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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곰 Jun 26. 2024

드디어 아무렇지 않게 됐다

누가 그랬다. 차를 사면 날개를 얻게 될 거라고, 그래서 천사를 만났나.

겨울이 돌아왔다. 며칠 째 하늘은 틈 없이 빼곡하게 회색 융단을 깔아놓고 있다. 회색 융단 작은 틈 사이로 손톱만 한 파란색이라도 보이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련만, 얇은 틈도 보이지 않는다. 오늘 아침은 안개까지 짙게 내려앉아 늘 보이던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다. 창문은 밤새 작은 습기가 모여 물방울로 바뀌어 흘러내리고 있다. 영상의 기온에서 입김이 나오는 신기한 경험을 올해도 한다. 작년과 다른 점은 이사를 했기 때문에 새 집에서의 첫 번째 겨울이라는 것과 예전 집과 다르게 층고가 높은 새 집은 천장에 곰팡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그래서 미리 사둔 곰팡이 제거제는 서랍장에서 나온 적이 없다. 작년엔 천장에 생기는 곰팡이 때문에 한 달에 한번 곰팡이 제거 청소를 해야 했다. 또 다른 다른 점 한 가지는 차가 생겼다. 차를 샀다. 


그날도 어제나 그제와 똑같은 날이었다. 서서히 겨울이 오고 있는 게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는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 하고 있었다. 아마 노트북으로 뭘 보고 있는 중이었겠지만 머리는 멍한 상태였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뒤집어쓰는(혹은 입는) 내 몸이 두 개는 들어갈만한 두꺼운 후디에 몸을 집에 넣고 앉아 있었다. 무릎을 접어 발가락 끝까지 모두 후디 안에 넣고 동그랗게 몸을 말은 채로, 온기를 절대 뺏기지 않으려는 공벌레처럼 말이다. 창 밖에 흔들리고 있는 나뭇잎, 정확하게는 그림자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차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래, 차를 사자. 


회색 융단이 깔리는 일은 앞으로도 몇 달간 이어질 것이고 그동안 내 발가락은 죽은 사람의 발가락과 같은 온도일 것이다. 불쌍한 내 발가락을 생각하다가 차를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동안 무엇을 고민했을까. 인생이 웃긴 이유는 아마 이런 것들 때문이다. 고민한 이유가 뭔지도 모른 채 나는 일 년이 더 지나고 나서 내 불쌍한 발가락에서 시작된 동정심으로 행동을 시작했다. 아마 나는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하늘에 덮인 회색 융단 같은 것으로 그 생각을 덮어뒀던 것 같다. 둘의 차이는, 고민은 결론이 나오면 끝나지만 덮어둔 것은 장막을 걷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는 점이다. 뉴질랜드에 오기 전, 유학원을 통해 집을 미리 계약했는데 그 집은 한국 유학생 엄마와 아이가 살던 집이었다. 그들은 공부를 마치고 뉴질랜드를 떠나는 터라 그들의 살림살이를 모두 인수받았다. 차는 직접 보고 구입해야겠다는 생각에 인수하지 않았다. 접시나 책상은 그럭저럭 마음에 들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지만 보지 않고 차를 어떻게 구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막상 뉴질랜드에 와보니 한국과 많은 것들이 달랐다. 자동차 생산국인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뉴질랜드는 모든 차를 수입한다. 게다가 섬이라는 지형적 특징 때문에 중고차 시장이 무척 발달돼 있었다. 자동차 중고 사이트에 올라오는 차들은 연식이 오래되고 아이들과 타고 다니기엔 적당하지 않아 보였다.  언젠가 적당한 연식과 가격과 주행거리를 가진 차량이 매물로 나왔다. 나는 그 차를 구입할까 했는데, 다들 그 차를 사면 큰일 나는 것처럼 말린 적이 있다. 그 모델이 도난이 잘된다는 이유였다. 뉴질랜드는 주택가 도로에 차를 많이 세워두는데 차 유리를 깨고 물건을 훔쳐가는 일이 빈번하다고 한다. 실제로 지인 두 명이 그 방법으로 물건을 도난당한 적이 있다. 내 지인은 몇 명 되지 않는데, 그에 비하면 매우 높은 확률이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는 이유들에 눌려 1년을 차 없이 살았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시작되고 겨울이 턱밑까지 왔을 때, 문득 결심이 선 것이다. 올 겨울도 매일 비가 올 것이고, 작년에 이어 올해도 외출하는 일이 적어질 것이다. 그럼 이번 겨울도 작년만큼 차분하고 무거운 겨울이 되겠지. 또다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차를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한국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온 차들을 살펴봤다. 지인들은 모두 무조건 도요타를 사라고 했다. 부품이 많고 안전하고 되팔기에도 좋다는 이유다. 차가 예쁜 건 스즈키이고, 닛산이나 다른 회사도 괜찮아 보였지만 차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따르는 게 맞다. 슬프지만 도요타는 참 내 스타일이 아니다. 올라온 매물 중 7년 된 80,000km 하이브리드 도요타 차량이 눈에 띄었다. 차량 주인과 다음 날 만나기로 약속하고, 차량 점검을 해주실 분에게도 연락을 했다. 남편은 차를 볼 줄 아는 전문가와 함께 가길 바랐다. 뉴질랜드엔 중고 거래가 활발하기 때문에 차량 점검 전문가가 있다. 자,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내일, 드디어 차가 생긴다. 


