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이라는 말은 워낙 유명해서 유행어는 물론이고 유전자 조작이라는 의미를 갖는 접두어로도 사용될 만큼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이 막대하다. 영화와 광고, 학술과 예술은 물론 게임과 오락에 이르기까지 프랑켄슈타인은 헬로키티나 슈퍼맨처럼 대중문화의 한 획을 그은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이 19세기 영국소설에서 유래한 것을 모른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랑켄슈타인이 뭔지 알 것이다. 파우스트를 읽지 않았어도 메피스토텔레스는 알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프랑켄슈타인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머리에 나사박힌 거구의 몬스터가 아니라, 그 몬스터를 창조한 박사의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그는 소설속에서 여러 죽은 사람들의 신체를 접합하고 전기를 흘려보내 마침내 죽은자들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금기의 영역을 건드린 과학자이기도 하다.
워낙 작품속에 등장하는 몬스터의 이미지가 강하다보니, 사람들은 소설의 제목에 사용된 프랑켄슈타인을 작품속의 괴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 착각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굳어져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프랑켄슈타인을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소설속에 괴물에겐 이름이 없다. 그저, creature, monster등으로 불릴 뿐이다. 마치, 좀비 시리즈 영화의 대표적인 워킹데드Walking Dead에 좀비zombie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는것처럼 말이다.
처음 소설이 발표되었던 1818년 이후로, 20세기 초 제임스 웨일의 1931년 영화는 물론, 1994년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했던 영화에 이르기까지 프랑켄슈타인을 소재로 한 영화와 대중문화는 무궁무진하다.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은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다. 사실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신화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할 것이다. 제목에 등장한 프랑켄슈타인은 소설속의 주인공 과학자이며, 그가 이룬 업적은 바로 신화속 프로메테우스가 한 일처럼 바로 인간을 창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헤파이스토스 이전의 장인의 신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동생 에피메테우스와 같이 인간을 창조한 신이기도 하다.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그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신이며, 동시에 그 때문에 코카서스 바위에 결박당한채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을 파먹히는 운명을 갖고 있는 신이기도 하다. 프로메테우스라는 말의 의미는 먼저(pro) 생각한다(metheus)는 뜻이 있다.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epi) 생각하는(metheus)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동생의 이름으로부터 에피스테몰로지, 인식론(epistemology)이라는 말이 생겼다. 경험을 통해 뭔가를 인식한다는 말이다. 이 에피메태우스의 와이프는 바로 판도라의 상자로 유명한 판도라Pandora이다. 판도라 라는 이름은 재미있는 말이다. 널리 알려진것처럼 그녀가 상자를 열었을 때, 온갖 안좋은 것들이 모두 튀어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녀의 이름 판도라는 곧 판(Pan), 모든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도라(dora)는 준다는 의미가 있어서, 판도라는 모든 것을 준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운명이 이름속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소설의 제목에 등장하는 프랑켄슈타인과 프로메테우스의 병치는 바로 이러한 인간창조신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매우 폭력적이고 잔혹한 내용을 물론, 고딕적이면서도 음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데, 놀랍게도 작가는 여성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고작 19세 정도의 어린 나이였을 무렵 이 작품을 썼다는 사실이다. 작가 메리 셸리(Mary Shelley)는 본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Mary Wollstonecraft Godwi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18세기 말 영국의 대표적 지성인들이었다.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는 지금도 읽혀지는 『여성의 권리 옹호(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라는 책으로 유명한 근대 초기 페미니즘의 선구자로, 여성의 이성과 교육의 평등을 주장했던 사람이었다. 비록, 메리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를 잃게 되지만, 울스턴크래프트의 사상과 정신적 유산은 메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버지 또한 당대의 유력한 지성인이었던,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인데, 그는 당시 정치 철학자이자 아나키즘 사상의 시조로 여겨진다. 특히, 그는 인간의 이성, 도덕,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이런 지적인 풍토속에서, 메리는 어릴때부터 독서와 사색, 작문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교육을 받으며 자라게 된다. 또한 집안의 지적인 분위기와 사교적인 교류를 경험하게 되면서 다양한 인문학적 교양은 물론, 수준높은 과학적인 지식도 쌓게 된다. 메리 셸리는 당시 여성이 받기 어려웠던 철학, 고전문학, 자연과학, 언어, 정치사상에 대해 정통하게 접근할 수 있는 특권적 환경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삶에서 가장 급진적인 변화는 바로 낭만주의 시대의 가장 유명한 시인 중 한사람인 P. B. 셸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 유명한, 「오즈만디오스」와 「서풍부」와 같은 시를 썼던 바로 그 셸리다. 1814년, 열일곱 살의 메리는 당시 유부남이었던 젊은 셸리(Percy Bysshe Shelley)와 사랑에 빠져 도망친다(elopement). 이 사건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고 한다. 특히 셸리는 당시 헤리엇 웨스트브룩과 결혼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어린 처녀를 데리고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메리 또한, 도덕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랑, 정신적 동반자 관계를 추구하길 원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독일, 스위스, 프랑스를 여행하며 낭만주의 문인들과 교류했고, 과학과 문학, 철학을 넘나드는 지적 여정을 함께 한다.
