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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결혼기념일

추억을 기록하기

by 최형주

열대우림 한가운데서 잠이 깼다. 결혼기념일 당일이다. 보통 결혼기념일은 결혼식을 한 그날이 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지혜와 나는 결혼식을 하지 않았기에, 결혼기념일을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물론 법적으로는 혼인신고를 한 날이 되겠지만 기념이야 우리 둘 마음대로 하는 것이니까. 그것을 이 날로 정했다. 3월 27일. 지혜와 내가 연애를 시작한 날로부터 정확히 4년 후인 2023년 3월 27일을 우리의 결혼기념일로 지정했다. 결혼기념일이라는 날이 다른 부부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모르겠다. 생일이나 제사처럼 결혼기념일에도 응당해야 하는 행위들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결혼기념일에 한 가지 하고 싶은 것은 있다. 모든 결혼기념일을 색다른 장소에서 보내고 싶다. 다른 날들과 달리 나와 지혜의 의지로 선택하고 결정한 날이 결혼기념일이다. 생일이나 제삿날은 내가 결정할 수 없지만, 결혼만은 개인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자유로운 우리의 선택이 괜찮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로, 그리고 그것을 기억에 강렬하게 남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매년 색다른 장소에서 기념하고 싶다. 첫 결혼기념일은 발리에서 보냈다. 두 번째 결혼기념일도 무리 없이 가능할 예정이다. 조만간 해외 장기 여행을 계획하고 있고, 내년 3월이면 세계 어딘가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부터는 잘 모르겠다. 나와 지혜가 어떤 일을 어디에서 하고 있을지 아직 모르니까. 그래도 어떻든 간에 둘 사이가 원만하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첫 결혼기념일 아침 지혜와 나는 요가를 했다. 훌륭한 자연을 배경으로 요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발리의 이미지인 듯했다. 지혜도 발리에 가면 요가를 하자고 주장했었다. 이런 사람들의 수요를 잘 알고 있기에 호텔에는 당연히 요가 매트가 구비되어 있었다. 수영장 앞에 매트를 깔고, 태블릿 PC로 아침 요가를 검색해 틀어둔 후 자세를 따라 했다. 아침 공기는 상쾌하고 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이라 적당히 서늘했다. 수영장에 들어가기는 살짝 춥고 반팔만 입고 요가를 하기엔 딱인 그 정도의 기온이었다. 그런 상쾌한 공기 속에서 요가를 했다. 물론 하나도 따라 하지 못했다. 뻣뻣한 내 몸으로 따라 할 수 있는 동작은 마지막 자세인 편히 눕는 자세뿐이었다. 대부분의 동작을 따라 하지는 못했지만, 웃으면서 즐겁고 색다른 시간을 보냈다. 열대 우림 속에서, 잠이 아직 덜 깨 몽롱한 상태로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행위는 하루를 산뜻하게 시작하기에 딱인 활동이었다.


곧이어 아침식사가 왔다. 바구니에 빵과 샌드위치, 과일과 음료를 가득 담아서 수영장 위에 둥둥 띄워주는 플로팅 조식이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수영장에 들어가기에는 살짝 추운 날씨라 둥둥 떠다니는 바구니를 얼른 수영장에서 꺼낸 후 먹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 다들 수영장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고 떠다니는 조식을 먹는 걸까? 라며 수영장에 발만 담그고 서로 이야기했다.


무자르 냣-냣

어제저녁에 갔던 식당에 다시 방문해 점심을 먹었다. 치킨 윙과 새우, 그리고 발리 전통음식 무 자르 냣-냣 (Mujair Nyat-Nyat)을 먹었다. 발리 인근에서 많이 잡히는 틸라피아를 발리의 허브와 향신료와 함께 굽거나 튀긴 생선요리다. 발리의 로컬 푸드로 나시고렝(볶음밥)이나 미고렝(볶음면) 혹은 사퇴(꼬치구이)는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생선요리도 꽤나 발리에서 많이 먹는 음식이라 한다. 짭짤한 소스와 쌀밥과 흰 살 생선의 조합은 익숙하고 훌륭하다.


점심을 먹고 주변을 산책하고 호텔로 다시 돌아왔다. 우붓이 다른 지역보다는 서늘하다고 하지만 낮에는 마찬가지로 뜨겁다. 한 시간도 채 걷지 않았는데 몸이 뜨겁다. 달궈진 몸을 호텔 메인 수영장에서 식히고 칵테일도 한 잔 마셨다. 선베드에 누워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발리는 적도에서 살짝 남쪽에 위치해서 이처럼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쏟아지곤 한다. 방으로 돌아와 프라이빗 야외 수영장 앞 선베드에 누웠다. 발리 우붓에서의 기억을 한 장면으로 나타낸다면 바로 이때가 아닐까 싶다. 눈앞에 야자수들이 가득하고, 비로 인해 따듯해진 날씨에, 비 내리는 소리를 안주 삼아 위스키를 홀짝였다. 아무 시선도 신경 쓸 필요 없는 공간에서 가운만 걸치고 선베드에 누워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다 낮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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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쯤 일어나 마사지를 받았다. 그다지 몸이 피곤한 상태가 아니라도 마사지는 언제나 좋다. 마사지를 받는 동안 저녁이 방 안에 준비되고 있었다. 미리 예약한 캔들라이트 디너다. 방 안의 프라이빗 수영장 앞의 테라스에 양초와 꽃잎들로 장식된 아름다운, 그리고 결혼기념일에 딱 맞는 저녁식사였다. 로맨틱한 공간에서 저녁식사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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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점심을 먹고 선베드에 누워서 쉬는 동안, 결혼기념일에 무엇을 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이 글의 맨 처음에 말한 것처럼 매년 결혼기념일을 색다른 장소에서 보내는 것과 함께, 둘만의 기록을 남기자는 생각을 했다. 매년 결혼기념일에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들로 서약문을 쓰고 서로 읽으며 그 장면을 녹화하는 것이다. 올해의 첫 결혼 서약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갔다. 서로 부부가 되기로 맹세하고, 언제나 행복하고, 오래오래 함께하고, 서로 사랑하기로 약속하기. 결혼 첫해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는 그 자체이기에. 내년, 내후년, 10년 후에는 어떤 말을 나누게 될지 궁금하다.


지혜와 나는 만난 지 4년이 되었다. 그동안 봉화, 강원도, 여수 등 여러 국내 여행도 다니고, 일본 여행도 갔고, 이곳저곳 맛집 탐방도 하고, 같은 책도 여러 권 읽고, 영화와 드라마를 함께 감상했다. 서로의 친구들을 만났고, 내가 훈련소에 가는 것을 지혜가 지켜보았고, 같은 날에 코로나에 걸리기도 했다. 포항과 서울에서 지혜와 내가 다니던 거리를 걷다 보면 이전의 추억들이 떠오르곤 한다. 그동안 나와 지혜가 즐긴 책과 영화, 드라마, 음식과 술, 그리고 함께 있던 공간들은 둘만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하나하나 소중한 추억들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날들에는 이보다 더 행복하고 찬란하고 생생한 경험들이 기다리고 있다. 발리 여행이 끝난 후에는 세계 여행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 후엔 둘만의 집을 구해 그곳에서 추억을 쌓아갈 것이다. 그동안의 일상들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지혜와 나는 어떤 경험들을 하게 될까.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궁금하고 설렌다. 그리고 아쉽다. 그것들이 잊히게 된다는 것이. 설령 잊히는 것이 당연한 자연의 섭리라 하더라도 최대한 늦추고 싶다. 반항하고 싶다. 그렇기에 이렇게나마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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