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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Jul 15. 2022

울렁거림 없는 울릉도 배 여행

어쩌면 가장 이국적인 섬

이국의 정취를 느끼고 싶을 때 우리는 저 멀리 남쪽을 상상한다. 1년 내내 따뜻하고 언제든 달콤한 열대과일을 먹을 수 있는 나라, 그게 아니면 야자수 줄지어 있는 제주도라도. 한데 국경을 벗어나지 않고도 한없이 동쪽으로 가면 낯선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산다. 울릉도 이야기다. 가는 길이 험해서 엄두를 못 냈던 그 섬이 한결 가까워졌다. 지난해 포항에서 크루즈가 뜨면서다.


뱃멀미 공포가 있다. 오래전, 울릉도의 환상적인 겨울을 경험하고도 쾌속선의 기억 때문에 울릉도를 쳐다보지 않았다. 왕복 배편에서 모두 게우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뱃멀미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차라리 게워내면 낫다. 구토가 나올 듯 말 듯한 상태가 계속되면 메슥거림과 두통 때문에 바다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울릉도 뱃길이 괴로운 건 나 같은 뜨내기 여행객만이 아니다. 섬 주민 중에도 뱃멀미 공포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육지 나갈 일 있으면 하루 전부터 온몸이 쑤신다는 주민도 있었다. 오랜 세월 주민들은 대형 크루즈나 비행기가 뜨길 학수고대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2만톤급 울릉크루즈가 운항을 시작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000톤도 안 되는 기존 여객선은 파도가 1~2m만 쳐도 울렁거리고 3m가 넘으면 아예 뜨질 못 한다. 크루즈는 5m 파도도 뚫고 간다고 한다. 다만 좀 느리다. 여객선은 3시간, 크루즈는 6시간 반이 걸린다. 느려도 뱃멀미 고통이 없으니 푹 자면서 가면 된다. 크루즈가 울릉도 사동항에 도착한 날, 섬 주민들이 눈물 흘리며 마중 나온 장면이 뉴스에 나왔다.


첫 운항 일주일 뒤, 울릉도 출장이 잡혔다. 포항 영일만항 국제부두로 갔다. 10층짜리 아파트만한 배 한 척이 보였다. 뉴씨다오펄호. 전북 군산과 중국 산둥성 시다오를 오가던 중국 선사의 카페리답게 큼직한 한자로 배 이름이 쓰여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중국 운항이 중단되면서 울릉도 쪽으로 임대됐단다. 말이 크루즈지 사실 큰 카페리에 가까운 배였다.

오후 11시, 발열 체크를 하고 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 선실로 올라갔다. 2인실 선실에는 깨끗한 침구가 깔린 침대가 있었고 온수가 나오는 화장실도 있었다. ‘바다 위 호텔’로 불리는 럭셔리 크루즈가 아니어서 기대를 안 했는데 의외로 쾌적했다.

방을 나와 배를 구경했다. 매점도 있고 식당도 있었다. 갑판에서 바닷바람을 쐴 수도 있었다. 식당에서는 트로트 가수의 공연이 펼쳐졌다. 밴드 연주가 아니라 노래방 기계 반주에 맞춰 노래를 했지만 어르신들은 어깨를 들썩이고 손뼉치면서 좋아했다. 한국에서 가장 멀고도 이국적인 동쪽 섬으로 가는 중국 배에서 지극히 한국적인 문화를 마주하니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배가 마음에 들었다. 취재차 럭셔리 크루즈를 몇 번 타본 적 있다. 7만, 14만톤급 초대형 크루즈였다. 편하고 재미있었지만 마음 한편이 내내 불편했다.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있다는 기분 때문이었다. 모든 게 너무 과했다. 뷔페 음식, 곳곳에 자리한 수영장과 온갖 편의 시설, 쉬지 않고 가동되는 에어컨, 카지노와 오락 시설에서 한풀이하듯 노는 사람들. 대양을 질주하는 크루즈가 난파되면 어떨까 하는 극단적인 상상을 해봤다. 여가와 오락, 소비에 초점을 맞춘 호화 크루즈에 비하면 울릉도 가는 배는 이동, 운송 목적이 커서인지 불편한 마음이 덜 들었다.


울릉도에서 바로 일정을 시작해야 했기에 서둘러 몸을 뉘었다. 배가 크다고 아예 흔들림이 없는 건 아니었다. 큰 배 타본 사람은 알 테다. 약간의 진동은 요람처럼 잠들기에 더 좋다는 걸.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었다. 눈 뜨니 바로 섬이었다. 오전 5시 30분. 짐을 챙겨서 하선하는 순간 여명이 밝아왔다. 도동항으로 이동해서 아침에 바로 잡은 오징어로 끓인 오징어내장탕과 오징어회를 먹었다. 아침부터 회라니. 내장탕 국물을 뜰 때마다, 두툼한 오징어 살을 씹을 때마다 감탄사가 터졌다. 오징어내장탕 먹어본 사람만이 알 테다. 감칠맛이 폭발하는 그 국물의 클라쓰를. 물론 MSG도 적당히 들어갔겠지만.


문득 그리스를 여행했던 때가 떠올랐다. 아테네 피레아스 항구에서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탔다. 그때도 자정 즈음이었고 2인실을 배정받았다. 식당, 바 같은 공용공간에서 다국적 여행자가 뒤섞여 술을 마셨고 공연을 감상했다. 싼 티켓을 끊은 여행자들은 복도나 층계참에서 배낭을 베고 잠을 청했다. 그 배도 동 틀 무렵 섬에 도착했다. 부두에 발을 내딛을 즈음 찬란한 지중해 햇살이 여행자를 맞았다. 그때의 바삭바삭했던 햇볕과 공기의 질감이 울릉도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오징어내장탕은 없어도 크레타에서 먹은 문어 맛이 예술이었다.

이틀간 울릉도의 정취를 만끽했다. 한국 최대의 다설지인 울릉도의 겨울도 이국적이지만 초가을도 육지와 다른 멋이 그득했다. 취재를 마치고 섬을 나올 때는 정오 즈음이었다. 선실에 짐을 풀고 식당에서 밥을 사 먹었다. 버얼건 경북식 소고기 뭇국이었다. 식판을 받아 들고서야 깨달음이 왔다. 그렇지, 울릉도는 경상도였지. 먹을 게 너무 많아서 고민스러운 호화 뷔페식이 아니라 1만원짜리 국밥이어서 마음도 편했고 속도 든든했다. 옆자리에 있던 울릉도 주민은 연신 감탄하며 국을 떴다. “육지 가면서 밥을 묵다니, 상상도 못 하던 일입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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