1816년, 메리는 스위스 제네바 호숫가의 별장에 체류하던 중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당시 날씨가 안좋아서, 셸리와 교류하던 몇몇 작가들이 바이런의 별장에 모여 서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짓는 이벤트를 연 것이다. 이른바, 이른바 “바이런의 별장 이야기 경연 대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엔, 바이런뿐만 아니라, 퍼시 셸리, 메리 셸리, 존 폴리도리 등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816년, 그해는 여름없는 해로 불릴 만큼 기후가 혹독했고, 그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서 보내야 했다고 한다. 그런 케빈피버(Cabin Fever)의 분위기 속에서 세대를 초월한 고전이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을 썼고, 존 윌리엄 폴리도리(John Wiliam Polidori)는 후대의 뱀파이어 소설의 원조격인 『뱀파이어』(Vampyre)를 집필하게 된다.
『프랑켄슈타인』는 이성중심주의, 계몽주의의 빛과 그림자를 다루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추구하는 과학적 이성의 찬란한 가능성을 묘사하면서, 그 이면에 드리워진 존재론적인 고뇌와 위험을 성찰하는 소설이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창조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 여성작가에 의해 쓰여진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창조적인 작업에 가장 직접적인 경험을 겪는 것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만큼, 이 소설은 생명과 책임의 문제를 매우 정교하게 탐구하고 있다.
작품을 읽다 보면, 여기에는 신화와 과학, 철학과 종교가 결합되어있으며, 동시에 고대의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19세기의 근대적인 과학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메리는 어떤 면에서 그녀가 집필한 소설의 제목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윤리적 예언자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려는 의지와 그 결과에 대한 책임 사이의 균형을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으며, 그러한 질문은 인공지능이 성큼 다가온 현대에도 더 뚜렷하게 반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리 셸리는 단지 『프랑켄슈타인』의 저자가 아니라, 자유와 이성, 윤리적 상상력이 결합된 여성 지성의 상징이기도 했다. 특히 시대를 앞서 나간 여성으로서, 여성의 교육, 인간의 한계, 문명의 윤리를 문학으로 사유한 작가였다.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집필하는 데에는 시대적 사조와 과학적 관심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초는 낭만주의문학이 절정에 이르던 때로, 자연의 숭고함과 인간 감정의 심연을 탐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셸리는 이러한 낭만주의적 감수성을 지니면서도, 한편으로 당시 급격히 발전하던 자연과학과 실험 철학에 호기심을 가졌다. 전기 실험으로 죽은 개구리를 움직이게 한 갈바니즘(Galvanism)이나, 인체 해부와 생명 원리에 대한 당시의 담론들이 그녀의 상상력을 자극한 것이다. 또한 그녀는 괴테의 『파우스트』, 밀턴의 『실락원』과 같은 작품을 통해 인간이 금기를 어울렀을 때의 비극이 어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읻. 특히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이 자신의 존재를 아담과 사탄에 비유하는 장면은, 셸리 자신의 독서 편력과 사색이 작품에 녹아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메리 셸리는 풍부한 지적 토양과 개인적 비극, 그리고 시대의 분위기를 결합시켜, 인간 창조에 얽힌 윤리와 운명의 문제를 제기하는 독창적인 이야기를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몬스터가 여러 다른 사람의 부위로 결합된 새로운 생명체가 된 것처럼, 메리 셸리는 당시의 다양한 지식과 견문을 종합하여 불후의 명작을 집필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 작품의 간략한 줄거리를 살펴보자.