차량 점검을 해주시는 아저씨는 만나자마자 그 차는 구입하면 안 된다고 했다. 뭐라고요? 오늘을 얼마나 기대했는데, 차를 못 산다고요? 파삭 김이 샜다. 어젯밤 혼자 축배를 들었다. 차가 생긴다. 들떴다. 맥주를 몇 캔 마셨는데 이상하게 평소보다 더 취하길래 캔을 살펴보니 7.5도 맥주였다. 내일 차를 보러 가야 하는데, 아차 싶어 축하를 멈추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다. 무거운 몸을 살살 달래며 설렘을 잔뜩 끄집어내 아저씨를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퇴짜를 맞은 것이다. ‘왜요?’하고 물으니 그분은 자세히 나에게 설명을 해줬다.


1. 현재 뉴질랜드에서 도난당하는 차량 1위 -> 보험료가 무척 비쌈

2. 연식이 있는 하이브리드 배터리 -> 언제 고장 날지 모름 (교체비용 비쌈)

3. 스마트 키 없음

4. 도난 방지 기능 없음

5. 같은 차종 라인 중에 제일 낮은 레벨

6. 뒷 창문 수동으로 열고 닫아야 함

7. 현재 판매 차량의 상태를 고려했을 때 제시된 가격 비쌈


결론: 절대 그 가격에 저 차는 팔리지 않음


아저씨는 그 차를 사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셨고, 차를 모르는 나도 납득이 됐다. 그분은 전문가 아닌가. 그럼 어쩌나, 하고 있을 때 그분은 알아온 차가 있다며 나에게 다른 차를 소개했다. 내가 사려던 차와 비슷한 가격대로 알아보셨다고 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분을 그리 신뢰하지 못했다. 우린 만난 지 겨우 5분이 지났을 뿐이고 내가 사려던 차는 차이고 새로운 차를 나에게 소개한다. 누가 나 대신 차량을 알아와 준단 말인가. 그것도 아무 대가 없이. 슬프게도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내가 구입하려던 차주에게 연락해 약속을 취소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이 소개한 차를 보기로 했다.


