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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만남부터 결혼까지

하고 싶은 것만 하자!

by 최형주

무엇이 두 사람을 부부로 만드는가? 사랑? 추억? 공동명의의 재산? 그 외의 다양한 요소들이 있겠지만 법적으로 두 사람을 부부로 만들어주는 것은 혼인신고가 유일하다. 지혜와 나는 부부가 되기로 약속한 후, 모월 모일을 결혼기념일로 하기로 정했다. 그날에 결혼식을 하지 않고 대신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이를 위해 결혼기념일 며칠 전 출국을 하기로 계획을 세운 후, 출국 전 날 혼인신고를 했다.


여기서 결혼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머리를 갸우뚱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결혼까지의 과정 중 여러 가지가 생략된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에서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과정은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1. 두 사람이 만나 특별한 관계가 된다.

2. 서로 부부가 되기로 결심한다.

3.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맡는다.

4. 일정을 조율하여 상견례를 한다.

5. 결혼식 계획을 세운다.

6. 웨딩 촬영을 진행한다.

7. 예복, 예물, 한복, 메이크업, 부케를 예약하고, 부모님들의 예복, 메이크업도 예약한다.

8. 청첩장을 제작하고, 친구와 친척들의 일정을 조율하여 청첩장을 전달하는 모임을 가진다.

9. 신혼여행을 예약하고, 부모님들께 드릴 선물과 회사에 돌릴 답례품도 구매한다.

10. 결혼식을 무사히 치르고 신혼여행을 다녀온다.

11. 신혼여행 후 부모님 댁을 방문하여 문안인사를 드린다.

12. (결혼식을 전후로 하여) 혼인신고를 한다.

13. 그리고 그 외 예단, 예물, 신혼집 구하기, 그 외 기타 등등.


여기서 나는 여러 가지를 생략했다. 지혜와 만나 특별한 관계가 되어 결혼을 결심했고, 부모님께 소개해 드리고, 웨딩촬영을 진행했고, 신혼여행을 갔다 왔고, 혼인신고를 했다. 결혼을 허락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결혼식은 하지 않았고, 신혼집이나 예물 등은 하지 않았다. 이러한 선택과 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 책을 즐겨 읽었다. 고등학생 때는 읽지 않다가 그 관성으로 대학 생활 중에도 읽지 않았다.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책을 다시 생활 속으로 불러오자는 생각에 독서모임에 들어갔다. 그 독서모임에서 2018년 봄에 지혜를 만났다. 2017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들어간 지 반년쯤 되는 때에, <묘책>이라는 포항의 독서모임이었다. <묘책> 모임은 매주 토요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진행되었다. 미리 지정된 책을 읽고 모여서, 일주일 전에 미리 업로드되는 발제문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다. 모임이 끝나고 6시 이후로도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면서 책에 대한 것을 포함해 세상 모든 잡다한 것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했다. 매주 토요일 그 모임에 참여한 3년간의 기간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지혜를 만났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취미로 하게 되었으며, 다른 많은 친구들도 만났고, 대학원을 그만두었다.


모임에 들어가고 반년쯤이 지날 무렵 지혜가 독서모임에 들어왔다. 붙임성이 좋은 그녀는 첫 모임에서 친구가 하는 카페가 있다며 뒤풀이를 이끌었다. 카페에서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그녀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녀도 책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두 번째 모임 참석 이후로 판명이 되었다. 자주 출석하던 나와 지혜는 운영진이 되었고, 이러저러한 일들을 같이 처리하면서 함께 시간을 자주 보냈다. 그렇게 만난 지 1년쯤 되는 2019년 봄 연애를 시작했다. 만나게 된 이후에 지혜가 얘기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혜는 나를 처음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커뮤니티 사이트에 그런 말을 써둔 것을 나중에 지혜가 보여주었다.


