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희는 공부 잘해서 엄마가 좋아하시겠구나.
- 아니요.
- 왜?
- 엄마는 내가 문제 한 개만 틀려도 "몰라서 틀린 거니? 알면서도 실수한 거니?" 하면서 나를 다그쳐요.
그리고 틀린 개수대로 때려요.
도서관에서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의 문학 수업을 하면서 어린이들을 자주 만난 때가 있었다.
당시 연희(가명)는 중학생 일 학년이었다. 단정하고, 성실하고, 예의도 바르고, 질문도 잘하고 질문에 답도 잘하는 아이로, 누가 봐도 일명 모범생이었다. 공부 또한 잘해서 거의 1등을 놓치는 법이 없었단다.
나무랄 데가 없는 이런 딸을 가진 엄마는 얼마나 자랑스러워할까?
그런데 연희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 그다음 말은 나를 경악케 했다.
"내가 공부 못하는 아이였다면, 한 개만 틀려도 엄마는 나를 칭찬하며 기뻐했을 거예요. 그런데 내가 공불 잘하는 게 문제예요. 한 개 틀렸다고 때리고, 두 개 틀렸다고 때리고..... 지금은 내가 힘이 없어 이렇게 맞고 있지만, 이다음에 내가 엄마보다 힘이 더 세지면 그때는 다 갚아 줄 거예요. 어른만 돼봐요. 나도 엄마처럼 하고 싶은 말 다 뱉으며 실수하거나 틀릴 때마다 때려 줄 테니...."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그러면서도 소름 돋는 저 섬뜩한 말들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온 것일까?
"연희야, 음...... 엄마는..... 아마........."
머릿속이 하얘진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언어를 잊은 듯 버벅대고 있었다.
"미안해."
"선생님이 왜요?"
나는 연희의 어깨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이것은 연희의 엄마 혼자 담당할 몫이 아니다. 무지한 어른들의 몫이고, 나아가 교육이 맞아야 하고 사회가 맞아야 할 묵직한 채찍이다. 학교에서 하라는 대로, 부모가 원하는 대로 '나'아닌 그들의 목적에 맞게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연희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부조리'다.
지금은 대학생이 되어 있을 연희는 얼마나 힘을 키웠을까? 엄마를 때려 줄 물리적 힘이 아닌 사회의 부조리와 교육의 부당성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힘,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참 교육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방향을 제시하여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억울한 청소년이 없도록 영향력을 키우는 힘, 어른다운 어른으로 나아가기 위한 성찰의 힘을 키워 연희를 단단히 붙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석홍(가명)이는 지역아동센터에서 만난 6학년 남자 아이다. 지역아동센터에서는 맞벌이하는 부모나 한부모 밑에서 자라는 저소득층의 만 18세 미만의 아동으로 보호 및 양육, 교육, 급식 등 다양한 프로그램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저학년과 고학년이 섞인 10여 명의 아이들과 동시(童詩) 수업을 하는데, 첫날부터 집중시키는 게 만만치 않았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아이들, 한 아이를 앉히고 나면 또 다른 아이가 돌아다니고, 서로 일러바치고, 서로 욕하고, 공책이 날아가고, 지우개가 날아가고, 나보다 더 큰 목소리들이 교실 전체를 들썩였다.
어찌어찌 달래서 10분 정도 집중하면 영락없이 석홍이의 반란이 시작된다. 앞에 앉은 여자 아이의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짝꿍의 공책을 빼앗아 던져버리고, 어린 여동생들에게 으름장을 놓아 울음을 터뜨리게 하고...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고 물으면 "재밌잖아요" "그냥" "난 원래 이래요" 하며 말문을 닫게 만든다.
어떤 통제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석홍이.
석홍이는 어렸을 때 엄마가 집을 나가 버려서 할머니 손에 자랐다. 아버지는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학교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버지를 오시라고 했을까?
나는 상상을 가미한 동시 한 편을 썼다.
석홍이가 운다 / 말썽쟁이 석홍이가 운다. //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고 / 툭하면 여자애들을 울려 // 선생님께 매일 혼나도 / 울기는커녕 / 오히려 씨익 웃던 석홍이가 // 책상 밑에 들어가 / 눈물을 닦는다 // 주먹으로 쓱쓱 닦는다. / 저 땜에 불려 나와 / 선생님 앞에서 / 고개 숙인 아버질 보고.
-'석홍이의 눈물' 전문-
조선일보에 '가슴으로 읽는 동시'에 이 시가 실린 날 아침, TV조선 김광일의 칼럼에 '석홍이의 눈물'이 소개되었다. 이전에는 아이가 말썽을 피우면 부모님이 선생님께 허리 굽혀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을 종종 봤으나 요즘은 이런 부모 찾아보기 어렵다는 시사적인 면에서 다루었다. 칼럼은 부모에게 초점을 두었고, 나는 석홍이에게 초점을 둔 것인데 보는 시선은 달랐다. 어찌 됐건 아버지가 선생님 앞에서 고개 숙인 모습을 보면 석홍이의 마음과 태도가 좀 달라지려나? 내심 달라졌으면 하는 염원을 담았다.
석홍이가 엄마의 품에서 사랑받고 자랐다면 유독 여자 아이들을 괴롭히고 울리는 행동은 덜 했을까? 그런 쪽으로 부정적 감정을 덜 소모했을까?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었을 석홍이는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까?
