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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워터밤과 스테이크, 일몰

행복은 빈도

by 최형주

발리에서의 첫 아침. 전날의 피로 덕분인지 낯선 곳에서도 꿈도 꾸지 않는 편안한 잠을 자고 개운하게 일어났다. 지혜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주요 일정인 워터밤을 제외하고 다른 갈만한 곳이 무엇이 있는지 아침부터 인터넷을 뒤지고 있었다. 아침에는 느지막이 일어나 침대에서 뭉그적대는 것이 정석인데 발리에서는 지혜나 나나 일찍 일어났다. 이날 하루만 그런 것이 아니라 8박 발리 일정 모두. 우리를 침대에 붙잡아두는 것은 피로나 졸림이 아니라 출근에 대한 거부감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일어나서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즐거운 날에는 굳이 깨우지 않아도 일찍 일어난다.


지혜가 침대에 기대 누워서 검색을 하며 말했다.

“근처에 괜찮은 카페가 있는데 아침도 한 대. 가볼까?”

이제 막 잠에서 깬 내가 말했다.

“좋지. 근데 지금 몇 시야?”

“8시. 9시에 워터밤이 오픈하니까, 8시에 가서 커피 한잔하고 간단하게 아침 먹으면 딱인 거 같은데.”

“어차피 워터밤까지 걸어가야 되니 그 근처에 가서 아침 먹는 게 어때? 가는 길에 괜찮은 곳 보이면 들어가도 좋고.” 하고 내가 말했다.


이날의 주요 일정은 워터밤이었다. Waterbomb가 아니라 Waterbom으로 발리의 워터파크다. 발리에 가서 무엇을 할지 거의 찾지 않았는데 몇 개 찾은 것 중 하나가 워터밤이었다. 세계 대표 관광지인 만큼 워터파크의 규모도 크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워터파크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기에 비교는 못 하겠지만. 정오가 넘어가면 햇빛이 세져서 더워지니 그전에 오픈 때부터 가서 신나게 즐기자,라는 것이 계획이었다.


길을 걷다 마주친 석상

간단히 씻고 나와서 숙소를 나섰다. 아직 아침인데도, 축축해지고 더워지려는 것이 느껴진다. 발리는 일 년 내내 덥고 습한 사바나 기후에 속하는데, 평균 습도가 무려 78%에 평균 기온 22~34‘C다. 발리 숙소에는 개인 수영장이든 공용 수영장이든 수영장이 딸려 있는 곳이 굉장히 많은데, 하루 만에 그 이유를 알아챘다. 그 더위와 습도에서 오는 불쾌함을 날려버릴 수 있는 유일한 시설이 수영장이다. 첫 2박을 하는 숙소에는 공용 수영장이 두 개가 있었다. 아침에 숙소를 나설 때 수영장을 한창 청소하는 중이었다. 매일매일 청소를 하는 것을 보니 깨끗해 보이는데, 나중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서 워터밤은 걸어서 20분 정도가 걸렸는데, 가는 길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곳곳의 보도블록은 깨져 있었고 인도는 좁거나 없었다. 그래도 야자수가 있는 거리, 힌두교의 신들의 석상, 이국적인 분위기는 우리에게 여행의 시작이라는 느낌을 들게 했다. 이곳저곳을 찾다가, 마침 지금 오픈하는 워터밤 근처의 카페를 찾았다. 발리에서 아침으로 자주 먹는다는 요거트볼을 각자 하나씩, 그리고 커피도 시켰다. 색색의 화려한 비주얼이 발리스러운, 간단한 아침으로 제격인 음식이었다.

IMG_6320.JPG 요거트볼

오픈 전에 대기하다가 9시가 되자마자 바로 입장했다. 우리처럼 기다리고 있는 관광객들도 몇 명 있었다. 이곳에서는 입장을 할 때 돈을 팔찌를 주고, 그 팔찌에 돈을 충전할 수 있다. 내부 식당을 이용하거나 로커 대여료를 낼 때 팔찌의 돈을 사용하는 편한 시스템이다. 입장해서 옷을 갈아입고 놀이 기구들을 탔다. 워터밤에는 열 가지가 넘는 워터슬라이드가 있다. 튜브나 보드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면 미끄럼틀 시작점에 직원이 대기하고 있다. 보통은 그 앞에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는 데, 오픈하자마자 들어가서 기다리는 시간 없이 계속 탈 수 있었다. 빙글빙글 돌면서 내려가는 것, 천천히 내려가다가 갑자기 떨어지는 녀석, 내려가는 힘으로 반대쪽 끝까지 쭉 올라갔다가 다시금 떨어지는 녀석 등 다양한 미끄럼틀이 있다. 튜브나 보드 없이 맨몸으로 수직낙하하는 미끄럼틀도 있다. 서너 개쯤 타고 다음에는 무엇을 탈까, 하면서 걷다 보니 바비큐 냄새가 우리를 유혹했다. 홀린 듯이 이끌려가서 바비큐 이것저것이 담긴 그릴 콤보와 맥주 한 잔씩 시켰다. 물놀이 후의 간식은 참을 수 없다.

