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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곰 Jul 03. 2024

긴, 긴, 긴, 겨울밤

썩 물렀거라! 잠요정!

이곳의 하루는 늘 그렇듯, 특별히 바쁜 일은 없지만 빠르게 지나간다. 아마도, 지금이 겨울이라 물론, 더, 그렇겠지만, 오후 5시가 되면 세상은 어둠으로 덮이기 때문에 하루의 끝은 어쩌면 오후 5시일지도 모르겠다. 어둠이 시작되면 외출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어둠을 뚫고 나가야 할 만큼 급한 일도 아직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에게 뉴질랜드의 밤은, 아직 정복하지 못한 미지의 세상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의 밤 풍경에 놀라는 영상을 많이 봤다. 전엔 몰랐는데 뉴질랜드에서 살아보니, 내 생각에도 어떻게 그렇게 안전한 밤거리 문화가 만들어졌는지, 신기한 일이다. 한국에서 저녁 8시에 길을 걷는 것은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뉴질랜드에서 저녁 8시에 길을 걷는 일은 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길이 그리 밝지 않다. 한국의 시골길과 비슷할 것 같다. 군데군데 가로등이 있지만 간격이 멀고 짙은 어둠을 없애기엔 전등의 빛은 너무 약하다. 길을 걷는 사람도 없다. 오히려 밤길을 걷는 누군가를 마주친다면 어둠보다 더 무서울지도 모른다. 아무도 걷지 않는 어둠 속을 걷는 사람은 남들과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 상상은 물론 내가 아직 밤의 영역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나에게 ‘밤 길’은 안전하지 않은, 두려운 공간이다. 길가에 주차된 차 안의 동전 때문에 창문이 깨지는 일도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 


일찍 시작된 밤은 무척 길고 조용하며, 수면 시간을 앞당긴다. 나는 뉴질랜드 2년 차에 이른 수면의 비밀을 알아버렸다. 작년엔 한국에서처럼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잠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해인 올해, 내 눈꺼풀은 9시부터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버티고 버티다 10시에 잠을 자고 새벽 5시에 일어난다. 잘만큼 잤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건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저절로 떠진다. 이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니라 뉴질랜드의 밤 요정, 혹은 밤 요괴가 드디어 나에게도 마법을 걸기 시작한 게 틀림없다. 어쨌든 확실한 점은 점점 이곳 사람들처럼 일찍 잠들고 일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작년엔 앞집, 뒷집, 옆집 모두 저녁 9시만 되면 불이 꺼지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었는데, 이젠 나도 그중 한 명이 되었다. 내가 찾은 이른 수면의 비밀 두 개는 첫 번째, 심심하고, 두 번째, 심심하기 때문이다. 뉴질랜드는 심심하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좋은 습관을 거저 얻었지만 안 좋은 점 한 가지는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점이다. 서늘한 새벽 공기는 차갑고 나는 그 추위 속으로 뛰어들 용기가 없다. 오히려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당기고 눈만 빼꼼 내놓은 채 누워서 책을 보거나 휴대폰으로 글을 읽는다. 거저 얻은 것 같은 그 시간을 알차게 사용하고 싶지만 방안을 꽉 채운 7도의 서늘함은 내 게으름보다 강하다. 왜 하필 겨울일까. 아니, 겨울이니 당연히 밤이 일찍 찾아오는 거겠지.(게다가 뉴질랜드는 Daylight saving을 시행하고 있는 나라다. 원래는 4시에 어둠이 찾아올 뻔했다고!) 박자가 잘 안 맞는다고 해야 할지, 뉴질랜드랑 궁합이 안 맞는다고 해야 할지, 정확한 결론을 내리는 게 아직은 어렵지만 톱니바퀴가 헛도는 느낌이다.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여름엔 한국에 방문할 것이고(슬프게도 한국은 겨울), 한국에서 다시 늦은 잠자리 패턴을 익혀 뉴질랜드로 돌아와서는 당분간 늦은 수면 패턴으로 지낼 것이다. 하지만 뉴질랜드의 여름은 오후 9시까지도 환하니, 어색하진 않다.


