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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형제의 운명과 구원의 문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by 현현

세계문학이라는 말과 가장 근접한 동의어로 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꼽고 싶다. 좀 오래전의 범우사라든가, 삼중당문고, 까치출판사, 동서문화사는 물론이고, 비교적 최근에 기획된 민음사나 펭귄등에서 기획된 세계문학전집에 항상 대표격처럼 등장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제목이 인상적이다. “카라마조프”라는 발음하기도 쉽지 않았던 이질적인 이름은 일단 책의 제목을 자연스럽게 말하는것도 어렵게 했으니까. 고등학교때, 범우사에서 출판된 두꺼운 책을 큰 맘 먹고 사다놓았지만, 책은 한동안 펼쳐지지 않은 채 책장에 꽂혀만 있었다. 어쨌거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왠지 모르지만 끌리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정작 이 소설을 읽고 난 후에도 난 한참동안 내가 뭘 읽었는지 몰라서 누구에게 이 책을 읽은것에 대해 말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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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내용이었지?


그렇게 한참의 세월이 흐르고, 2021년 쯤인가 동국대학교 이해랑예술극장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연극공연이 있었다. 당시 리뷰에는 2시에 들어가서 9시 넘어 나온다는 등의 평이 있었는데, 공연의 러닝타임이 6시간이었다. 중간에 밥을 먹고와야 했던 기억이 난다. 이 공연을 보러 간 것은 이 작품을 좀 잘 이해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극으로 보면 작품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거란 기대도 있었다. 그렇게 장장 6시간 자리를 지키며, 대체적으로 집중하면서 연극을 봤다. 재미있었다. 그런데, 지금 또 생각해보면 그게 무슨 이야기였지? 하게 된다. 그 긴 시간동안 연극을 정말 집중해서 보았음에도, 작품의 내용, 즉 스토리는 명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 난 정말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맞는지.


그도 그럴것이, 이 작품은 어떤 면에서 사건이나 에피소드보다는 도덕과, 종교와 철학에 대한 온갖 논쟁과 토론, 그리고 사건을 둘러싼 너무 많은 이야기는 찰스 디킨스와 같은 소설의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소설과는 너무 결이 다른 것이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에 수시로 등장하는 인간과 도덕과 종교와 철학에 대한 성찰에 귀기울이다보면 정작 소설속의 중요한 플롯과 사건을 까먹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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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가 1880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소설은 카라마조프가의 세 형제, 드미트리, 이반, 알료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도덕, 영성, 귀족주의, 신의 존재라는 문제를 전면으로 등장시킨다. 장남 드미트리는 불꽃처럼 뜨거운 욕망과 격정을 품은 인물이고, 차남 이반은 차디찬 이성의 심연에서 신과 도덕에 반역하며 고뇌하는 지성인이며, 막내 알료사는 맑은 영혼으로 사랑과 신앙을 실천하는 순결한 청년이다. 이 세 형제는 마치 몸과 두뇌와 영혼을 각각 대변하는 세 축처럼, 인간 본성의 상이한 측면을 드러내 보인다.


이 작품은 사회적, 정치적, 철학적 격변으로 점철된 19세기 러시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을 통해 실존적 질문과 신앙과 이성의 충돌을 며 당시의 지적, 도덕적 논쟁을 깊이 파고들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덕분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은 종종 종교적인 구도자나 혹은 수도자의 이미지와 중첩되기도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덕적 딜레마로 괴로워하는 인간, 고통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세상을 그린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인간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심리적 통찰력과 철학적 깊이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단순한 소설가가 아니라, 종교와 철학에 심원한 통찰력을 갖춘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작품의 스토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작품의 주인공인 세 형제의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젊은 시절부터 돈만 알고, 젊은 여성을 유혹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던 거칠고 저속한 남자였다. 그는 두 번 결혼하고 세 아들을 두게 된다. 세 형제중의 장남인 드미트리는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었고, 이반과 알료사는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들이다. 하지만,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아들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고, 어머니가 죽으면 친척과 친구들이 키우도록 아들을 보내기조차 했다.


