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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금 May 05. 2021

너희들이 책 맛을 알아?

시니어 독서모임



- 나는 처음엔 책만 붙들면 5분 안에 잠이 들었어요. 책이 수면제인 것이죠. 호호.

- 나는 침침한 눈으로 더듬더듬 책을 읽지만, 다 읽고 나면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요.

- 손주, 손녀들이 책 읽는 우리 할머니가 짱이라며 엄지 척해줘요.






 2015년에 만들어진 시니어의 독서모임이 있다. 도서관에서 '작가와 함께하는 시니어 독서모임' 강좌에서 만난 인연들이다. 그분들의 평균 나이는 70세 정도로, 65세에서 80세가 넘은 노인들이 노인답지 않게 살아가는 모임이다. 처음 독서모임을 할 때만 해도 1년에 한 두 권의 책도 접하지 못하고 살아왔다고 한다. 사는 일이 바빠서, 힘들어서, 책의 재미를 못 느껴서, 눈이 침침해서, 손주 손녀 보느라고 등등의 이유들이 다양했다. 독서모임에 들어온 이유도 저마다 달랐다. 뒤늦게 지적 욕구가 발동해서, 손주 손녀들에게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도대체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알고 싶어서, 책을 통해 가족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지금은 시간의 여유가 생겨서.....


 책만 보면 잠이 쏟아진다는 독신 할머니는 읽기 쉽고 재밌는 그림 책부터 시작했다. 

- 오, 너무 재밌어요. 몇 번을 봐도 좋아요. 이렇게 재밌는 책이 있는 줄 몰랐어요.

독신 할머니는 세상의 눈이 아니라 독서의 눈이 떠지면서 뒤늦게 책의 재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책 읽느라고 밤을 세울 정도라고 한다. 어려운 책들, 두꺼운 책들도 겁내지 않고 성실하게 읽고 온다.

 현모양처로 살아온 살림꾼 할머니는 올해 83세가 되었다. 70세 후반에 시작한 책 읽기의 도전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할머니는 평생 권위적인 남편의 수족이 되어 일일이 챙겨주며 살아왔다. 그러나 독서모임을 하게 되면 남편 스스로가 챙겨야 하는 것들이 많은데, 그 눈치를 어떻게 넘겨야 할 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자식들이 엄마를 응원하고 지지해 주면서 남편은 스스로 권위를 내려놓아야 했고, 지금은 가장 많은 박수를 보내 주는 든든한 남편이 되었다. 낮이고 밤이고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싶어도 눈은 애석하게도 마음을 따라가지 못해 수시로 침침함과 싸워야 했다. 백내장 수술을 받고 나서는 글자의 선명함에 감격하고 또 감격하며 시원하게 읽어 내려갔다고 한다. 하지만 눈을 너무 혹사시켰는지 요즘은 또다시 아지랑이 피어오르 듯 아른거린다며 안타까워한다.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다 정년 퇴임한 외교관 할아버지는 국내의 책들을 접하면서 한국의 문학적 발전이나 사상, 가치관, 젊은 작가들의 자유로운 발상 등을 새롭게 인지하며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 것에 대단히 즐거워한다. 때론 외국의 사고방식과 우리나라의 사고방식을 비교, 분석해서 열심히 들려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손주 손녀 보느라 책 모임에 적극 참여하지 못하는 얌전이 할머니는 한 번씩 참여할 때마다 자신의 내면의 이야기를 책 내용에 빗대어 어찌나 성찰을 잘하는지, 듣는 이들에게 공감과 감동을 자아내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젊었을 때 배움을 놓친 친절한 할머니는 뒤늦게 배움의 길에 들어서 방송대학을 졸업하고, 인문학 강의를 찾아서 듣고, 유치원에서 동화구연도 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못 배운 게 한이 되어서 지금은 자신이 하는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한다. 독서 모임에도 열정적이고, 책의 내용을 넘어 더 필요한 부분들도 검색해서 확장시켜 온다. 독서도 공부처럼 해 오는 젊은 할머니다.

그 외에도 학교 선생님으로 정년 퇴임한 할아버지, 할머니. 북한 연구가로 책을 쓴 할아버지, 은행장으로 퇴임한 할아버지 등으로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12명이 모여 있다. 


 책 맛의 미각이 없던 시니어들은 맛있든 맛이 없든 일주일에 한 권씩 꼭꼭 씹어 드시더니 점점 미각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젊은 작가들의 난해한 책들도,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4차 산업혁명의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책들도, 죽음에 관한 책들도 그리고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쓴 두꺼운 '월든'도 아주 맛있단다. 어려워도, 낯선 소재여도 기꺼이 사유의 시간으로 발효시킨다. 몸은 늙어도 정신은 어느 3,40대 못지않는 왕성함과 인생 경험을 녹인 원숙함과 성숙함 그리고 지혜가 상상 이상의 맛을 만들어 내면서 내 부족한 입맛을 당당하게 채워주고 있다. 지금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너희들이 책 맛을 알아?


 <책은 도끼다> 저자 박웅현은 카프카의 '변신'에서 가져온 책의 의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이처럼 책은 "아!"하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하거나 고정관념을 깨뜨려 주고, 잘못된 지식이나 정보를 깨닫게 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깨어있게 하는 도끼 역할도 중요하지만, 잃어가는 인간적인 삶의 근간을 찾게 하고 따뜻하게 수용하고 생명을 품어주는 흙의 역할도 중요하다.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버무리고 맛깔나게 무쳐서 서로 다른 책 맛을 즐겁게 나누는 이들이, 바로 시니어 독서모임의 젊은이들이다. 그분들과 함께 하는 한 나도 늙지 않을 것이다.


 10주년을 향해 시니어 독서모임 가자! 

 아자 아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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