<구입을 고려했었던 차의 후일담을 말하자면 이틀 뒤, 가격이 내려 판매 글이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삼일 뒤 판매 가격은 또 내려갔다. 내가 문의했을 땐 가격 조정이 어렵다고 했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쯤 그 차종이 뉴질랜드에서 도난 문제가 심각해 보험료가 너무 많이 올랐고, 동일 차량을 소유하고 있는 차주들의 부담이 크다고 하는 내용의 기사가 올라왔다. 이건 짜고 치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고속도로를 달려 중고차 매장이 많다는 동네에 도착했다. 그리고 중국인이 운영하는 한 자동차 중고 매장에 도착했다. 그분이 자주 찾는 매장 같았다. 나는 또 한 번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다. ‘차 구입한다는 사람과 이 매장을 연결하고 수수료를 받는 거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중고차 딜러에게 차를 구입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많이 들은 조언 중 하나는 ‘개인 거래가 중고차 딜러에게 차를 구입하는 것보다 30% 이상 저렴하다.’였다. 개인 거래를 할 때 제일 중요한 건 차 상태를 알아야 하는데, 그래서 전문가를 고용한 것이지, 딜러에게 구입할 거였다면 진작에 중고차 매장에 가서 구입했을 것이다. 중고차 매장에 들어온 차는 대게 검증된 차량이지 않은가. 게다가 거의 판매 후 문제가 생겼을 때도 구입한 매장에서 수리를 해준다. 그런데 결국 나는 차량 전문가와 함께 중고차 매장에 온 것이다.


꺼림칙한 마음이 사그라든 건 그분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다. 그분은 나에게 소개한 매물을 딜러에게 보여주고 차를 빼달라고 요청한 뒤 차를 살피기 시작했다. 엔진, 타이어, 차량 내부, 창문, 배터리, 청소 상태, 작은 부품까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체크했다. 마치 딸이 탈 차를 점검하는 아버지처럼 과할 정도로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리고 배터리가 오래돼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요구해 교체를 해줬고 엔진을 덮는 덮개와 차에 기본으로 포함되어 있는(하지만 아마 영원히 내가 쓸 일은 없을 것 같은) 연장이 없어 매장 내 동일한 차량에 있는 것으로 채워줬다. 바깥에 생긴 작은 흠집도 없애려 여러 가지 약품으로 닦아주었고 주유소에 들러 타이어 공기압까지 맞춘 뒤 고속도로 주행 테스트까지 해주었다. 그분이 모든 일을 마쳤을 때, 3시간이 지나있었다. 차를 이만큼 꼼꼼하게 봐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 기대는 내가 그동안 삶을 살면서 다른 사람과 맺은 여러 가지 경험으로 쌓인 데이터다. 어떤 분야에서든 이렇게까지 열심인 분을 만난 적이 없다. 커뮤니티에 이 분에 대한 많은 리뷰가 광고나 과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칭찬이 너무 많았고 어느 글은 그 정도가 과해 오글거리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모든 일이 끝난 후 그들보다 더 오글거리는 내용으로 후기를 남겼다.


차가 조금 작지 않나? 하는 생각에 잠깐 고민하다가 20,000km도 안 되는 주행거리와 스마트 키, 도난 방지 시스템, 깨끗한 실내, 그리고 제일 중요한 아저씨의 차량 점검 결과가 양호하다는 이유로 그 차를 구입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별 탈없이 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번호판을 달고 배터리를 교체하고 후방 카메라도 설치해야 했기 때문에(게다가 주말과 연휴가 껴있었다.) 4일 후 계약을 마무리하러 재방문했다. 그때도 아저씨는 함께 가주었고 잔금을 송금하고 드디어 차 주인이 됐다. 아저씨는 처음 정한 수수료 외에 팁을 거부하셨다.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들른 식당에서 아저씨는 보험까지 온라인으로 가입해 주었다. 온라인으로 가입하면 대면 가입보다 보험료가 많이 저렴해진다고 했다. 아저씨와 진행한 모든 일은 혼자는 절대 못했을 일이다. 이분은 천사가 틀림없다.