그 사이 나는 대학원을 그만두었다. 대학원에 들어갈 때는 약 6년이 소요되는 석사 박사 통합과정으로 들어갔지만, 중간에 통합과정을 포기하고 석사로 졸업했다. 대학원을 다닌 지 3년이 되는 해인 2020년 4월 1일에 교수님께 말했다. 대학원을 그만두고 싶다고.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이제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대학원을 그만두고 싶습니다. 저는 연구를 할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좀 더 빨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 연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이니?” 교수님이 물었다.

“연구에 흥미가 생기지 않습니다. 맨 처음에 대학원에 들어올 때는, 그냥 열 시부터 열 시까지 묵묵히 주어진 일만 하면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3년간 대학원을 다니면서 알게 된 것은, 박사 학위는 절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더 높은 월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또 합법적으로 군대를 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박사 과정을 선택했다. 딱히 흥미가 있는 일도 없었고, 책을 통해서, 혹은 학부 수업을 통해서 느낀 연구는 나름대로 재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틀린 생각이었지만. 3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느끼기는 했다. 연구실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논문을 읽고 정리해서 연구실 사람들에게 발표하는 세미나를 하고 난 후다.

“형주야, 너의 논문 리뷰 발표에는 문제가 있어. 청자가 너의 발표를 듣고 생길 수 있는 의문점에 대해서 너에게 질문을 하면, 너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미리 생각해야 해. 논문을 읽거나, 발표를 준비하면서 너도 의문점이 생기잖아? 그런 의문점들에 대해서 레퍼런스를 따라가거나 검색을 통해서 의문점에 대한 대답을 준비해야지.”

나는 논문을 읽으면서 그러한 의문점이나 궁금한 점이 생긴 적이 없었다. 어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그 연구에 대해서 ‘파고들어’야 한다. 당연하게도 그 연구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관심이 생겨야 한다. 예를 들면, 내가 진행하는 반응에서 새로운 물질을 사용한 논문이 나오면 관심 있게 찾아본다거나, 네이처나 사이언스 등에 나오는 내 연구 분야의 논문은 꿰고 있다거나, 여러 논문을 읽고 이러이러한 점을 내 연구에 적용시키면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하는 것들이다. 박사 학위를 위한 연구에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없었다. 처음에는 노력을 하다 보면 생기는 것이라 생각했다. 3년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10에서 100으로 만드는 것은 노력이나 습관으로 될 수 있지만,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을. 그것을 알게 되고 나서 생각했다. 아, 나에게 있는 박사에 대한 모티베이션은 돈 뿐이구나. 그런데 박사 학위를 딴 후에도 평생 유사한 일을 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는데…. 나는 평생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나는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이것이 대학원을 그만두기 결심한 이유다.