그릴 콤보

숯불 향이 가득한 치킨 다리를 뜯으며 지혜가 말했다.

“내가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행복은 빈도래.”

“빈도?”

“그래 빈도. 크기가 아니라, 빈도. 큰 좋은 사건 한 번 보다, 소소한 좋은 일들이 반복되는 게 더 행복하다는 거지. “

나는 맥주를 마시며 생각했다. 행복은 빈도다.

“어차피 행복의 총량이 비슷하다면 작은 것 여러 개가 큰 것 하나보다 낫다는 말이지?”

“그래. 바로 그거야. 이것저것 조금씩 사 먹는 야시장이 재미있는 이유지. 지금도 우리 둘이 있으니까 메뉴 하나 나눠 먹으면서 맥주 마실 수 있잖아? 그러면서 몇 시간 뒤에 다시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단 말이지. 만약에 혼자였어 봐. 메뉴 하나 다 먹으면 배불러서 점심을 제대로 못 먹을 수 있다고. 그러면 먹는 즐거움의 빈도가 줄어들잖아. 그거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는 소리지.”

혼자 다니는 것보다 둘이 다니는 것이 심리적 안정을 제외해도 좋은 점이 많다. 나눠먹으며 음식을 다양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소소한 장점 중 하나다. 정말이지 솔로에게 힘든 세상이다.


바비큐와 맥주를 먹으며 삶의 진리를 깨달은 후, 다시 기구를 타러 갔다. 좋았던 것을 한 번 더 타기도 하고, 익스트림 레벨이 높은 기구를 타기도 하면서 대부분의 미끄럼틀을 탔다. 너무 갑자기 쑥 떨어지는 미끄럼틀은 타지 않았다. 무서워서도 있는 데, 올라가는 데 걸리는 시간에 대한 보상이 너무 짧게 주어진달까. 계단을 5분간 올라가는데, 10초 내려가면 끝이다. 올라가는 시간이 아깝다. 그렇게 이것저것 즐기고 나니 슬슬 시간이 지나서 사람들이 제법 보이기 시작했다. 기구에도 대기 시간이 생기자 우리는 그만 타고 워터밤 중앙에 있는 수영장으로 갔다.


수영장 근처의 선베드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로커에 넣어둔 와이파이 도시락과 스마트폰도 가져와서 누워서 놀았다. 하늘은 청량한 열대림 속. 날씨는 덥고 습하지만 근처에 수영장이 있다. 그 주변에 누워서 하늘을 보니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이런 곳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워터밤의 하루 입장료도 4만 원. 우리가 지금 예약한 수영장 딸린 깔끔한 숙소도 1박 3만 원 내외다. 위치를 조금 더 번화가에서 떨어진 쪽으로 하고, 몇 개월 단위로 예약한다면 훨씬 싸겠지? 음식도 번화가는 7-8천 원인데, 조금만 떨어져도 5천 원 미만으로 충분히 가능하고 직접 만들어 먹으면 훨씬 싸게 먹힐 것이 분명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옆의 선베드에 누워있는 지혜에게 말했다.


"우리 둘이 각자 한 달에 100만 원씩만 벌면 이런 곳에서 평생 살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얼마나 재밌을까?"

지혜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그게 쉽나. 우린 여기서 경제 활동도 못하고. 나중에 은퇴하고 각자 연금이 그렇게 나오면 이런 곳에서 살면 좋겠네."

"서핑도 배우고, 선베드에 누워서 책이나 읽으면서 말이지."

"연금 100만 원씩 나오려면 얼마나 일해야 하려나. 주식 배당금 매달 100만 원씩 받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르겠네."

"그러다 다 잃고 평생 일만 하는 건 아닐까?"

이런 실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문득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훗날의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사이구나,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왠지 가까이 다가와서 괜스레 기분 좋고 간지러워졌다.