엄마 대신 할머니의 사랑으로, 아버지의 사랑으로 일그러진 감정들이 치유되고 회복되어 있기를, 그도 아니면 가수 김호중처럼 석홍이의 재능을 빛내줄 수 있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 놀라운 반전의 삶을 살고 있는 석홍이의 이름을 신문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한다.
OO사립초등학교 '독서교실'에서 만난 4학년 2반 아이들. 역시 천방지축이었다. 하지만 수업이 시작되면 나름 자리에 앉아 똘망똘망한 눈으로 선생님을 응시한다. 질문하면 "저요, 저요!" 일제히 개구리처럼 팔짝 뛰며 먼저 대답하겠다고 아우성이다. 질서 속에 무질서가 존재하는 교실. 경쟁해서 이긴 자만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터득한 아이들은, 함께 어울려 놀다가도 질문에 답하거나 발표를 해야 할 때는 철저한 이기주의를 주저함 없이 드러낸다. 마치 '내 사전엔 양보가 없다'는 듯이.
서로 먼저 손을 들었다며 핏대를 세우고 목소리를 높이며 으르렁댄다.
학업 성적과 관계된 수업이라고 생각했는지 아이들은 절대 양보가 없다. 치열했다.
그 작은 교실은 성과주의를 지향하는 현대사회의 피로를 그대로 보여주는 축소판 '피로사회'였다.
훌륭한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여러분들 중에 훌륭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요?"라고 질문하자, 모두 입을 맞추고 마음을 맞춘 것처럼 "쟤요!" 하며 일제히 한 남학생을 가리켰다.
어떤 아이일까, 나는 몹시 궁금한 눈으로 미소 지으며 바라봤다.
"인수는 반에서 1등만 해요. 그래서 훌륭해요." 한 아이가 인수 대신에 자랑스럽게 말해준다.
"1등 하면 훌륭한 사람인가요?"
"네~~~" 한 목소리가 되어 교실을 울린다.
"공부가 최고니까 공부 잘하면 훌륭한 거죠." 이번엔 작은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곳엔 '훌륭함=1등'이라는 공식과 함께 개념 정리가 확실해서 나 같은 이방인이 끼어 들 틈이 없었다.
누가 이렇게 가르친 걸까? 아니 누가 이렇게 어린아이들에게 경쟁을 부추기고, 살벌하게 살아가도록 만든 것일까? 담즙이 올라오듯 입이 쓰고, 마음이 쓰다. 도대체 대한민국 교육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으며, 시선은 어디에 두고 있단 말인가? 뾰족한 가시가 목구멍에서 올라온다.
전쟁 같은 수업을 종강하는 날, 나는 또 한 번 뒤로 자빠질 뻔했다. 책걸이로 음료와 과자를 준비했다.
보이지 않는 억압에서 풀리는 해방감이었을까? 한 아이가 음료수를 상대방 친구에게 뿌리기 시작하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아이들이 음료수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마치 골프 우승자에게 샴페인을 뿌리듯 말이다.
야외도 아닌 교실 안에서. 경쟁의 고삐에서 풀린 아이들이 방향을 잃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순식간에 무법천지가 되어버렸다.
정약용 선생은 인생의 말년에 <소학>의 중요성을 재강조하면서 근본으로 돌아가는 삶을 역설했다. 근본이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람의 올바른 도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인생의 집을 지을 때 터를 닦고 재목을 준비해야 하는 초등학교의 시기에 인간교육의 기본이 무너진다면, 후에 아무리 좋은 집을 지으려고 해도 모래 위에 세운 집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는 경쟁이 아니라 어울리고, 함께하고, 도우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학습이 이뤄지고, 그것이 습관화되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는 교육이라면 '훌륭함 = 1등'이라는 어디에도 없는 공식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지식적으로 똑똑한 아이들은 많으나 근본을 아는 아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더불어 사는 사회, 공정한 사회를 강조하지만 이런 교육은 입시에서 밀려나 성과로만 성공 여부를 판단하니 당연 1등만 대접받는 세상이라는 것을 어린아이들도 아는 것이다. 일찌감치 패배와 절망을 알게 되고, 억울함에 분노하고, 낮은 자존감에 존재의 하찮음으로 자신을 비하하고 사랑하지 않으며, 독기를 품고 경쟁하려는 부정적 감정들에 싸여 있는 아이들에게 우린 어떤 소망과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앞으로는 근본이 몸에 배어 있는 어린이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해 주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지금 이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어 있을 것이다. 여전히 이 사회가 요구하고, 입시 교육의 희생자로 경쟁하느라 피로할 테지. 그 피로를 이기면서 승리하는 자가 훌륭한 것임으로 알고 오직 돌진, 오직 질주만 외치고 있을 테지.
수업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아이들, 그중 아직도 마음에 서늘하게 남아 있는 아이들에게 온기를 주고 싶었다. 현재의 교육 정책이 성적과 경쟁을 더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닌지, 그들이 쌓아 올린 바벨탑 안으로 아이들을 몰아넣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는 매의 눈으로 지켜봐야 할 것이다. 호기심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아이들 세계를 비좁게 만드는 맹목적인 경쟁 교육은 더 이상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올바른 어른들이 철저하게 간섭하고 감시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만난 아이들과 확연히 다른 교육 환경에서 인간다움을 배우는 아이들과 함께 이 시대를 공유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