소설의 도입에서, 이제 스물여덟 살의 군인이 된 드미트리 카라마조프는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마을로 막 돌아온다. 드미트리는 어머니가 남긴 유산을 청구하러 온 것이다. 하지만,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부인의 유산마저 자신이 차지할 생각이었다. 결국, 아버지와 드미트리는 돈 문제로 갈등을 빚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반이 등장한다. 이반은 사실 자신의 아버지는 물론, 배다른 형, 드미트리도 잘 모르는 상태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냉철하고 지적인 성격인 이반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호출된 것이다. 그런 갈등이 오고가는 와중에,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가 의문의 살해를 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의 전개가 소설 내용의 전반적인 구성을 이루게 된다.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의 장남 드미트리. 그는 약혼녀 카테리나에 대한 관심을 잃고 그루센카와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감정과 열정에 쉽게 휩쓸리는 열정적이고 성급한 인물이다. 폭력적인 성질의 저주를 받은 드미트리는 죄의식에 시달리며 소설 내내 자신의 결점을 극복하고 영적 구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드미트리는 아버지처럼 관능주의자로 여겨지며 알코올 중독에 빠진 방탕한 인물이다. 드미트리는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와 결혼하기로 약혼했지만 그루센카와 사랑에 빠진 후 약혼을 파기한다. 드미트리와 아버지의 관계는 가장 불안정하며, 특히, 그는 아버지와 유산뿐만 아니라 그루셴카를 두고 싸우기 시작하면서 폭력적인 관계가 된다.


여자를 두고 아버지와 싸우는 큰 아들이라니!


드미트리의 캐릭터는 처음에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감옥에서 만난 죄수 D.I. 일린스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회고록 소설 『죽은 자의 집에서』에서 “항상 가장 활기차고 훌륭한 영혼”으로 묘사된 일린스키는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감옥에 있었지만, 항상 자신의 결백을 굳건히 지켰던 인물로 기록된다. 그는 나중에 다른 사람이 범죄를 자백한 후 풀려났다고 한다.


드미트리는 세 형제 중 가장 파란만장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열정적이고 고집이 세며 무모한 그는 알료샤의 선한 마음과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무분별한 관능을 결합한 인물이다. 드미트리는 알료사와 달리 자신의 정열에 지배당하지만 또,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와는 다르게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진정한 후회를 느끼기도 한다. 그는 고통을 통해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드미트리가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에 대한 살해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그의 혐의와 살해죄에 대해서 묻는 질문은 어느 정도 보편적인 선과 악에 기초한 인간 본성에 대한 중요한 성찰로 읽히기도 한다.


결국, 드미트리는 범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서 열렬한 영적 회심을 경험하고 재판을 통해 선한 삶을 살며 자신의 죄를 참회할 준비가 된 더 강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드미트리의 구원과 이반의 좌절을 통해 의심과 회의주의를 거부하고 믿음과 사랑에 찬성함으로써 소설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드미트리의 구원은 인류의 본질에 대한 소설의 낙관적인 결론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원래 도스토예프스키의 아주 원대한 계획의 일부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형제들에 대해서 사주명리학적인 관점에서 분석을 해 보도록 하자. 형제들의 나이 순으로, 일단 먼저 드미트리를 살펴보자.


드미트리 카라마조프는 욕망과 충동, 죄책감과 구원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인물이다. 그는 여성과 돈, 명예와 정열을 좇으며 자기 파멸의 길을 걷지만, 그 이면에는 고통을 통해 진실을 찾아가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 자리하고 있다.


드미트리의 사주에서 아마도 그의 일간(日干)은 병화(丙火)이지 않았을까. 그의 강렬한 성정과 충동적인 기질은 병화의 성질과 자연스럽게 부합한다. 일지(日支)로는 같은 불의 기운인 오화(午火)를 두어, 화기(火氣)가 지나치게 왕성한 구조를 이루지는 않았을까. 불로 왕성해진 이 강한 에너지는 그가 보여주는, 분노, 열정, 쾌락, 파괴의 가능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또한 그의 사주에는 도화(桃花)기운도 엿보인다. 도화살은 이성을 매혹하여 사랑과 정사의 풍파를 몰고 오는 운세인데, 드미트리의 삶은 그야말로 불꽃같은 연애와 질투의 격정으로 가득하다. 두 여인 사이에서 갈등하고, 사랑과 증오가 뒤엉킨 격랑 속에서 그는 운명의 소용돌이를 헤맨다. 더구나 그의 팔자엔 칠살(七殺)의 어두운 그림자마저 드리워져 있는 듯하다. 칠살은 통제하기 힘든 폭발적 힘을 뜻하는 별로, 잘 다스리면 영웅이 되나 그렇지 못하면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가는 운이다. 드미트리의 난폭한 기질과 아버지를 향한 살의는 바로 이 칠살의 기운이 현실에 어둡게 투영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는 아버지 살해 혐의로 체포되어 법정에 서고, 인생의 나락에서 고통을 겪게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추락과 고통의 경험은 그를 새로운 깨달음의 길로 이끌기도 한다. 시베리아 유형을 앞둔 드미트리는 이전의 광기 어린 눈빛 대신 어딘가 가라앉은 참회와 성찰을 하게된다. 뜨거운 불길은 한 번 재가 되어 사그러들어야만 다시 새 불꽃을 피울 수 있듯, 드미트리는 극한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불같은 욕망을 일종의 정화의 불꽃으로 태워 낸다. 이는 마치 사주명리에서 한쪽으로 치우쳤던 오행이 대운(大運)의 흐름 속에서 반대 성향을 만나 균형을 되찾는 과정과도 같다. 불같은 성정의 드미트리는 마침내 운명의 거센 물길 앞에 자신을 내맡기고, 그 흐름에 순응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조화를 모색하려는 듯 보인다.


