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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눈보라속 촛불같은 상관의 사랑

by 현현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우리에겐 『바보이반』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과 같은 우화로 더 친숙하게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삶과 진리를 끊임없이 추구한 철학자이자 도덕가로서 종종 예수나 석가모니 공자등과 같이 성인의 반열에 이른 선지자처럼 평가되기도 한다.


1828년, 러시아의 명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톨스토이는 이른바 금수저 중에서도 황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친척들 손에서 자랐지만, 교육은 철저히 상류층의 귀족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그의 전체적인 삶의 스펙트럼은 거의 전구간에 걸쳐서 활발하고 왕성하게 구성되었는데, 그는 군인이자 사상가였으며, 도박에 빠져보기도하고, 향락과 쾌락의 삶을 방황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엔 톨스토이의 집안에서 그가 손대지 않은 하녀가 한명도 없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그는 관능과 욕망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그러던 그는 전쟁에 참전하면서 다른 많은 군인들이 그러하듯,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이때 겪은 전쟁의 극한상황과 부조리한 경험을 통해, 톨스토이는 죽음과 인간이라는 주제에 심취하게 되었고, 점점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통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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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발표된 『안나 카레니나』는 귀족 사회의 위선을 드러내고 인간 내면의 갈등을 서사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소설은 외견상 단순한 사랑 혹은 불륜이라는 부도덕한 이야기로 출발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도덕과 사랑, 죄의식, 신념,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소설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All happy families are alike; each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Все счастливые семьи похожи друг на друга, каждая несчастливая семья несчастлива по-своему.)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워낙 유명한 말이라 한번쯤 들어본적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의 이 첫 문장은 소설 전체의 주제와 구조를 예고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간단히 말해, 행복은 단순하고 불행은 복잡하다. 행복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지만, 불행은 각기 독특하고 복잡한 각자만의 원인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너무 복잡한 것은 결국 좋게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속 인물들에게 적용해 본다면, 레빈과 키티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건전한 행복을 보여주는 반면, 안나와 브론스키, 그리고 돌리와 스티바의 관계들은 각각 다른 이유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도 역시 단순한 관계가 복잡한 관계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나는 사회적 관습과 개인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파멸하고, 안나의 오빠 스티바는 무책임함과 쾌락주의로 가정을 파탄시키게 된다. 각 인물의 불행은 서로 다른 근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레빈과 키티를 통해 보여주는 진정한 행복(레빈의 농촌 생활과 신앙)은 단순하게 보이지만,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회의 허위와 위선은 다양한 형태의 불행을 만들어낸다.


『안나 카레니나』 이후, 톨스토이의 삶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는 예수의 산상수훈에 깊이 감화되어 기독교 무저항주의, 채식주의, 금욕주의, 비폭력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국가를 거부하고, 전쟁과 세금을 반대하며, 교회를 비판한 끝에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을 당하기에 이른다. 저작권을 둘러싼 가족들과의 갈등도 깊어졌다. 저작권의 사회환원을 원했던 그였지만, 그의 아내는 남편의 금욕적 삶을 이해할 수 없었고, 거듭되는 사상적 불화로 인해 톨스토이를 점점 가족으로부터도 멀어진다. 1910년, 그는 82세의 나이에 가족과 세속을 떠나 방랑을 시작했고, 결국 집을 떠난지 며칠만에 러시아의 한 작은 기차역의 역사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둔다.


