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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할망 Jun 14. 2024

느리게 걷다. 하루 산책(冊)-운수좋은 날

삼 년 전부터 해마다 5월에서 10월까지 한 달에 두 번씩이나(!) 한라산을 오르고 있다. 물론 한라산의 나비를 모니터링하기 위함이며 10년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엊그제 바다거북 한일 포럼에 참여한 뒤 목표를 조정해 버렸다. 체력이 다하는 그날까지로.      


일본의 바다거북 장기 모니터링은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바다거북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보호종으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마을 단위, 학교 단위로 이어지고 있고, 보호 활동을 병행하면서부터는 일본 해안을 찾는 바다거북의 수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 한다. 보호 활동이라 해서 뭐 대단한 캠페인을 하거나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어미 바다거북의 산란 시기에는 해변가의 모든 조명을 붉은색을 바꿔주는 것. 이는 바다거북이 거의 인지하지 못하는 가시광선을 알아낸 후에 생겨난 작은(?) 실천이었다. 일본 바다거북협의회 회장 마츠자와 씨에 따르면 현재 일본에서는 붉은바다거북은 2년, 푸른바다거북은 4년 주기로 번식 피크를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몇십 년의 장기 모니터링 데이터가 알려주는 정보는 이외에도 더 많을 것이다.     

사실 좀 부러웠다. 내 주변에는 제주의 오름을 좋아하고, 바다를 좋아하고, 야생화를 좋아하고, 한라산을 좋아하고, 심지어 나비를 좋아하는 이들까지 수두룩하지만, 매월 2번씩 한라산을 동행해 줄 이는 단 한 명도 없다(아직까지는). 그뿐만 아니라 하나의 생물종을 매년 같은 시기에 같은 동선으로 관찰하는 지루한 일에 남다른 의미와 사명감을 갖는 것을 대단히 미련하게 바라보면서 “너 돈 받고 하는 거?”라는 질문을 하며 안쓰러운 시선도 보낸다. 그래서 일본의 아마미오오시마의 마을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바다거북을 관찰하고 지켜내는 봉사 활동이 너무도 부러웠다.     


고독을 벗 삼아 오르는 6월의 한라산에는 국수나무, 노린재나무, 윤노리나무, 백당나무, 함박꽃나무, 민백미꽃 등 하얀 꽃이 가득했다. 덕분에 도시처녀나비는 한라산 아고산대에 피어 있는 모든 하얀 꽃을 순회하며 흡밀행동(꿀을 빨아먹는 행동)을 한다. 가끔은 핑크색의 쥐오줌풀과 노란색의 씀바귀 꿀도 좋아한다. 밥 대신 이번엔 빵~~~    

 

산행을 시작한 지 세 시간쯤 되었을까. 전에 없이 도시처녀나비의 식사 장면을 많이 찍는다고 잔뜩 흥분하다가 보리수나무 앞에서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나름 순발력을 발휘한답시고 손을 뻗어 안전하게 착지는 했는데 카메라 렌즈가 완전히 뽀사져버렸다(백만 원 가량의 렌즈를 아까워할 테니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많이 안 다쳤다.). 손보다 카메라가 먼저 땅에 닿아버린 것이다. 이 렌즈로 말할 것 같으면 야외 조사 때마다 쓰고 다니는 정동 모자와 함께 무려 7년을 함께해 준 유일한 동행자였다. 워낙 시력이 월등해서 함께 할 때마다 참으로 많이 믿고 의지했던 동행자였다.      


숨 고르면서 산을 오르라며 발목을 붙들어준 흰 꽃들을 탓하랴. 멋지게 포즈를 잡아준 도시처녀나비를 탓하랴. 카메라 뷰파인더에만 집중하고 돌길을 제대로 못 본 나의 가시거리를 탓해야지. 더 민첩하게 바닥으로 뻗지 못한 내 손바닥을 탓해야지. 귀신에 홀린 듯 도시처녀나비들을 하나하나 찾아낸 내 눈을 탓해야지.      

산을 더 오르기로 목표를 바꿨으니 렌즈는 다시 사야겠지? 사지 뭐. 새 렌즈가 올 때까지 뽀사져 버린 렌즈의 마지막 유작을 가슴 아프게 바라봐 주지 뭐. 그나저나 바다거북도 곤충이랑 비슷한 점이 있어 가까이하고 싶은데, 얘네들은 어떤 렌즈로 봐줘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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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꽃 중의 꽃이 돼버린 장미 덕에 우리는 꽃 하면 대개 붉은색을 떠올린다. 하지만 붉은색은 식물이 그들의 가장 큰 동반자인 곤충을 겨냥하여 개발한 색은 아니다. 곤충은 원래 붉은색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곤충의 행동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은 붉은 등을 켜놓고 관찰과 실험을 한다. 붉은 등 아래에서 그들은 전혀 빛을 의식하지 못해 평상시처럼 행동하고, 우리는 그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수 있다. 우리 인간은 붉은색에서 보라색까지 볼 수 있다. 곤충은 붉은색을 보지 못하는 대신 보라색의 바깥에 있는 자외선을 볼 수 있다. 우리와 이른바 가시광선의 범위가 다르다.

- 알이 닭을 낳는다, 최재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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