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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발리로 떠나다

여행엔 역시 낮술

by 최형주

발리로 가는 첫날. 오전 3시에 일어나 자정이 다 되어서야 침대에 누울 수 있었던, 긴 하루였다.


발리는 인도네시아의 섬 중 하나로,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 걸쳐져 있는 섬나라다. 무려 17000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발리는 가장 관광객이 많은 휴양지이다. 발리에서 관광객이 많이 찾는 지역은 두 가지로 나뉜다. 에메랄드빛 해변에서 일몰을 보고 서핑을 즐기는 남부(스미냑, 쿠타, 누사두아 등)와 열대 우림 속에서 휴양하는 우붓 지역이다. 발리 공항은 남부 지방에 있는데,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라 인천에서도 직항 노선이 있다. 우리는 직항을 이용하지 않고 싱가포르를 경유해 발리로 향하는 비행기를 이용했다. 여행사를 끼지 않고, 액티비티나 투어 프로그램도 예약하지 않고, 숙소는 8박 중에 공항 근처에 2박, 우붓에 2박만 예약하고 나머지는 정하지 않은 채 발리로 출발했다.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는 오전 9시에 출발했다. 시간에 맞춰가기보다는 아침 일찍 가서 마음 편히 준비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6시 전에는 공항에 도착하자고 계획했다. 오전 3시에 일어나 샤워를 했다. 이제 비행기를 타면 도착할 때까지 하루 종일 샤워할 수 없으니 평소보다 더 깨끗하게 씻었다. 미리 알아본 바 집 근처에서 공항버스를 탈 수 있어서, 4시 30분에 탑승했다. 가격이 15000원 정도로 비싸긴 한데,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새벽에도 한 번에 공항까지 가고, 좌석도 넓고 편해서 이용할 만하다. 공항에는 6시쯤 도착했다. 발리에서도 인터넷 세상에 접속하기 위해 예약한 와이파이 도시락을 수령하고, 수하물 수속하고, 티켓을 받아 출국 수속을 마치고 면세지역으로 들어가니 7시였다. 선글라스와 화장품 등을 면세점 예약해 둔 것이 있어 수령하고, 술도 두 병 샀다.


발리에서는 주로 빈땅 맥주를 먹는다. 일주일 동안 20병은 먹지 않았을까.

인도네시아는 술이 아주 비싸다. 인도네시아는 2.7억 인구 중 88%가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 국가로, 그중에서도 특히 주류에 대해서는 아주 강경한 편이다. 최근 여당에서 금주 법안을 발의했을 정도다. 물론 발리는 관광객이 주로 찾는 휴양지인 만큼 금주령이 시행되지는 않겠지만 주류세만큼은 아주 높다. 발리 내에서 음식점을 가면 메뉴 하나당 2~5천 원 정도로 싼데, 맥주 한 병은 4-5천 원씩 받는다. 도수가 높은 술도 마찬가지고, 그것들을 재료로 사용하는 칵테일도 기본 만 원이다. 술 가격만 보면 우리나라와 비슷한 정도의 가격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은 주류세가 높아서 도수가 높은 술(소주, 위스키, 브랜디 등의 증류주)이 비싸다. 그래소 한국의 애주가들에게는 해외여행이 싼값에 다양한 술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하지만 발리는 앞서 말한 이유로 인해 이 즐거움을 느릴 수 없는 곳이다. 마트에서도 위스키를 한국보다 더 비싼 값에 파는 것을 볼 수 있고 한국보다 종류도 적다. 주류 문화 자체가 적다. 그래서 발리 음식점에서는 시원한 맥주 정도를 즐기고, 숙소 안에서는 면세점에서 산 술을 홀짝이기로 했다. 그것을 위해 보모어 15년 위스키 한 병과 리몬 첼로 레몬 리큐어 한 병을 샀다.


여유롭게 공항에 도착했기 때문에 면세점을 둘러보고도 시간이 제법 남았다. 비행기에 타면 기내식을 준다지만, 그래도 배가 허전해 소시지 빵 하나와 커피 한 잔을 사서 지혜와 나누어 먹으며 잠시 쉬고 비행기를 탑승했다. 비행기 좌석은 맨 뒷좌석으로 예매했다. 일반적으로 비행기의 좌우 좌석은 3칸이다. 그래서 둘이 여행할 때 모르는 사람 한 명과 같이 타게 되는데, 화장실을 가거나 할 때 불편하게 된다. 그런데 맨 뒷좌석의 좌우는 3칸이 아니라 2칸이기 때문에 두 명이서 편하게 탈 수 있다. 화장실 바로 앞이고, 음식을 가장 늦게 받는다는 점이 단점이기는 한데 우리는 그 단점보다 둘 만 있다는 편안함이 더 컸고, 결과적으로 훌륭한 선택이었다. 인천-싱가포르, 싱가포르-발리 모두 싱가포르항공을 이용했다. 인천에서 싱가포르는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 45분까지인데, 시차가 1시간 존재해 비행시간은 대략 7시간 정도다. 좁은 좌석에서 가만히 7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출국 며칠 전에 아이패드에 전자책을 세 권 구매해서 다운로드했다. <테레즈 데케루>와 <롤리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었다. 책 내용을 모른 채로 구매했는데 실패한 선택이었다. <테레즈 데케루>는 남편을 독살하려다 실패하는 이야기고, <롤리타>는 소아성애자인 남성이 이상형인 어린 소녀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그 소녀의 부인과 결혼하는 내용이다. 둘 다 신혼여행에서 읽을만한 책은 아니다. <테레즈 데케루>는 너무 재미있어서 무슨 책이지? 하고 잠시 보다가 출국 전에 다 읽어버렸다. <롤리타>는 문체든 내용이든 너무 적나라해서 누군가 지나가다가 흘깃 본다면, ‘아니에요, 이 책은 변태들이 읽는 책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품고 있고 문학적 의의가 있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변명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책이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재미가 없어 책장을 넘기기 힘들었다. 어쨌든 미리 산 책이 모두 효용을 잃어버려서 얌전히 오프라인 다운로드를 해 둔 유튜브를 봤다. 낮술을 하면서.