대학원을 그만두는 것은 쉽지만, 여러 가지가 엮여있었다. 첫 번째는 부모님과의 문제였다. 부모님은 실망하셨다. 부모님들은 내가 박사가 되어 고소득에 안정적이고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직장을 가지기를 원했다. 일이 소질에 맞지 않다거나 힘들다거나,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저 멀리 후순위의 문제다. 부모님의 청년 시절에는 그런 것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통스러워도 참고해보는 게 어떠냐, 원래 다 그러면서 하는 게 먹고사는 일이다 하고 말리셨다. “너는 내가 음식점을 재미있어서 한다고 생각하니?” 하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이런 부모님과의 직업에 대한 인식 차이보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다른 것이었다. 부모님에게 있어 내가 대학원을 그만두는 문제, 내 직업의 문제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족의 일이었다. 온전히 내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가족회의를 거쳐야 하는 문제였다. 물론 내가 그 회의에서 의장이 될 수는 있겠지만, 나 혼자 독단으로 결정 내리는 것은 절차적 정당성을 어기는 행위라고 부모님은 생각하셨다. 내가 100을 주장하고 부모님이 30을 주장한다면 최소한 70이나 80 정도로는 타협을 해야 하지 않느냐,라고 부모님은 생각하고 주장하셨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100% 나의 문제다. 부모님과 친구들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 조언자나 도우미가 될 수는 있지만 거기까지다. 그들의 말을 듣고, 내가 설득이 되면 나는 행동을 바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부모님이 30을 주장한다고 해도 그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100에서 1을 줄일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뿐의 아주 단순한 문제다. 내 생각이 어떤지 부모님이 잘 알게 된다면 부모님이 내 결정과 인생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아주 단순한 생각을 가진 적도 있었다. 그 시도는 ‘사람은 다르다’라는 진리를 더 깨닫게 해 줄 뿐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군대였다. 대학원을 그만둘 무렵 나는 아직 미필이었다. <박사과정 전문연구요원>이라는 제도로 이공계 대학원을 다니면서 병역을 대신하는 제도가 있다. 석사 박사 통합과정을 지원하는 많은 학생들이 이 제도를 이용한다. 일반적으로는 6년의 대학원 기간 중 후반 3년이 이 제도를 이용하는 기간이다. 나는 초반 3년을 다니다가 나오는 입장이기 때문에, 병역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다행히 일련의 시험을 통해 전문연구요원이 되기 위한 자격을 이미 획득했고, 교수님께서 감사하게도 통합과정을 포기했음에도 석사학위까지는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덕분에 병무청에 등록된 기업에서 3년간 근무하는 것으로 병역의무를 수행하는 <석사 전문연구요원>으로 현재 복무 중이다.


위의 두 가지 문제, 부모님과 군대의 문제는 더 큰 하나의 사건으로 합쳐졌다. 바로 지혜였다. 지혜는 포항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부모님 집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전문연구요원으로 일할 수 있는 기업은 포항에 없었기 때문에 반드시 포항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장거리 커플과 결별은 선택지에 없었으니, 한 가지 선택지뿐이었다. 같이 이동해서 동거하는 것. 지혜가 하고 있는 일은 다행히도 지역을 옮길 수 있었다. 지혜는 직장에서 승진 기회와 부모님 집에서의 경제적 이득도 포기하고 그 대신 허락 맡지 않은 동거라는 불안을 짊어진 채 같이 나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2020년 9월, 만나고 1년 반 이후다. 그로부터 2년 반 이후인 2023년 봄, 연애를 시작한 지 4주년이 되는 날에 결혼을 했다.