선베드에 누워 있다가 더워지면 수영장에 들어가고 일광욕하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다 수영장 옆에 딸린 바에 갔다. 무려 수영을 하면서 칵테일을 주문해 마실 수 있는 그런 구조다. 아래 사진의 맨 왼쪽을 보면 있는 오두막에 사람들이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거기가 ‘풀 바’다. 크레이지 코코넛이라는 칵테일을 주문했다. 코코넛 속을 파내서, 테킬라와 보드카, 진, 콜라, 코코넛 주스 등으로 채워서 만든 맛이 없을 수 없는 칵테일이다. 칵테일을 마시다가, 등이 햇빛으로 뜨거워지면 다시금 물속으로 들어가고, 다시 나와서 한 모금하면서 발리를 만끽했다. 이런 호사를 한국에서 누리려면 도대체 얼마나 지불해야 할까?


그렇게 휴식을 취하다 과일 스무디도 마시고, (과일이 달지 않아도 스무디는 맛있다. 설탕이 잔뜩 들어갈 테니.) 기구를 몇 개 더 타다 보니 오후 1시가 되었다. 서서히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몇몇 기구들에는 길게 줄이 늘어섰고, 풀장의 물이 사람들의 체온과 뜨거운 햇빛으로 인해 미지근해졌다. 슬슬 배도 고파져서 점심을 먹기 위해 그만 나가기로 했다. 우리는 ‘오픈 시간에 맞춰 들어와서 여유롭게 이것저것 즐길 수 있었다’,라며 발리에서의 첫행보를 자평하며 숙소로 향했다.


워터밤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20분 남짓에 불과했지만, 발리 오후 1시의 더위를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햇빛을 받으며 걸으니 옷의 물은 금세 말라버리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낮이라면 짧은 거리라도 그랩(택시 앱)을 부르자고 지혜와 나는 의견을 모았다. 숙소에 도착하니 수영장에 사람이 몇 명 들어가 있었다. 방금까지 네 시간 동안 워터파크에 있다 왔음에도 불구하고, 20분간 걷고 나니 다시 수영장에 뛰어들고 싶어졌다. 방에서 땀만 씻어내고 수건을 가지고 나와서 바로 수영장으로 향했다. 수영장에 누워 둥실 떠다니며 하늘을 보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난 수영을 하지 못한다. 지혜는 수영을 곧잘 해서 배영으로 또 자유형으로 마음껏 헤엄쳤다. 그렇게 더위를 날려버리고, 그랩을 이용해 점심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한국에서는 주로 카카오택시 앱을 사용하는데, 그랩이 카카오택시보다 좋은 점이 한 가지 있다. 이동거리에 따라 금액이 결정된다는 거다. 교통상황이 어떻든 상관없이 거리에 따라서만 결정돼서 고민 없이 이용할 수 있다.)


점심 메뉴는 스테이크였다. 발리는 호주 바로 위에 위치하기 때문에 호주와 교류가 많다고 한다. 호주에서 발리행 비행기도 저렴하고, 호주에 비하면 물가가 아주 싼 편이라 호주인들이 많이 온다. 덕분에 호주 소고기도 꽤나 들여와 소고기도 싸고, 인건비도 낮아 가게에서 스테이크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다. 이날은 티본스테이크와 폭립을 주문했다. 티본스테이크는 발리에서 만 오천 원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발리 음식점의 고질적인 문제인 늦게 나온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지혜와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맥주부터 달라고 했다. 플리즈 비어 퍼스트, 하고 몇 번을 말했는데 종업원이 잘 알아듣지 못했다. 손짓 발짓으로 몇 번을 해서 겨우 맥주를 먼저 받을 수 있었다.


시원한 빈땅 맥주

“발리는 대부분 관광객이 주 수입원이니까 영어를 대부분 하는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가 봐?”

간신히 맥주 주문에 성공하고 지혜가 말했다.

“그러게. 이런 곳에서는 영어를 잘하면 꽤나 대우를 좋게 받을 텐데. 영어는 유튜브 같은 걸로 배우기도 쉽고 말이야. 호주랑 가까우니 접하기도 쉬울 거고."

딱히 영어 못 해도 관광객 상대 장사하는데 큰 상관없으니 그런 걸까, 아니면 발리가 영어를 배우기 어려운 상황인 걸까.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호텔 같은 곳에 가서 그럴지도.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맥주가 나왔다. 맥주병을 근처까지 가져와서 직접 따는 걸 보여준 다음, 냉장고에 넣어두어 차갑게 해 둔 맥주잔에 따라주었다.


