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싫어할 땐 전제조건이 하나 있다. 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야 한다. 엄마가 주는 사랑은 내가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줄듯 말 듯 하는 그 애정표현이, 가까워졌다가 철회되고, 반드시 이 부분은 사랑받을 거라는 예측이 깨질 때마다 메말라 갔다. 엄마는 일관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엄마를 마땅히 싫어할 거라고 마음을 굳게 먹곤 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싫어하는 마음으로 방패 삼았다.
특정한 한 순간이 있던 건 아니다. 다만 어느 때부터 ‘엄마’를 ‘엄마이기 이전의 한 개인’으로 보기 시작했다. 에리히 프롬의 책이 흔들어 놓은 사랑의 개념, 누군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해준 철학 수업, 사회화 이론이 보여준 인간 형성의 복잡성, 그리고 “너희 엄마도 솔직했을 뿐이야. 나라도 그랬을 거야.”라고 말해주던 선배의 조언들이 켜켜이 쌓이며 내 시야를 넓혀주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은 나쁜 사람이야.’ 나는 이 프레임에 오래 기대어 왔다는 걸 깨달았다. 충분한 명분이었고,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성인이 되어 인간관계와 과업 수행에서 불안을 겪는다는 자연스러운 서사로 스스로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 안에 내 실패와 게으름을 피신시켰다. 그러나 나의 몫을 책임져야 하는 순간들,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순간들이 오면서, 나는 ‘엄마’라는 한 사람을 다양한 관점으로 이해하려 했다. 회피를 멈추고 책임을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다각도로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엄마’라는 개인 또한 궁금해졌다. 엄마는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어떤 취미를 즐기는지, 무엇이 즐거움을 주는지, 이런 질문들을 단 한 번도 깊게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시골에서 올라와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온 청년의 성공과 실패, 그 속에서 품어온 감정들이 조심스레 전해졌다. 나는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안아주고 싶은 딸이자 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취향과 기억들을 물어보면서 알게 되었다. 엄마는 자신이 누구인지 명료하게 알지 못했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었다. 넓어진 내 시야는 엄마라는 사람을 알고 싶어 했지만, 엄마는 사회적 역할로서만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겸손, 바닐라라떼, 장아찌, 냉면, 좋은 마음밭, 희망, 사랑, 강인함, 우울감. 이 단어들은 우리 엄마를 설명한다. 기분이 좋을 때 펭귄 춤을 추고, 마음이 복잡할 땐 조용히 성경을 필사하며, 실리적이지만 사랑하는 존재들 앞에서는 한없이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사람. 평소엔 유연하지만 문제 앞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단단해지는 사람.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