이들은 러닝을 처음 시도하는 중이었고, 훈련 과정 중 3분 뛰고 2분을 걸으며 달리기를 몸에 익히고 있었다. 우리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반대쪽에서 어린아이 둘과 아빠 셋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우린 스쳐 지나갔다. 반환점에 도착해 우리는 방향을 바꿨고 마침 그때가 걷는 구간이었다. 아이들은 달리기가 익숙하지 않아 숨을 헐떡였던 것 같다. 긴 다리를 건널 때 아까 스쳐 지나간 아빠와 아이들도 자전거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우리 앞쪽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 아빠는 우리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Hey, Guys! 이 정도로 지친 건 아니지? 힘을 내! 너희는 할 수 있어! 아자아자!”
그는 우리에게 응원과 격려, 그리고 친근함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나도 그에게 약간의 재치를 섞어 대답했다.
“당연히 그럴 거야! 사실 난 마라톤 선수거든! 치얼스!”
슬프게도 내 말은 마음속에서만 맴돌았다.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그의 응원에 복잡해진 내 머릿속은, 주어와 동사와 목적어를 순서에 맞게 배치했다가, 다시 위치를 바꿨다가, 그것을 다시 번역하는 있는 와중에 그는 우리 옆을 지나쳤다. 아마 나는 ‘I know, I’ll…’하며 얼버무렸던 것 같다.
또 한 번은 바다 산택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주말이라 많은 사람들이 집 앞 잔디를 깎고 있었다. 길 옆 잔디를 깎던 할아버지는 우리와 방향도 같고, 출발선도 비슷하게 마침 방향을 꺾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우리를 보더니 씩 웃으시며 “Here we go!”하신다. 난 그냥 웃고 말았다. 그 순간에 마땅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영어 때문에 슬픈 이유는 대게가 이런 것들 때문이다. 친절하고 상냥한 그들이 나를 슬프게 한다. 대게는 어렵지도 않은 말들이라 더 마음이 아프다.
키위는 친절하다. 유머 감각도 많다. 내가 절망적인 마음이 드는 건, 이 사랑스럽고 자유롭고 친절한 문화에 내가 섞일 수 없다는 현실이다. 그때 상황에 맞는, 적절하고 쉬운 말을 못 하는 내가 한참 동안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그들과 감정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내가 Here we go! 했을 때, Alright! Let’s get started!라고 답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가볍고 짧은 긍정적 소통의 말들은 책 보다 삶 속에서 배우는 경우가 많다. 외국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 수 있겠어. 하는 생각도 들지만, 외국에서 살고 있는 지금도 뾰족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다. 내가 개그 욕심이 덜한 사람이었다면 괜찮았을까? 이런 바보 같은 생각도 했다. 나도 그들과 농담 따먹기 하고 싶은데 말이지.
언젠가 도서관에서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 주는 프로그램 안내문을 봤다. 설레는 마음으로 연락을 했는데 그 프로그램은 영주권자나 시민권을 위한 프로그램이라 나는 참여할 수 없다는 답장을 받았다. 저렴하게 영어를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지만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찾기 힘들었고 대다수는 어학연수를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한인회에서 운영하는 20주 영어 수업에도 참여했었다. 10명이 넘게 시작한 영어 수업은 한 주, 한 주 지날수록 참석하는 사람이 줄었고 마지막에 남은 건 나와 다른 한 남자분, 둘 뿐이었다. 나중엔 사람이 오지 않아 수업도 흐지부지 진행됐고 나 혼자 참석한 날은 선생님과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20번의 영어 수업을 했지만 내 영어는 늘지 않았다. 어려운 단어를 배우며 취업을 위해 면접 시 사용하는 대화나 이력서를 작성하는 법을 공부하는 수업이었다. 나는 가디언 비자라 취업도 할 수 없는데 말이지.
이민자 중 20년 넘도록 뉴질랜드에서 살았어도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뉴질랜드에 살지만 한국 사람하고만 소통한다. 마트에서 장 보거나 영화를 볼 때,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할 때는 영어가 많이 필요하지 않다. 병원은 한국인 의사가 있는 병원을 찾아가고 여러 정부 기관엔 한국인 직원이 있다. 뉴질랜드는 이민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고 얼마 전엔 동양인 이민자의 수가 마오리족의 수를 넘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이민자의 나라이기 때문에 소통을 위해 각 나라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직원을 고용한다. 이러니 영어를 못해도 뉴질랜드에서 살기는 크게 불편하지 않을 수 있다. 가족과 친구가 있다면 외롭지도 않을 것이니 내 세상 속에서만 살면 된다. 그래도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영어를 못하는 건 여러 가지 불리함을 감수해야 한다. 내 이야기를 표현하기 어렵고 영어로 도배된 세상에서 신문을 읽거나 뉴스를 보거나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쉽게 이해하지 못하니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 수도 있다. 영어를 말하지 못함으로써 무시받는 상황도 생길 수 있고 사기를 당할 가능성도 있다. 일례로 자동차 사고가 났을 때 영어를 못하면 가해 측에서 거짓 진술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차량에 블랙박스가 있는 경우가 드물고, 주변 목격자의 진술이나 사고 당사자들의 진술로 보험 처리가 대부분 이루어지는데, 상황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면 억울하지만 손해를 감수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영어를 못하면 선택의 여지없이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기업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내 능력에 맞는 급여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뉴질랜드는 아프거나, 아이를 돌봐야 하거나, 병원에 가야 하는 경우 등 개인적인 사유로 휴가를 사용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나라다. 하지만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은 그들의 약점을 이용해 최저 시급으로 운영되거나 휴가를 쓸 때 눈치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물론 모든 업체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 점을 이용하는 업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슬프지만 내 목소리를 가질 수 없다는 건 크고 작은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결론은, 외국에 나갈 일이 있다면 입으로 영어를 공부하길 바란다. 영어도 언어이기 때문에 타인과의 소통이 제일 중요하다. 나의 친절했던 이웃, 닉에게 헤어질 때 편지를 썼었다.
“내가 영어를 잘했다면, 우리는 더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었을까?”
그는 내 말의 절반은 이해했을 것이다. 내 엉터리 영어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많이 봤다. 나는 꽤 유머러스하고, 밝고 신나 있는 사람이다. 영어를 잘했다면 나는 닉이랑 더 가까운 사이가 됐을지도 모른다. 닉은 나처럼 밝고 유쾌하고 즐거운 사람이었다. 뉴질랜드에 와서 나는 조용하고 위축돼 있고 소심한 사람이 됐다. 안 그러고 싶은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내가 얼버무릴 때 그들의 표정이, 내 마음에 콱 박힌다. 에이, 이게 뭐 어려운 말이라고 말을 못 하나. 싶겠지만 아직도 영어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뜻이겠지.
입을 연습시키자. 하루종일 중얼거리자. 내가 자주 사용할 문장부터 시작하자.
“Alright! Let’s do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