여름은 항상 옳다. 일단 빛이 많고, 많은 빛은 많은 색을 만들어낸다. 온 세상이 따뜻함과 예쁜 색으로 가득 차는 계절이다. 나는 여름을 사랑한다. 반면 겨울의 낮은 짧아도 너무 짧은데, 구름 사이로 힘겹게 햇살을 땅으로 보내는 창백한 태양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빛은 턱없이 부족하다. 부족한 빛은 선명하고 다양한 색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칙칙한 겨울은 유난히 하루가 빨리 지나가는데, 겨울 하루 일과는 대략 다음과 같다. 5시에 눈을 뜨지만 비루한 의지 때문에 7시에 침대를 탈출한다. 7시는 어쩔 수 없는 시간이다. 아이들의 아침 식사와 도시락을 싸야 한다. 침대에서 나오자마자 두껍고 커다란 후디를 뒤집어쓴다. 어떤 날은 아침밥과 점심 도시락 메뉴가 같고, 어떤 날은 전날 부지런함 덕에 아침과 점심 메뉴가 다르다. 메뉴가 같든 다르든 8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찾아온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 9시에 도서관으로 향한다. 하루 중 나에게 제일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글을 쓰거나 밖에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어쩌다가 내가 이곳까지 오게 됐을까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멍하게 흘러가는 구름의 속도를 가늠해보기도 한다. 정오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한다. 원래는 러닝 하는 시간이었지만 오른쪽 무릎이 말썽이다. 무릎뼈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순간들이 종종 있는데, 뼈와 뼈가 맞닿아 어긋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맥주라도 한잔 마시면 무릎뼈의 존재감은 더 강해진다. 오묘한 느낌의 신호를 계속 주더니 요즘은 불편한 느낌까지 올라왔다. 평생 써야 하는 관절이니 소중히 아껴야 한다. 그래서 요즘은 한두 시간 걷는 걸로 운동을 대신한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등이 괴롭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운동은 해야 한다. 참 사람의 몸은 정직하다. 게으름을 피우면 이내 목이나 어깨가 결리거나 등에 피로가 쌓이는 게 느껴진다. 부지런히 동네를 몇 바퀴 돌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잠깐 휴식 시간을 갖고 있으면 아이들이 귀가한다. 집은 이때부터 다시 정신없게 돌아간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나 친구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다시 어둠이 시작된다. 


5시다. 미지의 세상이 시작되는 시간.


결국, 겨울이 문제다. 성질 급한 어둠덕에 바쁘지 않지만 바쁘게 지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급하게 지나가는 시간에 쫓겨 하루의 마지막 업무인 저녁 식사 준비를 서두른다. 나는 요즘 요리 실력이 많이 늘었다. 전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런저런 요리를 시도하고 있다. 이건 이른 수면을 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새롭게 생긴 취미다. 사실 아직도 요리는 귀찮고 힘들지만 예전에 비하면 꽤 즐기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씻으면 7시다. 어떤가, 내 말이 맞지 않은가? 바쁘지도 않고 별다른 일도 하지 않았는데 2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시간은 계속 이런 식으로 삭제된다. 식기 세척기를 돌리고 모두 책상에 모여 앉아 책을 읽거나 그날의 과제를 해결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제 9시가 됐다. 이때부터 나는 졸음과의 사투를 시작한다. 하루가 딱히 바쁘거나 할 일이 많지도 않았는데 몸은 천근만근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졸린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마 새벽 5시에 일어났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나는 7시에 하루를 시작했단 말이다. 내 하루는 22시간으로 줄어들었지만 어디서 보상을 받아야 할까.


나는 겨울을 계절 중 제일 싫어하고, 한해에 겨울을 두 번 겪는다. 뉴질랜드는 6,7,8월이 겨울이고 (개인적으로는 5,6,7,8,9,10월이라고 하고 싶지만) 12,1월을 한국에서 지낸다. 이때 한국은 겨울이다. 뉴질랜드의 계절 중 제일 아름답고 따뜻한 시기는 12, 1월이다. 여름을 제일 좋아한다. 일 년 중 여름을 느낄 수 있는 시기는 뉴질랜드로 다시 돌아와 지내는 2월이 전부다. 2월은 진짜 여름도 아니다. 여름의 끝자락이다. 곧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온다.


나는 정말 뉴질랜드와 궁합이 안 맞는 게 아닐까.


이건, 저주다. 왜 이렇게 됐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더 추운 겨울을 피해 뉴질랜드를 선택했는데 나는 내 꾀에 내가 당해버렸다. 조금 더 차분하고 천천히 계산을 했어야 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옛날부터 계산에 약하다. 수학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수학을 열심히 공부했으면 일 년에 겨울을 두 번이나 겪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마 그랬겠지.


밤 10시다. 등이 아파서 더 이상 책상에 앉아있기가 힘들다. 밤 요정, 아니 밤요괴가 9시부터 내 머리 위에 앉아 주문을 외고 있는 것 같다. 눈꺼풀이 무겁다. 눈을 깜빡, 또 깜빡. 깜빡거릴 때마다 눈꺼풀 두께와 무게가 느껴진다.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감촉도 느껴진다. 각막에 수분이 부족한 것도 느껴진다. 수분을 채우기 위해서였는지 하품이 나온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어깨가 점점 올라간다. 몸이 구부정해지고 있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쉬었다. 찬 공기가 콧속에 가득 들어왔다가 따뜻해져 다시 나간다. 찬 공기는 콧방울을 식힌다. 코가 시리다. 발가락 끝 감각이 서서히 흐려진다. 몸을 데워야 할 시간이다. 침대는 미리 켜둔 전기장판덕에 따뜻하게 준비돼 있다. 하품이 한번 더 나온다. 옆에서 숙제를 하고 있는 큰 애를 한번 바라본다. 둘째는 진작에 꿈나라로 갔다. 깊은 숨을 한번 더 내쉰다. 머리가 무거워 오른쪽 어깨에 기댔다. 이런, 하품이 또 나온다. 점점 주기가 짧아진다. 


밖엔 여전히 비가 오는데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헬멧은 썼을? 비를 맞으면 추울 텐데…라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생각하기를 멈췄다. 그 사람을 생각하니 추워졌다. 이불속으로 들어가야겠다. 이젠 정말 자야 할 시간이다. 첫째와 함께 해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숙제는 해야 하니까, 


먼저 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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