이제 마지막 임무가 남았다. 차를 운전하고 집에 무사히 도착해야 한다. 뉴질랜드에서 동승자가 없이 차를 운전해 본 적이 없다. 급박한 일이 생겨도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과 도로 방향이 반대이기 때문에 차의 핸들 방향도 다르다. 뉴질랜드엔 로터리가 많고 내 오른쪽에서 로터리에 차량이 진입하면 무조건 양보해야 한다. 소소한 교통 법규가 한국과 다르지만, 제일 걱정되는 건 나의 무의식이 한국의 도로 방향을 선택해 반대편 도로로 진입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에게 역주행했다는 말을 몇 번 들었다. 같은 도로에서 나와 상대편 차량의 운전자가 서로 바라보고 있는, 상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한 상황은 제발 일어나질 않길 바라며 천천히 운전을 시작했다.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렌터카로 운전했을 때, 매번 잘못 빠져나가 시티를 한 바퀴 돌았던 고속도로 출구도 잘 지나갔다. 하버 브리지를 건넜고 드디어 우리 동네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뭐라고, 무척 감격스러웠다. 한국에서 10년 넘게 운전을 해온, 나름 배테랑 운전자였던 나는 이번 20여분의 운전으로 초보 운전 딱지를 이제 막 뗀 기분을 느꼈다. 


차가 없었을 때의 삶과 많이 다르냐고? 달라진 건 딱 한 개다. 


‘아무렇지 않은 마음’


삶이 아무렇지 않게 됐다. 비가 와도 아무렇지 않았고 시티에 크로키를 그리러 가는 일도 아무렇지 않게 됐다. 아이가 학교 행사를 하고 늦게 마쳤을 때도 아무렇지 않게 데리러 간다. 노심초사 어두운 밖을 바라보며 무사히 집에 도착할 때까지 걱정하는 일이 없다. 비가 오면 외출을 포기했었다. 우산을 들고 버스를 한 두 번 갈아타면서 볼일을 보러 갈 이유가 없었다. 이곳에서의 모든 일은 강제성 없는 내 의지로 이루어진다. 직장을 다니지도 않고 꼭 만나야 할 사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불편하고 힘들면 안 하면 된다. 그래서 얻은 ‘아무렇지 않음’은 내게 평안함을 가져다줬다. 비가 와도 괜찮고 추워도 괜찮다. 갑자기 떡볶이가 먹고 싶은 날이면 아이들과 떡볶이 재료를 사러 한인 마트에 간다. 어두워져서 미루고, 걱정하고, 고민하는 일이 모두 사라졌다. 그래서 내 삶은 더 단순해졌다. 새로운 곳을 일부러 찾아가지는 않는다. 늘 가던 장소를 아무렇지 않게 간다. 이젠 구글맵으로 버스 시간을 알아볼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을 사용하기 위해 구글맵을 더 자주 연다. 장 보는 일은 더 불편해졌다. 그동안 마트에서 배달을 시켰는데 이제는 마트에 직접 간다. 소소한 일거리다. 생선을 직접 고르고 고기도 지방이 적은 부위를 산다. 마트 직원이 선택해 주었던 것을 이젠 내가 선택한다. 구입할 예정에 없던 물건을 많이 사게 됐다. 새로운 것은 시도해보고 싶다. 다양한 브랜드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도 새로운 고민이다. 브래드별로 한 번씩 시도해보려고 한다. 줄을 서서 계산을 한다. 배달 주문을 했을 땐 기다리는 일이 없다. 차에 짐을 싣고 다시 운전을 해서 집에 온다. 요즘 마트는 100달러 이상을 사면 무료 배달을 해준다. 여러 가지로 내 손해가 더 큰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소소한 일거리를 만들러 직접 마트에 간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글을 쓴다.


그리고 거의 매일 도서관에 가고 있다. 3시간 무료 주차가 되는 데본포트 도서관이 내 단골 도서관이다.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은 1시간 무료 주차가 가능한데 그마저도 공사 중이다. 데본포트 도서관(물론 많은 뉴질랜드의 도서관의 뷰가 그렇지만)은 바다뷰다. 정말 아름답다. 노트북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비가 와도, 추워도, 버스가 막 지나갔어도 마음먹은 그 순간 출발할 수 있다. 


올 겨울은 조금 덜 춥지 않을까.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길. 

아마 매일 차를 타면 그렇게 될 거야. 

매일매일 차를 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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