이처럼 발리 음식점들은 하나같이 서비스가 좋다. 대신 서비스 차지가 따로 부가된다. 메뉴판에 적혀있는 가격에 세금과 서비스 비용이 각각 10~15%가 붙는 가게들도 많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앞서 스테이크 가격에서 알 수 있듯이 저렴하다. 많이들 아는 인도네시아 음식인 나시고렝(볶음밥)이나 미고렝(볶음국수)은 가게에서 3~4천 원이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정도의 물가다. 마트에 갔을 때는 그 정도로 물가가 싸지는 않은 것을 보면 확실히 인건비가 아주 싼 것이 아닐까 싶다. (이 글을 쓰는 지금 검색해 보니 주에 따라 다르지만 20~30만 원이 최저 ‘월급’이다. 호주의 최저 ‘시급’이 2만 원이 훌쩍 넘는 것을 생각하면, 소고기 가격이 같다고 하더라도 가게에서 스테이크 가격이 대여섯 배가 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창가 테라스 자리에 앉아 밖의 거리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거리에는 수많은 오토바이와 차가 지나갔다.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무더운 날씨 때문이기도 하고 걷기 어려운 도로 환경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여행지에서는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그 나라의 독특한 분위기를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데, 발리는 도저히 그럴만한 환경이 아니다. 장소에서 장소까지는 택시로 이동하고, 중간중간에 수영장도 한 번씩 들어가 주고, 더울 때는 맥주를 꾸준히 마시는 정도로 발리를 즐기는 것이 베스트다. 우리도 맥주를 마시고 스테이크를 기다리며 다음 장소를 물색했다. 아침부터 수영하느라 지치기도 했고, 점심을 먹고 나면 노곤해질 테니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마사지 가게를 찾을 때는 지혜가 알려준 한 가지 팁이 있다. 바로 직원 유니폼이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니폼을 갖춰 입은 곳일수록 체계적이고 (이것저것 하는 어수룩한 곳이 아니라) 전문 마사지숍일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다. 이 팁을 포함하여 구글 지도의 리뷰를 보며 괜찮은 곳을 찾았고, 그동안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티본스테이크는 딱 생각하는 그 맛이다. 호주산 소고기를 사용하니 발리라고 특별히 소고기가 더 맛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숙성이나 소스가 있는 그런 가게도 아니니 당연한 소리다. 맛이 없는 게 아니다.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한국 가격 절반 이하에 이렇게 실컷 먹을 수 있다니, 발리에 산다면 일주일에 몇 번은 올 정도다. 폭립도 마찬가지다.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 같은 패밀리레스토랑이나, 대형 마트의 델리 코너에서 살 수 있는 바로 그런 폭립이다. 뼈에서 스르륵 떨어지는 부드러운 고기와 달고 시고 찐득한 양념의 맛이다. 물놀이를 하고 온 것도 있고, 맥주만 마시며 빈속에 30분 넘게 기다린 것도 있어서 스테이크와 폭립이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해치웠다. 다만 약간 아쉬운 점이 있다. 폭립은 맥주와 찰떡인데 스테이크는 그렇지 못하다. 스테이크와 같은 고기 오브 더 고기는 버번위스키나 레드 와인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발리는 이전에 말한 것처럼 주류 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지 않아 스테이크 하우스에도 맥주뿐이다. 가끔 와인이 있는 곳도 없지는 않은데 가격이 아주 사악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정도. 아무리 그래도 고기는 고기다. 만족스럽게 깨끗이 해치웠다.