그는 화(火)가 지나치게 왕성한 사람이다. 화는 열정과 직관, 이상을 뜻하지만, 수(水)가 부족할 경우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곧 폭발로 이어지게 된다. 그의 충동, 격정적 사랑, 자해적 행동 등은 이러한 화왕 수쇠(火旺水衰)의 명리적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제, 냉정, 그리고 내면의 정화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병화는 타인을 밝히는 존재와 능력을 상징하지만, 만약, 통제가 되지 않으면 주변을 불태우는 위력이 있다. 드미트리는 정의와 신념, 사랑을 말하지만, 그것이 충동과 자만으로 뒤섞이며 결국 비극적인 사건의 중심으로 돌진하는 인물이 된다.


드미트리에게는 비견(比肩)과 겁재(劫財), 상관(傷官)의 작용도 강하게 나타난다. 비은 자존심과 독립성, 경쟁 본능을 상징한다. 비견은 자신감과 욕망이 왕성해지는 요인이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추진력과 에너지가 넘친다. 성욕도 왕성해지고 자존감이 강해지며 특히 그런 이유로 인간관계, 여자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이러다 보니, 그는 아버지 페도르 카라마조프와 끊임없이 갈등하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려 한다.

게다가 겁재는 재물을 빼앗고 충동을 자극하는 파괴적 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데, 드미트리는 아버지의 유산에 집착하고, 그것을 위해 과도하게 집요하며, 때로는 자기 통제를 잃는다. 작품을 읽다보면, 정말 화를 잘 내는 드미트리는 상관의 나쁜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상관은 권위에 대한 반발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뜻한다. 그는 법과 질서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의 불의에 분노하고 자기만의 정의를 추구한다.


드미트리는 편재(偏財)의 특성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편재란 한쪽으로 치우친 재물의 기운으로, 재물과 쾌락을 거침없이 좇는 호탕하고 대담한 성정을 가리킨다. 실제로 드미트리는 돈과 사랑을 얻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연인 그루셴카를 차지하고자 아버지와 맞서 싸우고, 약혼녀 카테리나에게 받은 3천 루블마저 탕진하며 방탕한 향락에 몸을 던진다. 이렇듯 편재의 기질을 지닌 이는 재물을 제 것 아닌 양 흥청망청 쓰고 위험한 모험도 마다않는데, 드미트리는 자신의 인생을 커다란 한판 승부처럼 내걸고 불길 속으로 뛰어든다.

드미트리에게는 양인(羊刃), 겁살(劫煞), 그리고 천살(天煞)과 화개(華蓋)와 같은 신살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인은 칼날과 같은 폭력성과 돌발적인 분노를 뜻한다. 드미트리는 항상 폭발 직전의 감정 상태에 있으며, 실제로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으로 몰리는 비극을 겪게 된다. 겁살은 뜻하지 않은 사고와 파괴를 의미한다. 그런만큼, 드미트리는 언제나 사고의 중심에 있으며,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 천살은 운명의 고독과 비극적 결말을 상징한다. 드미트리는 세 형제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지 못하고, 가장 극적인 고통을 겪는 인물읻. 화개는 고독 속에서 예술적, 종교적 감성을 지니는 신살이다. 드미트리는 겉은 거칠지만, 영적 갈등과 구원의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자기 죄를 되새기고 속죄를 꿈꾸는 인물로 그려진다.

드미트리의 삶은 전형적인 겁재격의 자기파괴적 운명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를 단지 운명에 휘둘리는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고통을 통해 구원과 자기 성찰을 추구하며, 감옥에서도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기회를 보여준다.