소설은 일종의 액자식 구조로 되어 있다. 이야기는 북극을 탐험 중인 로버트 월턴(Robert Walton)이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시작된다. 그는 위대한 발견을 꿈꾸며 항해 중, 얼음 위를 떠도는 한 남자를 구조하게 되는데, 그는 바로 빅터 프랑켄슈타인(Victor Frankenstein)이다. 중병에 걸린 빅터는 월턴에게 자신의 삶을 들려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스위스의 명문가 출신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학문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젊은 과학자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 철학과 고대 연금술, 그리고 생명에 대한 탐구에 집착해온 그는, 결국 죽은 물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방법을 알아낸다. 그는 몰래 실험실을 만들어 시체 조각을 이어 붙이고, 번개(전기)를 통해 거대한 생명체를 창조한다. 그러나 그 괴물이 깨어난 순간, 빅터는 자신이 만들어낸 창조물에 대해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와 혐오를 느끼며 자리에서 도망친다. 괴물은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창조주에 의해 버려지게 된다.
버림받은 괴물은 정체성과 인간성을 찾아 방황한다. 그는 숲속 오두막에 숨어 살면서 인간 가족을 관찰하고, 언어와 감정을 배우기도 한다. 시, 철학, 역사책도 읽으며 점점 더 인간처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외모 때문에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선의를 보여도 사람들은 그를 보고 도망치거나 공격한다. 소외과 고독과 편견속에서 괴로워하던 괴물은 절망에 빠져 자신을 창조한 빅터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괴물은 먼저 빅터의 어린 동생 윌리엄을 살해하고, 그 죄를 집안 하녀 저스틴에게 덮어씌운다. 이후 산속에서 빅터와 조우한 괴물은 자신이 그동안 겪었던 일을 말하면서 자신에게 동반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에게 동반자를 만들어달라. 나도 사랑하고 함께 살아갈 존재가 필요하다.”
이에 빅터는 잠시 고민하지만, 또 다른 괴물이 세상에 위험이 될 것을 우려하여 거절하게 된다. 이에 분노한 괴물은 빅터의 친구 헨리 클레벌, 그리고 결혼 첫날의 신부 엘리자베스까지 살해한다.
몬스터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빅터는 괴물을 추격해 북극까지 오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기력이 다해 쓰러지고, 월턴의 배에 구조되었던 것이다. 곧 빅터는 사망하고, 뒤늦게 나타난 괴물은 그의 시신을 보고 오열한다. 몬스터는 자신도 곧 자살할 것이라 말한 뒤, 얼음 속 어둠으로 사라진다.
소설속 주인공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근대 과학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지식을 추구하는 순수한 욕망에서 출발하지만, 그 욕망은 곧 인간 존재의 경계를 넘어서 신의 자리를 넘보는 오만으로 이어진다. 그는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실험에 성공하지만, 곧 그 결과를 감당하지 못하고 피조물을 외면하고 도망친다.
이 대목에서 메리 셸리는 계몽주의 시대 이후 도래한 이성 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다. 과학은 인간을 진보시키는 도구이지만, 동시에 인간성을 훼손할 위험도 함께 갖고 있다. 인간의 이성이 빛이라면, 괴물은 그 빛이 드리운 그림자다. 프랑켄슈타인의 비극은 과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학을 책임 없이 다루는 인간의 윤리적 책임의식의 결핍에 있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에서 가장 인상적인 존재는 창조자보다 피조물이다. 괴물은 단순한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 언어를 배우고 책을 읽으며 인간을 이해하려 애쓰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고통과 감정을 지녔지만, 단지 그 혐오스러운 외모 때문에 거부당한다. 이 대목은 여전히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울림을 주고 있다.