싱가포르 슬링과 크래커

비행기에서는 대부분 요청하면 간단한 주류를 준다. 와인이나 위스키, 혹은 스크루 드라이버 같은 간단한 칵테일이다. 지혜가 알아본 바 싱가포르항공에서는 ‘싱가포르 슬링’이라는 칵테일이 유명하단다. 진 베이스에 체리, 파인애플 주스를 섞은 간단하고 맛있는 칵테일이다. 싱가포르 슬링을 요청해 둘이서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건배를 했다. 역시 여행에는 낮술이다. 면허가 없는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이동 수단에 몸을 맡기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행지로 이동하는 기차나 버스를 타기 전에 낮술을 한잔하고 자리에 앉아 잠에 드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할 때가 많다. 그렇게 하면 익숙한 장소에서 이동 수단에 타서 잠이 들고, 깨어나면 이질적인 장소에 도착하는 불연속적 경험을 할 수 있다. 여행은 익숙한 장소에서 떠나 색다른 장소로 갈 때 그 효과가 뚜렷해지기 마련이므로, 이러한 불연속적 경험은 여행 상황이라는 특별한 모드로 정신과 육체를 바꾸는 스위치 역할을 하는 것일 지도. 싱가포르 슬링을 마시고, 기내식을 먹고 (후식으로 붕어싸만코가 나왔다. 특이하다. ), 싱가포르 슬링을 한 잔 더 먹었다. 알딸딸해지면서 좁은 장소에서 7시간을 보내는 무료함과 답답함을 해소했다. 얕은 잠에 들고일어나니 싱가포르 공항이었다. 발리행 비행기 탑승시간까지 한두 시간쯤 남아서, 간단하게 공항에서 식사를 했다. 완탕면을 주문하고, 한국에서 못 본 망고 맛 제로 펩시가 있어서 샀다. 둘 다 꽝이었다. 역시나 공항이나 테마파크 같은 곳에서는 검증된 프랜차이즈를 가는 것이 좋다,라는 교훈을 얻었다. 서브웨이에서 싱가포르에서만 파는 메뉴를 먹어보는 것이 더 좋았을 텐데.


싱가포르 공항에서 발리까지는 2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영화를 보기 딱 좋은 시간인 것 같아서 비행기 좌석 디스플레이에 있는 영화를 물색했다. 아쉽게도 싱가포르 항공은 한국어 자막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 영화 밖에 볼 수 없다. <친절한 금자씨>가 2시간짜리라 선택했다. 복수가 테마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그로테스크할 줄은 몰랐다. 마지막 장면은 스킵했다. 공공장소에서 그런 장면을 봐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기내식을 먹고, 레드와인도 한잔하다 보니 발리에 도착했다. 미리 비자 발급이나 입국 수속을 인터넷으로 마쳐서 빠르게 입국할 수 있었다. 숙소까지는 공항에서 걸어서 20-30분 정도였기 때문에 그냥 걸어가자고 했는데 발리를 너무 모르고 했던 소리였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택시 호객꾼들이 계속 모여들고, 날씨는 덥고 습하고, 조명도 별로 없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길을 한 번 잘못 헤매기도 했지만 어찌어찌 도착했다. 다행히 숙소는 마음에 들었고, 직원이 미리 에어컨을 틀어두어 방 안이 시원해 기분이 조금 풀렸다. 간단히 씻고 옷을 발리 날씨에 맞게 갈아입고 나니 오후 9시가 넘었다.


새우, 오리, 닭 수프 등이 포함된 인도네시아 정식

피곤하니 근처에서 저녁 먹자는 생각으로 바로 앞 호텔의 식당에 갔다. 인도네시아 전통식을 먹었다. 구운 오리 다리, 닭 육수로 맛을 낸 국, 밥과 반찬이 나오는 매우 익숙한 그런 비주얼의 음식이었다. 색다른 맛인데 그다지 맛있지는 않았다. 놀라운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 어느 식당이든 주문을 하면 아주 늦게 나온다. 이 식당만 그런 건가? 하고 생각했는데, 이후 일주일 간의 경험에서 그냥 모든 곳이 느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정도가 아니라면 주문하고 기본 30분은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 과일이 맛이 없다. 마찬가지로 여기만 맛없는 건가? 하고 생각했는데 모든 곳에서 그랬다. 5성급 호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박, 파파야, 딸기 모두 단 맛이 전혀 없다. (단 한 가지 망고스틴은 달고 맛있다. 우리나라의 반값에 살 수 있으니 망고스틴은 추천한다. ) 저녁을 먹고 술도 한잔하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오전 3시부터 오후 10시까지의 강행군을 한 후라 다음 날을 위해 들어가서 쉬기로 했다. 침대에 눕자마자 피곤함이 몰려왔다. 곧바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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