계산을 하고 그랩을 불러 마사지숍으로 향했다. 지혜는 이전에 필리핀 어학연수나 태국 워크캠프 등 수차례의 동남아시아 경험이 있다. 그런 여행 경험에서 마사지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거기다 최근 지혜는 카페 일을 하면서 생긴 족저근막염 때문에 한국에서도 도수치료를 몇 번 받았다. 한국에서는 도수치료든 마사지든 보험이 안 되면 회당 7-8만 원은 하는데 발리에서는 1~2만 원이면 충분하다. (물론 도수치료와 마사지가 다르지만 지혜가 느끼기에는 비슷하다고 한다.) 그래서 지혜는 발리에 가면 1일 1 마사지를 받을 것이라고 계획했다. 나는 발리 이전까지는 동남아시아 여행을 가본 적은 없고 마사지를 받은 경험도 없다. 이번 여행에서는 5번은 넘게 마사지를 받았는데 모두 특별하고 편안한 경험이었다. 여행은 많은 경우 낯선 곳에서 행하는 능동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지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마사지숍에 가서 한 시간씩 누워서 마사지를 받으면서 잠시 잠에 들게 되면, 심신 양면으로 회복할 수 있다. 내가 추천하는 시간은 오후 2시 정도다. 점심과 저녁 사이 맛있는 점심을 먹고 배가 불러 노곤할 때다. 햇빛이 강해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는 힘든 그런 시간에, 에어컨이 빵빵하고 좋은 향이 맴도는 마사지숍에 가는 거다. 전신 마사지 (1시간 ~ 2시간 코스)를 신청하면 먼저 발을 씻겨준다. 그러고 나면 별도의 방으로 안내받고, 옷을 모두 갈아입고 침대에 엎드린다. 얼굴 모양의 구멍이 있어 편하게 엎드릴 수 있다. 그렇게 편안하게 누워 마사지를 받다 보면 자연스럽게 반수면 상태가 된다. 몸을 돌리라는 안내에 비몽사몽 한 상태로 몸을 돌리고 다시금 잠에 빠진다. 다 끝났다는 말과 함께 깨우고는 마사지사 분들은 자리를 뜨고, 우리는 기지개를 피우며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노곤했던 정신은 개운해지고, 낯선 곳에서의 피로도 풀린다. 전신 마사지가 부담스럽거나 시간 여유가 없다면 30분 정도 걸리는 발 마사지만 받는 것도 좋다. 여행의 피로는 주로 발에 축적되기 마련이고 30분 정도만 눈 감고 일어나면 충분히 정신이 맑아진다. 그렇게 리프레시를 하고, 다시금 일어나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 것이다. 여행객의 입장이 아니라 여행지의 입장에서도 아주 좋은 시스템이 아닐까. 여행자가 피곤해서 집에 누워있는 것보다는 빨리 회복해서 돌아다니는 것이 더 돈이 될 테니.


내 첫 마사지인 이날의 마사지 또한 아주 쾌적했다. 장시간 비행기 여행과 물놀이의 피로가 씻기는 듯했다. 바닷가에 누워서 햇볕을 쬐며 잠에 든 바다사자처럼 편안한 기분으로 1시간 동안 휴식을 취했다. 마사지숍의 위치는 쿠타 해변 근처였고, 마사지를 받은 후 해변가까지 걸어갔다. 마침 일몰시간이 가까워졌기에 바닷가에서 일몰을 보고 가자고 결정했다. 하드 락 카페라는 유명 체인 레스토랑의 테라스에 앉아서 칵테일을 마시며 일몰을 봤다. 일몰은 큰 감흥은 없었다. 일몰을 잘 보려고 테라스에 앉았는데 햇빛이 따갑기도 했고.


여행지에서 일출과 일몰을 보는 여행상품들이 제법 많다. 발리에서도 산 위에서의 일출 투어와 바닷가에서 시푸드를 먹으며 즐기는 일몰 투어가 있다. 생각해 보면 일출과 일몰은 어디서든 볼 수 있다. 해는 어디서든 뜨고 진다. 그렇지만 일상을 살아갈 때는 그런 사건들에 그다지 집중하지 않는다. 그런 여유가 없고, 또 언제든지 볼 수 있는 당연한 것이라 여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따져보면 다를 것이 없다. 2023년 5월 8일은 영영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발리에서의 날들과 마찬가지로, 그 어떤 하루도 반복되지 않는다. 그 어떤 하루도. 이 사실이 어떨 때는 ‘매일매일을 소중히 여기며 살자.’라는 활기찬 깨달음으로 오지만, 어떨 때는 참을 수 없는 무거움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하루하루가 그토록 소중한데, 나는 왜 그 수많은 시간을 허투루 낭비해 버린 걸까?’ 그럴 때, 삶의 무거움이 나를 짓누를 때 지혜에 대해 생각한다. 지난 30년간의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 끝에 지혜를 만났다. 30년이 전혀 아깝지 않다. 오히려 덤으로, 최신 스마트폰과 학사 석사학위와 맥주 정도는 사 먹을 수 있는 약간의 돈도 얻었다. 이 정도면 꽤나 훌륭한 결과가 아닌가?


일몰을 보고 나서, 근처의 큰 쇼핑몰을 구경하는 것을 이날의 마지막 일정으로 정하고 바닷가를 걸어가기로 했다. 신발을 손에 들고 지혜와 함께 맨발로 바닷가를 걸었다. 하늘의 해와 바다에 비친 해의 데칼코마니, 수평선, 바닷가를 뛰노는 아이들과 강아지들. 왜 사람들이 발리의 바닷가를 찾아오는지 알 수 있는 풍경이었다. 쇼핑몰엔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해외 브랜드 제품들은 발리 물가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싸, 한국에서 사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쇼핑몰 지하의 마트에서 맥주 몇 캔과 과자 조금을 사서 택시를 타고 방으로 돌아왔다. 행복이 빈도라면, 오늘은 어느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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