이 괴물은 빅터의 그림자이자 자아의 파편이며, 사회로부터 소외된 모든 존재들의 은유다. 그는 사회 질서로부터 거부당한 ‘타자’로서, 타인의 시선에 의해 괴물로 변해버린 인간이다. 그의 분노는 내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의 배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얼마나 우리가 빈번하게 겪는 경험인가. 이미 200여년 전,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쉽게 타인을 괴물로 만들 수 있는지를 미리 경고하고 있는 듯 하다.
빅터는 창조자이지만, 창조 이후의 책임을 회피하는 존재다. 그는 괴물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를 사회로부터 보호하지 않으며, 그 결과로 수많은 비극이 발생한다. 프랑켄슈타인의 도피와 침묵은 과학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무책임한 태도를 상징하며, 메리 셸리는 이를 통해 창조에는 반드시 윤리적 책임이 따라야 함을 강조한다. 작품은 명확한 선악 구도를 갖지 않는다. 괴물도, 빅터도 완전한 악인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 인간성의 다양한 얼굴을 지닌 존재들이다. 이처럼 메리 셸리는 인간이 갖고 있는 창조의 가능성과 파괴의 잠재성,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과 복수심 사이의 긴장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복합성과 윤리적 모순을 그려낸다.
메리 셸리는 독자에게 묻는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지식인가? 이성인가? 외모인가? 아니면 타인을 이해하려는 연민인가? 작가는 그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창조한 존재에 대한 책임과, 타자에 대한 공감이 결여될 때 어떤 파국이 초래되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프랑켄슈타인』은 2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고전이다. 인공지능, 생명공학, 유전자 조작 같은 현대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창조와 책임”이라는 메리 셸리의 질문 앞에 서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은 단지 고딕 소설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와 윤리에 대한 예언처럼 읽히고 있으며, 지금 이 시대에도, 그리고 이 시대에 더욱 더 유효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괴물은 단지 실험실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이웃의 얼굴, 사회의 틈에서 밀려난 존재, 인간 안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자아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메리 셸리는 아마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 괴물을 만든 것은, 바로 당신이다.”
이 작품의 중심인물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단순한 비극적 과학자를 넘어, 동서양 운명론의 틀 안에서도 깊이 있는 해석이 가능한 인물이다. 사주명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는 인성과 편인의 에너지가 과도하게 분출된 “지식의 운명자”이며, 균형을 상실한 사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중심 인물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학문에 대한 끝없는 열망과 야망을 지닌 천재로 그려진다. 빅터의 삶을 지배하는 중심 에너지는 인성, 그 중에서도 편인(偏印)이다. 인성은 정신적 에너지, 학문적 추구, 보호 본능을 상징하지만, 그 균형이 깨질 경우 편인은 고립, 예민함, 직관적 집착이라는 그림자를 드러낸다. 빅터는 어릴 적부터 고전 과학에 몰두하고, 남들과는 다른 세계에 사로잡힌다. 그는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신의 금단 영역에 도전하며, 인간이 가닿을 수 없는 지점까지 이성을 밀어붙인다.
사주명리학의 시각에서 그의 성격을 투영해 보면, 편인이 과다(偏印過多)한 특징을 떠올릴 수 있다. 편인(偏印)은 간접적인 지식과 상상력, 독자적인 사고, 독창성, 자신만의 정신세계등을 의미한다. 빅터는 어릴 때부터 연금술과 자연철학 책에 심취했고, 대학에서도 기존 학설을 넘어 생명의 비밀을 밝히려는 독창적 탐구를 벌인 인물이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편인적 기질—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탐색하며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지적 독립성—과 부합한다. 그러나 편인이 과도하면 타인의 간섭을 극도로 꺼리고 일상적 규범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단점이 나타나기도 한다. 실제로 빅터는 생명 창조 실험에 몰두하는 동안 가족이나 친구와의 소통을 단절하고, 조언이나 제지도 귀담아듣지 않은 채 고립된 연구에 빠져든다.
