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와 페티시즘

by 사주영웅

한국어에 대한 사람들의 지극한 관심은 종종 탐미적으로 나타난다. 내용이나 주제에 대한 것 보다 사람들은 언어 자체, 문장이나 말의 생김새에 더 많은 걱정과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심과 우려의 핵심은 말이, 문장이, 글이 보기 얼마나 좋은가의 여부로 귀결될 때가 많다. 내용에 대한 고민보다 자신의 문장력을 먼저 걱정하거나,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시의적절성보다 문장의 표현이나 문법, 혹은 비문인지의 여부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사람들을 보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문장이야 어떻든, 사용 하는 단어가 외래어든 아니든, 사용하는 문법에 영어식 표현이 들어가 있든 아니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이다. 문장을 손보고, 단어를 선택하는 일들은 가장 우선적으로 주제와의 연결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문장 자체가 갖는 어감과 형식의 차원에서만 수정이 고려되는 경우가 많다.


말과 글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보조적 수단인데, 내용에 들이는 것보다 더 많은 정성을 들여서 문장을 고르고 단어를 선택하는 것은 다소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페티시즘이란 대상 자체에 대한 바람과 욕망이 아니라, 대상을 대체하는 아주 부수적인 요소에 대한 비정상적인 욕망이다. 글의 내용에 대한 고민과 수정이 아닌, 문장 자체, 단어 자체에 대한 이러한 과도한 걱정과 수정은 일종의 언어적인 페티시즘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어의 존댓말은 이런 페티시즘적 폐해의 대표적 사례다. 존댓말은 절대 효율적이지도, 미학적이지도 않다. 특별한 상황에 한해 사용될 수 있겠지만,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사용이 강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뉴스보도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불특정인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상황을 보면 존댓말은 말을 듣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언어적 페티시즘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존댓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반말을 하게 된다면, 대부분의 경우 내용은 무시하고 사람들은 일단 불쾌해 하기 때문이다. 듣는 쪽에서야 기분좋게 들리겠지만 하는 쪽에서는 여간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이 예쁘고 고운말, 아름다운 말에 집착하는 것은 병적이다. 바른 말이 어디 있고, 고운말이 어디 있는가? 모든 말은 쓰임새가 있다. 욕을 듣기 좋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순수한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언어의 순수성을 되찾으려고 하는 발상도 또한 병적이다. 순수한 말이라는 표현으로 도대체 뭘 의미하는지 알수가 없다. 한글전용세대들은 일본어의 잔재를 몰아내고 말을 순화하자는 캠페인을 종종 벌이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겨진 말들은 모두 순수한가? 구름이나, 시나브로, 시나위, 미리내 이런 대표적인 한글말들은 모두 순수할까? 이런 단어들은 오로지 한국인들만 사용하는 한국에서만 자생한 말이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순수한 언어를 얻기 위해서는 이국의 언어를 쓰는 문화권과의 교류를 차단해야 한다는 말인가? 문화는 교류하되 언어적인 영향은 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문화교류의 뜻과 영향에 대해서 다시한번 고민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문화는 받아들이고 언어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순수한 한국어라는 생각은 유치한 환상이다. 그런 순수한 한글을 쓰는 것이 바른 말이고 고운말이고 아름다운 말이라는 발상은 고스란히 내용보다 말 자체에 대한 페티시가 병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전히 한국은 내용보다 껍데기를 더 중요시한다.


이런 경향은 영어를 배울 때에도 고스란히 되풀이 된다. 영어의 경우, 어떤 말이 순수한 앵글로 색슨어이고 어느 것이 로망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계통인지 전공자가 아니라면 쉽게 구별하기 어렵다. 따라서 영어에 대해서, 한국 사람들은 그 단어의 순수성(?)은 알 수 없고 오로지 좋은 발음과 그렇지 않은 발음을 구분하여 실력 좋은 영어와 실력 나쁜 영어를 구분한다. 반기문 전 사무총장의 연설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핀 EBS의 실험은 이런 측면에서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대부분의 한국인 청자들은 반기문 총장의 연설을 듣고 그의 영어실력을 낮게 평가했다. 반면 영어권 청자들은 당연히(?) 높은 수준의 영어라고 평가했다. 한국인들은 발음의 유창성을 영어실력의 매우 중요한 기준으로 삼게 되면서 내용과 주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쉬운 발음으로 내용을 더 잘 들을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영어권 청자들의 경우, 내용과 선택된 단어에 집중했지 그의 충청도식 어눌한 영어발음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들에게 높은 수준의 언어는 영어의 내용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발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그들은 영어를 제2외국어로 사용하는 많은 외국인들의 비모국어화자 영어에 익숙한 결과이기도 하다.


몇몇 중 고등학교에서, 심지어 대학에서도 영어 스피치 대회를 열고 있다. 전달하려는 메시지 중심이라기 보다 누가 얼마나 더 유창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영어를 말하는가를 경쟁하는 대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대회가 얼마나 교육적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채점 기준에 내용에 대한 항목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역시 말에 관한한 예쁜 것을, 잘 짜여진 문장을-내용과는 별도로-좋아하는 병적인 페티시즘의 결과다.


학술정보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온갖 논문들을 볼 수 있다. 많은 논문들은 매우 논리적으로 잘 정리된 구성으로 쓰여져 있지만, 얼마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있는지는 보장할 수 없다. 논문 심사에서도 역시나 말의 외피에 대한 지적이 주류를 이룬다. 외래어가 많다든지, 영어식 표현이 많다든지, 문법이 틀렸다 든지의 지적은 어떤 면에서 내용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평가를 압도한다. 결국 그런 지적들이 논문게재의 당락을 결정한다. 좋은 주제, 창의적인 생각, 깊은 통찰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문장이 논리적으로 구성되지 않고, 적절한 표현으로 구성도지 못하면 소용없다.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형식에 매몰되는 것이 두렵다는 말이다.


영어작문 수업을 한 적이 있다. 교재에는 아이들에게 글을 쓰기 전에 모자를 씌어주는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고깔모자에는 “Thinking Cap” 이라고 쓰여져 있었는데, 글을 쓰기전 아이들에게 무엇을 쓸 것인지 충분히 생각하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문장을 다듬는 것을 중요시하는 한국식 작문수업과, 뭘 쓸것인가를 먼저 충분히 고민하게 하는 영어권 작문수업이 확연하게 비교되는 페이지였다.


아름다운 문장, 시적인 표현, 감동의 한줄, 이런 것들은 멋진 주제가 온 후에 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주인 없는 빈집에 가서 멋진 옷을 입고 혼자 파티를 즐기는 것 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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