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난 너를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어

by 이면

‘근데‘라는 말을 가장 싫었다. 어찌나 싫어했는지 책에서 ‘근데, 그러나, 하지만’이라는 단어만 봐도 애꿎은 글자들에 눈을 흘겼을 정도였다. 그 단어들 때문에 내가 온전한 칭찬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잘했어. 근데 다음 기말고사 진짜 중요한 거 알지?’ ‘고생했네. 근데 이 문제는 왜 틀린 거야? 실수야, 아님 몰랐던 거야?‘ ‘근데’ 다음에 이어지는 대화들이 나와 나누고 싶은 진짜 대화인 것만 같아서. ‘잘했다, 고생했다, 수고했다.’ 같은 말 뒤에 이어지는 대화들이 없는 것 같아서 그게 그렇게 서운했었다.


집, 학교, 학원 어디든 학업에만 초점이 맞춰진 요구, 기대, 환경들이 즐비한 곳이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였다. 어른들은 그곳에서 성실하게 살아갈수록 학업을 위한 대화만 하는 부모가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자식을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학업을 위한 대화기술만 늘어가는 아이러니. 그 아이러니 속에 적응하는 어른에 내 부모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식이기 전에 한 개인이라는 것, 그래서 그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 신념, 동기들이 참 다양하고 그래서 아름답다는 것을 부모님들은 애써 외면해야 했다. 그것들에 그토록 서럽고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이 극에 치달았을 때쯤 ‘엄마’에 대한 아주 이상적인 기대치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 엄마의 어린아이, 엄마로서 부단히 애쓰는 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혹여나 내가 사랑하는 딸들이 잘못될까 전전긍긍하는 모습. 그 사랑과 헌신 덕분에 나는 ‘나’로서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알게 되었는데, 엄마는 ‘나’ 하나쯤은 잃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라는 개인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 보다 소중한 어떤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폭신한 카페트에 몸을 길게 늘어트리듯 엄마에게 물었다. ‘난 그때 엄마가 날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어.’ 엄마는 그 말을 차분히 삼켰고, 이렇게 반응했다. 조금은 느린 갸웃거림에는 지침과 연륜이 묻어 있었다. ‘근데, 어떻게 네가 그렇게 느꼈을까. 엄마는 너를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단 한순간도 없었어. 너희가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정말 단 한순간도 없었어.‘ 한 순간도 나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엄마의 진심에 무언가 얼어있던 것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리고 이내 노곤해졌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마음이 공존했다.


해석하기 어려웠던 엄마의 사랑을 단순히 ‘부족했던 사랑’으로 치부하고 싶진 않다. 부모님들의 대화 방식이 학업에 초점을 맞춘 것만으로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부모님들도 결국 사회 구조의 영향을 받는 개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모님들은 늘 최선을 다한다. 교육과 심리 관련 전문가들의 콘텐츠 수요가 늘어나는 현상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엄마에 대한 사랑이 헷갈려서 사회적 인정으로 나를 채우려 했던 지난날들은 나를 더 망가뜨린 뿐이었다. 하지만 사랑을 억지로라도 믿으면서 주체적으로 선택해 갈 때 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부모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부모라는 사회적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학업위주 대화가 아닌 한 사람에 대한 대화가 일상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사랑하는 마음을 해석할 필요가 없어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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