『안나 카레니나』는 인간의 자유와 욕망, 도덕과 사회적 구속, 신앙과 허무와 같은 통속적이면서도 매우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결혼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제도를 통해 인간의 삶과 운명, 그리고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작품은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안나 카레니나와 알렉세이 브론스키의 정열적이지만, 파국이 예정된 파멸적 사랑이고, 또 다른 하나는 콘스탄틴 레빈과 키티가 보여주는 사랑과 구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안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류층 여인으로, 고위 관리인 남편 카레닌과 형식적이고 차가운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현대의 쇼윈도우 부부와 같은, 그런 애정없는 삶이다. 혹은, 당시의 기준으로 결혼은 대개 정략적으로 이뤄지던 것이었으니,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안나는 오빠를 만나기 위해 도착한 기차역에서 매혹적인 청년 장교 브론스키를 만나게 된다. 비록 순간적으로 스치듯 만난것이었지만, 미묘하지만, 오해할수 없는 서로의 애정을 알아본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된다. 이후, 안나와 브론스키는 본격적으로 서로를 사랑하면서 안나는 사회적 도덕과 개인의 열망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다른 19세기 유럽의 소설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 역시 인물들간의 관계가 다소 복잡하다. 안나와 브론스키는 서로를 사랑한다. 안나의 오빠 스티바는 레빈과 친구관계인데, 레빈은 키티를 사랑하고, 키티는 브론스키를 사랑한다. 하지만 브론스키에게 거절당한 키티는 나중에 레빈의 청혼을 받아들이며, 두 사람은 작품속에서 유일하게 안정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작중 주인공 레빈은 농촌 귀족으로, 이상주의자이자 톨스토이 자신의 자화상을 투영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도시 귀족 사회의 허위와 형식성을 혐오하며, 자연과 노동, 그리고 진정한 신앙 속에서 인간의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의 사랑 이야기 또한 고난을 겪지만 결국 키티와 화해하게 되며, 일종의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


톨스토이는 안나-브론스키 커플과 레빈-키티 커플을 교차적으로 서술함으로써, 두 삶의 방향성과 선택이 주는 철학적 대조를 극대화한다. 이 두 유형의 사랑은 극단적으로 안나와 레빈으로 상징되는 다양한 특징을 보여준다. 안나의 사랑은 도시, 열정, 사회적 규범의 파괴, 파멸로 수렴되고, 레빈의 사랑은 자연, 노동, 도덕적 갈등, 재생과 구원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구성은 인간이 삶에서 맞닥뜨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나는 욕망의 맹목적이고 정열적인 추구, 또 다른 하나는 고통을 통한 내면의 성숙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파괴적인 사랑이 그렇듯, 안나 역시 비극적인 결말을 피하지 못한다. 그녀는 처음 브론스키를 만났던 바로 그 기차역에서, 철길에 자신의 몸을 던져 생을 마무리 한다.


『안나 카레니나』는 19세기 유럽 리얼리즘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내면 심리의 묘사라는 점에서 근대 심리소설의 선구적 위치에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동시대의 프랑스 작가 구스타브 플로베르(1821-1880)의 『마담 보바리』와는 자주 비교되곤 하는데, 조만간 『마담 보봐리』에 대한 분석도 소개할 예정이다.


두 작품 모두 결혼한 여성의 결혼외 사랑과 파국으로 치닫는 열정을 그리고 있지만, 플로베르가 냉소적이고 객관적 서술을 중심으로 썼다면, 톨스토이는 사랑의 이야기 위로 도덕적 공감과 종교적 성찰, 구원의 문제를 덧붙였다.


도스토예프스키와의 대비도 흥미롭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와 구원이라는 급진적 플롯을 구사하지만, 톨스토이는 사회와 인간 심리의 점진적 충돌과 그 여운에 집중한다. 이와 함께, 『안나 카레니나』는 이후 버지니아 울프,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와 같은 작가들에게 내면 서사의 형식적 영감을 주었고, 여성 인물의 심리적 고뇌를 다룬 페미니즘 문학의 시조로도 평가된다.


그럼, 각 인물들을 사주명리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


안나는 지적이고 아름다우며 매력적인 여성으로, 작품의 중심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과 도덕적 선택 사이에서 비극적으로 흔들리며 무너져간다. 모스크바의 무도회장에서 안나는 브론스키와 강렬한 사랑에 빠진다. 이때 안나는 브론스키와 춤을 추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안에 있는 로맨틱한 열정을 느끼게 된다. 더구나, 키티가 마음에 두고 있는 브론스키를 사이에 두고 키티를 일종의 경쟁자로 생각하면서, 묘한 승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목격한 키티는 자신이 아닌 안나를 향한 브론스키의 마음을 느끼게 되며 절망하게 된다. 남편과 아들이 있었음에도 안나는 브론스키를 향한 사랑의 불길에 걷잡을 수 없이 휩싸이고 만다. 하지만, 남편은 물론, 자신의 아들마저도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브론스키를 향한 사랑은 접차 집착이 되어갔고 안나는 자신을 극도의 스트레스로 몰아갈 만큼 브론스키의 사랑을 의심하게 된다. 브론스키 역시 끊임없이 안나에 대한 사랑을 확인시켜주었지만, 결국 관계는 돌이킬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여기에는 상대방과 타협하고 화합하기 보다는 일방적인 자신만의 논리와 주장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듣지 않으려는 상관의 특성이 치명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안나는 어쩌면 충동적으로, 어쩌면 브론스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위한 복수심에서, 또 어쩌면 삶의 무게에 지친 마음으로 달리는 열차 앞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곳은 브론스키를 처음 만났던 바로 그 기차였이었고, 그를 만났던 날 일꾼이 사고로 죽었던 바로 그 기차였이었다. 그때, 안나가 되뇌였던 것처럼, 그들의 운명은 처음부터 “불길한 징조”였을지도 모르겠다.