그는 “남들이 알 필요도, 간섭할 수도 없는 비밀”을 추구하며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데, 이는 편인 과다한 사람이 보이는 고집스런 외곬수의 전형이라 볼 수 있다. 또한 편인의 과잉은 욕심이 지나쳐 화를 자초하고, 매사 주변을 원망하는 경향으로도 나타난다고 하는데, 빅터 역시 자신이 벌인 참극의 책임을 끝까지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고 오로지 괴물을 향한 분노와 원망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인다. 그는 괴물이 저지른 살인들에 대해 신에게 저주받은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창조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괴물만을 악으로 단정 짓는 모순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심리적 모순과 파국은 편인 과다한 인물의 “말의 시작과 끝이 다르고, 마음과 겉이 다른”일면과도 상통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사주에서 편인이 극단적으로 강할 때 나타나는 비주류적 천재성의 전형이다. 하지만 동시에 정관(正官)이나 재성(財星)과 같은 균형자들이 부재한 그의 사주 구조는, 그가 현실적 책임감이나 인간 관계의 섬세한 균형을 잃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괴물이 생명을 얻는 순간, 빅터는 실험실을 도망치듯 떠나버린다. 그는 창조자이지만, 창조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는 정관이 약하거나 파극된 사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패턴이다. 정관은 도덕, 윤리, 질서를 상징하며 인간 사회 속의 '책임감'을 나타내지만, 빅터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한다. 그는 친구 클레벌의 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족과의 관계도 차츰 단절해간다. 사회적 관계를 의미하는 비견(比肩)과 겁재(劫財)가 희박한 인물로,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자신의 내면과 지식에만 몰두하는 고독한 존재로 남는다.
빅터의 사주에는 여러 가지 신살이 상징적으로 작용한다. 그는 화개살(華蓋殺)의 고독한 예술가적 천재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인물이다. 그에게 지식은 고통과 연결되어 있으며, 현실과의 단절은 숙명처럼 따라다닌다. 또한 괴강(魁罡)의 기운은 그를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지만, 주변을 파괴하는 강렬한 지성으로도 작용한다.
비록 새로운 생명의 창조가 소설의 주된 모티프이지만, 살인과 죽음이 많이 등장하는 만큼, 백호살(白虎殺)은 이 소설의 전반적인 서사를 끌고 가는 중심 신살이라 할 수 있다. 빅터는 자신의 피조물이 저지른 모든 죽음의 원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하고, 끝내는 엘리자베스, 클레벌, 아버지 등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사주 구조의 균형을 잡아주는 용신(用神)이 빅터에게는 없다. 그의 사주는 편인 과다형으로, 이를 조절해줄 관성이나 재성이 필요하지만, 정작 그의 삶에는 현실성과 감정의 조율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인성으로 몰입한 나머지, 인간적인 교감과 윤리적 판단을 상실하고 만다. 이처럼 용신이 부재한 사주는 에너지가 흐트러지고, 결국 자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프랑켄슈타인은 편인의 천재성과 그 그림자, 정관의 부재가 초래한 도덕적 파산, 신살이 이끄는 파멸적 운명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기 자신과 자기 피조물, 자기 세계 속에 고립된 채, 얼음 속 북극을 향해 달려간다. 그것은 죽음을 향한 길이 아니라, 사주적으로 보면 용신 없는 사주의 귀결이며, 인간 이성이 균형을 잃었을 때 도달하는 종착점이다.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의 중심축이자 가장 복합적인 존재다. 그는 빅터의 피조물이자, 창조자의 그림자이며, 인간이 만든 가장 인간적인 고통의 결정체다. 외형은 흉측하지만, 그 내면에는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 언어를 배우고 감정을 이해하려는 순수성이 존재한다. 이처럼 이중적이고 비극적인 존재인 괴물을 사주명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구조가 드러난다.
괴물은 사회에 의해 거부된 존재이며,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인정받으려 한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보호자(정인)를 잃었고, 사회적 질서(정관)로부터 배척당했다. 그 결과, 그는 칠살(偏官)혹은 상관(傷官)의 거칠고 고통스러운 에너지를 안고 태어난 인물로 볼 수 있다. 칠살격은 사회로부터 억눌리고 탄압받는 자의 분노, 또는 권위에 저항하는 에너지로, 상관견관 구조는 자기표현(상관)이 사회 규범(정관)과 충돌할 때 발생하는 혼란과 파괴성을 뜻한다.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에게 “너는 나의 창조자이며, 동시에 나의 파괴자다”라고 외친다. 이 말은 자기 존재의 법적, 윤리적 정당성이 사회(혹은 아버지)로부터 부정되었음을 보여준다. 칠살의 분노와 상관의 파괴성이 혼재된 상황속에서 몬스터는 폭력과 증오로 폭주하게 된다.