사주명리학은 인간의 운명을 말하지만, 동시에 그 운명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던진다. 드미트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빛난다. 그는 자기 운명의 불길 속에서 자유의지를 실천하려는 의지를 불태우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명리학이 말하는 ‘운명의 기운은 정해져 있으나 해석은 인간의 몫’이라는 철학과도 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그는 겁재와 상관, 양인과 천살의 구조를 지닌, 운명에 도전하다가 상처 입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는 고통을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자유의지를 실천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에서 이반만큼 트라우마나 내적 갈등에 시달리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나지만, 항상 투쟁적인 토론이나 궤변은 이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반은 예리한 분석력을 지닌 영리한 학생이었지만, 오히려 그의 명민한 지적능력은 그를 절망에 빠지게 한다.


부당한 인간의 고통, 특히 어린이들의 고통에 대한 공포를 사랑의 신에 대한 생각과 조화시킬 수 없었던 이반은 의심에 사로잡혀 신이 존재하더라도 악의적이고 적대적이며 인류를 고문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주장하기 까지 한다. 이반은 인간의 도덕 개념이 영혼이 불멸한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반은 지적이고 철학적인 인물이자, 극도로 내면적 고뇌에 시달리는 인간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그는 사유와 논리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지만, 끝내 그 이성의 한계와 고통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이반의 성격과 운명을 사주명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그의 인물상이 훨씬 더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이반은 전통, 권위,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고 논리와 이성으로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이는 명리학에서 편인(偏印)의 성향을 가졌다. 편인은 기존 질서에 의심을 품고, 철학적·창의적 사유를 즐기며, 고립된 지식인의 전형이다. 또한, 그는 언변이 날카롭고 반항적인 태도를 지닌다. 특히 신(神)과 윤리, 도덕의 근거를 해체하려는 태도는 상관(傷官)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상관은 기존의 틀을 해체하고 새로운 사유를 펼치려는 지적 욕망을 의미한다. 상관은 긍정적으로 발현하면 예능이나 학문적 지성, 개혁과 변화, 확장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부정적으로 발현할때는 다툼과 싸움, 손실과 갈등이 남발하게 된다. 특히 무슨일이든지 끝장을 보려하는 특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창조한 이 세계의 질서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이반이 편인의 사유 체계로 신의 질서를 거부하는 철학적 회의주의자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오행적 관점에서, 이반은 수(水)와 금(金)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수와 금은 각각 깊은 사유, 지혜, 불안, 우울, 그리고 날카로움, 분석, 냉철함, 논리적 사고와 관계된다. 때문에 이반은 명백히 수기(水氣)가 강한 인물이다. 깊은 사색, 외로움, 정신의 흐름 속에 고립되는 경향은 이러한 수 오행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는 금기(金氣)의 성향도 두드러지게 갖고 있다. 이반은 이성과 언어, 논리, 분석의 지적능력도 강하여, 뛰어난 논리력과 사상적 비판 정신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러나 금수(金水)의 과다는 현실 감각의 부족, 감정과 삶의 이탈을 초래하게 되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이반이 봉착하는 정신적 위기와도 맞닿는다.


형제들의 아버지 표도르는 이반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한다. "이반은 어릴 적부터 지성은 있었지만, 인간적인 따뜻함은 그만큼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을 정도라니. 어느정도 세 형제들은 모두 화개의 성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가 마치 무슨 종교소설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드미트리에게도 그랬듯이, 화개살은 종교적·철학적 고뇌와 예술적 감수성을 상징한다. 이반은 『대심문관』장을 통해 신에 대한 심오한 성찰과 인간 구원에 대한 사색을 보여준다. 이는 종교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화개살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반의 경우, 화개는 고독성을 강하게 내포한다. 이반은 정신적 고립, 인간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반은 극 중 누구와도 깊은 유대를 맺지 못한 채 점점 고립되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고립된다.


사주명리학에서 편인과 상관이 지나치게 강하면, 현실감각이 무너지며 신경쇠약이나 정신 붕괴에 이를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이반은 그렇게 자신의 내면을 상실하며 끝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잃게 된다. 사주명리학적으로 본다면, 귀문관살도 함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반은 사주명리학적 관점에서 편인과 상관이 지나치게 과다한 '지식과 이성의 고립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신과 인간, 도덕과 질서, 고통과 구원의 문제를 철저히 논리와 사유로 파헤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의 운명(命)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이 만든 논리의 덫에 걸려 현실과 단절되고, 사랑도, 신념도, 윤리도 손에 넣지 못한 채 정신적 파국의 길로 접어든다. 이는 사주의 불균형, 특히 상관의 폭주와 편인의 고립이 초래한 전형적인 내적 붕괴의 운명이다. 이반은 질문을 던진다. “이성만으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반을 통해, 사유의 영광과 한계, 인간 운명의 비틀림과 회복 불가능성이라는 실존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사랑스러운 주인공으로 기억되는 알료사를 살펴보자. 개인적으로 알료사는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에 등장하는 요제프 크네히트의 이미지와 중첩될 때가 많았는데, 두 인물의 느낌이 비슷해서일거라고 생각한다. 혹은 두 작품을 읽었던 시기가 비슷했거나.