나에게 결혼은 두 명 사이의, 그리고 두 명과 국가 사이의 계약이다. 두 명에게는 다음과 같은 계약이다. 언제나 서로의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크고 작은 일상의 행복을 함께하며,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말자는 약속. 국가 기관은 그 계약이 굳건하며 양자가 동의했음을 인증한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정신적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현실적 구속력 또한 가지게 되는, 그런 계약이 바로 결혼이다. 이런 인식은 부모님과 마찰을 일으켰다. 앞서 말한 직업선택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부모님에게는 내 결혼 또한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회의를 거쳐야 하는 공동의 문제라 인식하셨다. 그리고 결혼을 하게 되면 나와 부모님이 포함된 기존의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지혜가 들어오는 것이라 여기셨다. 그러므로 내 결혼에 있어서 부모님의 허락은 당연한 수순인 것이라 생각하시는 듯했다. 나는 결혼 후에는 태어난 가족을 벗어나 배우자와 나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고 생각했고, 부모님과 이 인식의 간극을 줄일 수 없었다. 또한 부모님께 물어보면 아니라고 하실 테지만, 부모님은 내가 대학원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가게 된 원인이 지혜라고 어느 정도는 생각하셨다. 많은 경우 부모는 자식이 일으킨 사건들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기 마련이다. ‘애는 착한데, 환경이…’ 이런저런 이유들이 겹쳐서 부모님은 내가 결혼을 늦추기를 바랐다. 가능한 최대한 뒤로 늦추고, 그 사이에 깨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내가 저녁 드라마의 주인공이나 고전 소설의 인물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화합을 이끌어냈을지도 모른다. 혹은 결혼을 하고 나서 각별한 노력을 통해 인정받는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일에 내 정신의 리소스를 할애하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바닥을 쉽게 드러내는 내 정신력은 그 일을 겪게 된다면 금세 고갈될 것이 뻔했고, 실제로 그런 조짐도 몇 번 있었다. 결혼 날짜는 미루지 않고 예정대로 진행했다. 그리고 지혜에게는 부모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을, 그리고 부모님께는 지혜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이 문제와는 별개로 결혼식도 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나에게 결혼식에 대한 인식은 다음과 같다. 결혼식은 축제다. 두 사람이 그런 계약을 맺게 되었음을 공표하고, 그 사실을 다 같이 기뻐하고 축하하는 축제. 결혼하는 당사자들은 그 축제의 주인공이며, 가장 그 축제를 즐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의 이상적인 결혼식은 ‘드라마 <셜록>의 왓슨의 결혼식에서 살인사건은 제외한 버전’이다. 교외에 파티 장소를 하나 섭외하고, 친한 친구들을 초대하고, 같이 맛있는 음식과 술을 먹으면서 즐겁게 노는 그런 결혼식. 당장은 비용 문제로 불가하지만, 언젠가는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다. 물론 한국의 결혼식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다. 한국의 결혼식에서는 ‘혼주’라는 말을 쓴다. 혼례의 주인. 바로 남편과 부인의 부모님들을 일컫는 말이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가 아니라 부모님들이다. 결혼식에는 신랑신부의 하객보다 그 부모님들의 하객이 더 많다. 부모의 성취인 자식을 가장 간단하고 직접적으로, 관계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지하고 자랑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결혼식이기 때문이다. 웨딩홀은 1~2시간 단위로 촘촘하게 예약되어 있다. 아침부터 미리 모든 준비를 끝낸 후, 예식 진행 전에는 수십수백 명을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만나고, 인사하고, 사진 찍고, 덕담 듣고, 차례에 맞춰 식을 진행하고, 옷 갈아입고 다시 한 바퀴 돌면서 인사를 하는 것이 결혼식의 일반적인 절차다. 이런 하드 한 일정으로 인해 결혼식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그런 결혼식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혜와 나는 여러 번의 회의 끝에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자!” 대부분의 과정은 패스했다. 웨딩촬영은 둘만의 추억을 위해 사진사를 섭외해 공원에서 진행했고 자그마한 책자도 만들었다. 청첩장은 직장에 증빙을 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간단하게 제작했다. 그 정도가 전부였다. 결혼식은 하지 않았다. 이상적인 결혼식은 나중을 기약하고, 대신 친구들을 모아 같이 맛있는 음식과 술을 먹으면서 모임을 가지기로 했다. 그리고 신혼여행은 가기로 했다. 인도네시아 발리로.


결혼기념일로 정한 날은 발리에 있을 예정이라 혼인신고를 할 수 없으니, 출국 전 미리 혼인신고를 해야 했다. 나는 휴가를 쓰기 어려운 상황이라, 지혜가 점심시간에 내 직장으로 와서 근처 시청에서 혼인신고를 하려고 했다. 혼인 신고서는 미리 다 작성해 두었다.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서는 증인 두 사람의 서명이 필요하다거나, 복잡한 한자를 포함해 혼인 신고서를 써야 하는데 오타를 내면 증인 두 사람의 서명을 다시 받아야 한다거나, 직장 바로 앞 시청에서 하려고 했는데 시청에서는 혼인신고를 할 수 없어 근처 구청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거나 하는 등의 소동은 몇 가지 있었지만 무사히 마쳤다. 다음 날 지상낙원 발리로 떠날 기대를 가슴에 품고, 그렇게 우리 둘은 부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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