괴물의 에너지는 십성상 편관(칠살)과 상관의 복합 구조로 볼 수 있다. 편관은 통제되지 않으면 위험하고 파괴적이지만, 제대로 쓰이면 의로움과 투쟁의 에너지로 작용한다. 상관은 감정의 표현, 자의식, 창의성의 원천이지만, 정관과 충돌하면 문제를 야기한다. 괴물은 처음에는 상관의 형태로,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감정을 표현하고자 한다. 하지만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후, 그 에너지가 칠살적 복수심으로 전환된다. 이는 사주에서 상관이 정관을 파극할 때, 또는 칠살이 용신이 아닌 경우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비극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사랑받고자 했으나, 미움을 배웠다.”
괴물은 숲 속의 오두막에서 언어를 익히고, 책을 읽으며 인간이 되려 하지만, 외형 때문에 거부당한 뒤 복수의 화신으로 변모한다. 상관의 표현력이 칠살로 전이되어 폭력적 결과를 낳게 된다.
괴물은 사주상 여러 개의 신살(神煞)이 중첩되어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일단, 몬스터는 자신의 창조주를 원망한다. 이것은 원진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창조되자마자 버려지면서 세상을 홀로 떠돌게 된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하지만, 거부당하고, 거절당하면서 점점 세상과 소외의 벽이 두꺼워진다. 또한 양인살로 인해 자신의 창조주인 빅터를 원망하고, 자신을 거부한 세상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 커져간다. 백호살은 피와 파멸을 부른다. 몬스터는 자신이 목적한 대상들을 차례차례 살해한다.
결국, 괴물은 탄생부터 파괴적 운명을 타고난 존재로 설정되어 있으며, 이 신살들은 그를 사회로부터 밀려난 타자, 복수의 화신, 운명적 외톨이로 형상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내게 이름을 달라. 나는 태어났으나, 존재하지 않는다.”
사주명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괴물은 용신을 갖지 못한 사주의 상징이자, 정관과 인성의 결여로 인해 통제되지 못한 칠살과 상관의 에너지로 형상화된 존재다. 그는 인간에게 외면당하고, 사회에서 추방되며, 결국 파괴로 귀결되는 타자화된 자아이며, 운명으로부터도 축복받지 못한 존재다.
빅터에 의해 창조된 이름 없는 괴물은 문학사에서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또 깊은 오해를 받는 존재로 남았다. 그는 사랑과 환대를 받아야 할 새로운 생명이었지만, 정작 창조자 자신조차 등을 돌리과 마는 혐오스럽고 기괴한 외모를 가졌다. 이로 인해, 몬스터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는커녕, 편견과,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괴물의 내면에는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차오르고, 이것은 매우 폭력적이고 잔인한 살의가 되어 다시 창조자, 빅터를 향하게 된다.
이러한 몬스터의 운명에는 칠살(七殺) 혹은 상관견관(傷官見官)같은 전통명리학에서 흉한 기운, 폭력적이고 위험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다. 칠살(七殺)은 명리학에서 편관(偏官)이라고도 하며, 통제가 되지 않는 공격적 기운을 의미한다. 칠살이 두드러진 사주는 자칫하면 포악하거나 아웃사이더로 낙인찍히기 쉽지만, 한편으로 잘 제어하면 비범한 추진력으로 발휘될 수도 있다. 작품 속 괴물은 본래 선악의 기준으로부터 백지 상태로 태어났다. 사실 괴물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을 받고자 노력했던 존재였다. 하지만, 인간의 편견과 공포심은 그를 악마화 하였고, 이러한 상황속에서 몬스터의 칠살기질이 폭주하게 된 것이다. 인간들이 자신을 보면서 비명지르며 두려워하고 돌을 던지고 해치려고 하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창조자로부터도 버려졌다는 현실을 깨닫고, 그는 격렬한 분노와 복수심을 품게 된 것이다. 이는 몬스터가 결국 사회의 적대와 배척 속에서 “악인”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음을 운명론적으로 상징한다.