안나는 오행상 불(火)의 기운이 강한 인물로 추정된다. 그녀는 따뜻하고 정열적이며 사교계의 빛나는 꽃과 같다. 안나는 감정 표현이 풍부하고 삶의 즐거움과 로맨스를 중시하지만, 정서적인 감정이 불균형할 때는 외로움과 공허감에 쉽게 휩싸이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불의 오행적 성향은 그녀를 매혹적이고 카리스마 있게 만들어 주변을 밝히지만, 또 반대로 뜨거운 불의 내부에 존재하는 음적인 요소로 인한 불안정성도 갖고 있다. 이것은 사랑에 몰입할 때 눈부시게 행복해하면서도, 혼자가 되는 순간 불안과 절망에 빠지는 극단적인 감정의 기복으로 나타난다.


안나는 고위관료의 부인답게 사회적 체면과 도덕, 관습을 따르는 것에 충실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30대라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 안나는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던 뜨거운 열정을, 브론스키와의 만남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안나는 뜨겁게 타오르는 개인적 자유와 열정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나며, 기존 질서나 도덕보다 뜨겁고 진실한 사랑을 삶의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 된다. 처음에는 상류 사회에서 우아하고 친절한 귀부인으로 지냈지만, 그녀의 내면 깊숙이 억눌린 욕망과 독립적인 정신이 함께 타오르며 이후 사랑을 위한 치명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안나의 사주를 유추해 보면 그녀의 일간(日干)은 마치 정화(丁火)와 같이 부드럽지만 꺼지기 쉬운 촛불에 비유될 수 있다. 이는 겉으로는 품위 있고 온화하나, 꺼질 듯한 불꽃이 한순간 거세게 치솟는 것처럼 억눌린 열정이 한 번 터지면 통제가 어려운 것을 뜻한다. 사실 정화는 문명지상이라고 해서, 질서와 체계로 대변되는 문명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화 오행이 오상의 의미에서 예(禮)를 의미하는 것 역시, 사회적인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오행이기 때문이다.