알료사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알료사는 스무 살 정도고 젊고 잘생겼다. 게다가 그는 성숙한 종교적 신앙과 이타심, 인간에 대한 타고난 사랑을 갖고 있다. 알료사는 선천적으로 정말 착하고 선한사람이다. 알료사는 천성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선행을 베풀고 그들이 더 행복하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 정직하게 노력하는 데 삶의 대부분의 에너지를 쓰는 사람이다. 알료사는 타인에게 비판적이지 않으면서 그들의 심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게다가 온화하고 소탈한 성격이어서 그를 아는 거의 모든 사람은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알료사가 순진한 것은 아니다.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알료사 역시 인간의 도덕적 딜레마와 구원의 문제에 깊은 고민을 갖고 있다. 그는 인간의 악과 죄의 업보를 이해하며 보편적인 용서를 실천하려고 애쓰는 인물이다. 알료사는 매우 강렬한 종교적 신앙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인간 알료사의 바탕이다.

수도원 장로인 조시마를 통해 신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선한 일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 알료사는 스스로 의심이 들 때에도 항상 선을 행하겠다는 다짐을 통해 자기 마음속의 의심을 해결한다. 소설이 끝날 무렵 알료샤는 자신을 흠모하는 마을의 어린 학생들에게 조시마의 가르침을 전파함으로써 조시마의 유산을 지키려 한다.


알료사는 소설의 주요 사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다른 등장인물들이 열정에 휩싸이면 그들을 차분하게 진정시킨다. 일단 차분과 진정은 정인의 특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료사는 정인의 기운이 강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정인은 따뜻한 보호 본능, 인자함, 온화함, 겸손함, 배움의 자세, 높은 도덕적 성향과 같은 특징을 나타낸다. 이는 알료사가 소설에서 지니고 있는 기본 성향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는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항상 사람들을 위로하며 사랑과 자비를 전파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또 젊은이 답게, 알료사에게는 식신의 기운 또한 강하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알료사에게 내적으로 순수하고 맑은 성정으로 나타난다. 식신은 남을 편안하게 하고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사고를 나타내는 십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알료사는 작품 속에서 늘 긍정적이고 타인을 이해하며, 절제와 균형을 통해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한다.


사주명리학의 신살에는 천덕귀인과 문창귀인이라는 신살이 있다. 천덕귀인은 덕망이 높고 인격이 훌륭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귀인을 의미한다. 문창귀인은 지적이며 정신적, 도덕적 성취와 깨달음을 나타내는 길한 신살이다. 알료사는 아마도 이런 신살의 기운이 충만해 있을 것이다. 특히, 알료사는 조시마 장로와 같은 영적인 스승의 가르침 아래서 성장하며, 도덕적 완성과 영적 깨달음을 지향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천덕귀인과 문창귀인의 신살을 지닌 전형적인 귀인형 인물인 것이다.


이러한 교육적, 정서적, 영적인 특성은 오행적 관점에서 목화의 기운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목(木)은 성장과 조화, 자비심, 이해심, 포용력을 의미하며, 화(火)는 따뜻한 애정과 인간적 온기, 이상적인 신념과 헌신의 자세를 상징하기도 한다. 알료사는 모든 사람에게 온화한 태도를 유지하며, 세상을 향한 이상적이고 따뜻한 신념으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목과 화의 조화는 그의 도덕적 신념과 자비로운 성격을 잘 나타내며, 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과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원천이 된다. 주변 사람들에서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유난히 목화기운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알료사는 명리학적으로 이반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통받는 이반과 달리, 강력한 정인과 식신의 기운을 통해 세상과 화해하고 사람들을 위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이다. 알료사의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품과 높은 도덕적 이상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추구한 ‘능동적 사랑’을 구현하는 존재이며, 그의 삶은 천덕귀인과 문창귀인의 가호 아래 안정된 성장과 영적 성취를 이루는 귀인형 인물의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알료사의 사주명리학적 특성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제시한 인간의 가장 숭고하고 이상적인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작가가 그리고자 한 궁극적 인간상, 즉 고통 속에서도 희망과 사랑을 놓지 않고 세상을 치유하는 따뜻한 존재의 이상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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