칠살격의 사람은 흔히 일반적인 도덕이나 법질서와 충돌하는데, 괴물이 처한 존재 방식이 정확히 그렇다. 그는 사회 규범(정관正官)의 바깥에 위치한 존재이며, 오히려 그 질서를 파괴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규범과 질서를 파괴하는 기운은 상관견관(傷官見官)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것은 상관과 정관이 함께 공존하는 것을 말한다. 상관(傷官)은 사주의 십성(十星) 중 자유분방한 창조성과 반항 정신을 뜻하고, 정관(正官)은 규율과 권위, 질서, 규범, 도덕등을 뜻한다. “상관견관(傷官見官) 위화백단(爲禍百端)”, 즉 “상관이 관을 보면 화(禍)가 백가지로 일어난다”는 말은 정관이 상관을 만났을 때 생길수 있는 각종 스트레스와 위법한 일을 의미한다. 상관견관이란 제어받기를 거부하는 힘(상관)이 권위(관성)를 극단적으로 거스르는 형국으로, 고전적으로 최악의 흉조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상관견관은 여성에겐 배우자와의 이별,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나 변동, 각종 관재구설에 연류되는 것을 의미한다. 빅터와 몬스터가 어떤 의미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로 인해 아버지(창조자 빅터)의 상관적 기질이 몬스터에게도 나타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괴물은 이런 상관견관의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창조주 빅터는 그에게 인간 사회의 도덕과 질서를 가르치기는커녕 그 자체로 괴물의 입장에서 “관성(官星)”이 되어 제어하려 들었고, 사회 역시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자 괴물 내부의 상관적 욕구-구속받지 않고 자기 뜻을 펼치려는 욕구, 어떻게든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으려는 갈망—가 폭발하게 된다. 그는 끝내 창조주라는 권위에 도전해 빅터의 세계를 무너뜨린다. 이로써 아버지와 아들, 창조주와 피조물사이의 질서는 파국으로 치닫고, 몬스터의 폭력적인 상관의 폭주로 많은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괴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정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정관속에서 상관의 기운으로 똘똘 뭉친 몬스터는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괴로워하다 폭력적인 양상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살육과 방황, 그리고 극한의 고독이었다.
여기에 다양한 신살적인 영향도 몬스터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관련신살로는 원진살, 지살, 양인살, 백호살을 들 수 있다. 원진살(怨嗔煞)은 글자 그대로 “원망하고 성내는 살”로, 인간관계에서 풀리지 않는 원한과 증오를 의미한다. 괴물은 세상에 대해 뿌리깊은 원망을 갖게 된 존재이며, 특히 자신을 창조하고도 책임지지 않은 빅터를 향한 원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렬하게 나타난다. 둘 사이에는 마치 궁합이 극악한 원진관계가 맺어진 것처럼 만나기만 하면 비극을 낳게 되는 것이다. 지살(地殺)은 끊임없는 유랑과 변동의 운명을 만들어 낸다. 지살은 역마와 달리, 아주 먼 곳으로의 이동이라기 보다는 가까운 곳으로의 빈번한 움직임을 의미한다. 물론, 역마와 함께몬스터는 인간들을 피해 멀리 떠나려 하지만, 결국 빅터의 언저리에 머물려 그와 마주치게 된다. 지살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곳저곳 떠돌 운명이라고도 하는데, 괴물은 집도 이름도 없이 알프스 산속과 빙설의 북극을 전전하는 영원한 방랑자가 된다.
몬스터는 태생적으로 “땅에 발붙일 곳 없는” 지살의 기운 아래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양인살(羊刃煞)은 극도로 공격적이고 강인한 기개를 상징한다. 양인살을 지닌 자는 고집이 세고 투쟁심이 강하며, 폭력성도 나타난다. 괴물은 초반에는 선량함을 지녔으나, 점차 양인살의 화신처럼 거침없는 복수자로 변모한다. 맨손으로 사람의 목숨을 끊을 정도의 괴력과 분노는 양인(羊刃)의 칼날을 연상시키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완강한 집념역시 양인의 특징과 맞닿아 있다. 그는 자신을 학대했던 인간들 앞에서는 양처럼 순한 모습을 버리고 호랑이같이 무서운 존재로 돌변하는데, 이는 그 안에 내재한 폭발적 힘이 극한 상황에서 표출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백호살(白虎殺)의 불운은 괴물의 삶에도 짙게 드리워 있다. 백호살은 앞서 빅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피로 점철된 불행을 뜻하는데, 괴물 자신도 수많은 살인을 저지르며 피의 운명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이 흉살을 피해가지 못한다. 동시에 그 역시 이러한 행위로 인해 스스로 파멸하고 만다.
북극에서 자신의 창조자였던 빅터가 죽은 뒤, 괴물은 모든 복수가 끝났음에도 남은 것은 허망함과 증오의 지속뿐임을 깨닫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는 백호의 길, 곧 파멸로 이어지는 폭력적인 순환을 의미한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사주명리학적으로 보면 칠살의 운명을 타고난 비극적 존재로 해석될 수 있다. 원진의 원한, 지살의 유랑, 양인의 분노, 백호의 피의 업보가 결합하여, 한때는 순수했던 피조물을 운명적으로 파괴와 복수의 화신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문학 작품 속 몬스터가 갖고 있는 상징성을 색다르게 부각시킨다. 기존의 인본주의적 독법에서는 괴물을 환경이 빚어낸 희생자로 보거나 그의 악행을 사회적 학대의 산물로 이해하지만, 명리학적 해석은 운명의 희생자로 조명한다. 즉 괴물에게도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있었기에 비극이 발생했다는 관점이다. 이는 작품에 깔린 운명론적 분위기—“애초에 창조 행위 자체가 금기를 어긴 것이므로 파국은 예정되어 있었다”는 암시—와도 통하며, 괴물 캐릭터에 한층 신화적이고 숙명적인 색채를 덧입힌다.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사주명리학적 해석은 독특한 문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일반적인 문학 분석이 심리적 동기와 사회적 맥락에 주목한다면, 명리학적 분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물들의 성격과 사건 전개에 내재한 운명론적 필연성을 포착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빅터와 괴물의 비극을 각각 그들의 타고난 사주명리학적 구조가 낳은 귀결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관점은 작품을 일종의 운명극(運命劇)처럼 해석하게 하는데, 이것은 고대 그리스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희곡등에서 흔히 보이는 숙명적 비극성과도 연결된다. 사실 『프랑켄슈타인』 자체도 인간이 운명을 거스르려다 벌을 받는 근대의 신화로 자주 언급되기 때문이다. 명리학적 관점은 여기에 음양오행과 십성, 신살같은 동양의 상징체계를 적용함으로써, 작품에 깔린 운명의 역학을 더욱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언어로 풀어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명리학적 접근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만능 열쇠는 아니다. 빅터와 괴물의 비극에는 계급적 조건, 과학에 대한 시대의 공포, 작가의 개인적 트라우마 등 다층적인 원인이 있다. 그러나 운명론적 관점은 그러한 요소들 배후에 놓인 보편적 인간 드라마의 원형을 포착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프랑켄슈타인』은 현대 독자에게 과학기술의 윤리뿐 아니라 인간이 자기 한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자칫 허무주의로 비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겸허함과 성찰의 계기를 준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끝내 깨달았듯이, 인간은 스스로 창조주가 될 수는 있어도 그 결과를 온전히 장악할 수는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 운명적 질서는 늘 인간의 의지 바깥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명리학적 해석은 『프랑켄슈타인』의 영원한 주제, 곧 “인간은 어디까지 자기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을 한층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마지막으로 처음 출판되었을때 첫 페이지에 인용된의 한 『실락원』의 한 구절은 이 작품의 주제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당신에게 요청한적 있었습니까, 창조주여. 진흙을 빚어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고?
내가 당신에게 애원한적 있습니다, 어둠속에서 나를 끌어내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