십성적인 관점에서 안나에게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상관(傷官)의 기질이다. 상관은 기성 질서와 관성을 거스르고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추구하는 별이라고 할 수 있다. 상관은 긍정적으로 쓰이면 감각적인 예술성으로 나타난다. 무도회에서, 안나는 비교적 화려하지 않은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는데, 단번에 무도회장에서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하지만 동시에 상관이 부정적으로 표출될때는 파격적인 이탈과 부정, 저항의 심리로 나타난다. 안나는 바로 이 상관의 힘으로 당대 도덕과 규범을 뛰어넘어 자신의 열정을 따라 행동했던 것이다. 기혼 여성의 신분으로도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선택했던 과감한 행위는, 체면과 규율, 보수적인 규범에 과감히 맞서는 상관의 반항적 에너지를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안나의 곁에는 칠살(七殺)에 해당하는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힘이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다. 편관이라고도 불리는 칠살은 여성이 자신의 삶에 들인 두 번째 남성, 즉 브론스키로 상징된다. 안나의 입장에서 남편 카레닌은 정관(正官)이라 할 수 있는데, 그녀는 이 정관의 자리를 과감히 버리고 편관의 뜨거운 손을 잡는다. 흔히 남자에게 정재는 부인, 편재는 애인이 되는 것처럼 여성에게도 정관이 남편, 편관은 애인이 되는 구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한 사주 내에 정관과 칠살이 혼재하는 관살혼잡의 상황이 펼쳐지는데, 이는 전통 명리에서 여성에게 이성과의 관계에서 큰 혼란과 갈등을 야기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 안나는 남편과 연인 사이에서 양립 불가능한 선택의 갈등을 겪고, 두 관계 모두 온전히 갖지 못한 상태로 심각한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한편, 안나의 십성 중 식신(食神)과 재성(財星)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약하거나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식신은 삶의 안정감과 꾸밈없는 행복을 뜻하고 특히 여성에게는 모성적 만족이나 자녀와의 행복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안나는 자기 친아들 세료자를 끔찍히 사랑하면서도 결국 그 곁을 떠나게 된다. 안나는 식신이 주는 평온함보다는 상관과 칠살의 격정에 이끌려 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재성은 여성에게 물질적 안정과 현실 감각을 주지만, 안나는 부와 지위(높은 재성의 삶)를 버리고 사랑을 택함으로써 현실적 안정과 기반을 포기한다. 이러한 십성의 불균형은 그녀를 극단적 선택으로 몰고 가는 심리로 이어지는데, 즉 삶의 인성(印星)적 지지나 이성적 자기 보호 장치가 부족한 채 오직 사랑이라는 관성에 삶을 의탁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안나는 자기 파멸로 치닫는 상관견관(傷官見官)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상관의 자유분방함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해서 나타나는 비극적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안나의 삶을 격국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녀의 명식은 마치 상관격 혹은 편관격으로 설정된 듯한 구조를 가진다. 상관격이라면 뜨거운 불기운의 일간(日干)을 두고 목(木)이나 화(火)로 생조된 식상(食傷)이 왕성하여, 사회적 규범(관성)을 누르고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는 구조일 것이다. 반면 편관격으로 보면, 그녀의 삶에 등장한 강렬한 사랑(브론스키)이 칠살로 작용하여 일생을 뒤흔드는 주체가 된다. 두 경우 모두 안나는 평범한 정관격의 안정된 삶을 유지하지 못하고, 파격과 위험을 내포한 격국의 운명을 산 셈이다. 그녀의 삶을 사주로 비유하면, 차갑고 기나긴 러시아의 겨울밤(金水)의 기운 속에 홀로 있던 화롯불(火)과 같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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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결혼 생활에서 안나는 정숙하고 차분한 삶을 살았지만, 그것은 마치 혹한의 겨울 속에 갇혀 있던 촛불과도 같았다. 이 불꽃을 활활 타오르게 해 준 것은 브론스키라는 목생화(木生火)의 등장, 즉 애정과 젊은 열기였다. 목의 요소는 불을 생하고 키우니, 젊은 장교의 구애와 열정이 안나의 내면 불길을 거세게 지펴 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브론스키는 오행상 목의 기운을 가진 남자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용신이 되어야 할 목·화의 기운이 지나치게 왕성해지자 오히려 원국의 안정을 깨트리고 기존 구조와 충돌하게 된다. 특히 안나의 원국에 강하게 깔린 금수(金水)의 기운―남편 카레닌의 엄격한 도덕심과 차가운 사회의 시선―과 새로 타오른 목화(木火)의 기운이 격렬히 충돌하며 그녀의 격국은 파격(破格)에 이르게 된다. 카레닌과 브론스키, 둘의 관계는 마치 금목상쟁처럼 보인다.


만약 안나의 사주에 이러한 충돌을 중재할 토(土)의 용신이나, 냉혹한 현실을 부드럽게 완화할 인성의 용신이 충분했다면 그녀의 선택과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토는 화와 금의 대립을 조율하여 가정을 지켜내는 힘이 될 수 있고, 인성(특히 정인正印)은 상처 입은 마음에 치유와 용서를 불어넣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안나가 출산으로 위독한 상황이 되었을때 카레닌이 보여준 기적 같은 용서와 연민은 관생인의 구조로 마치 잠시나마 인성 용신이 작동한 순간처럼 보일수도 있는 것이다. 상관은 종종 이중인격자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 안나는 자신을 용서하는 카레닌에게 자기 안에는 또 다른 안나가 있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실로 상관의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안나는 그 용서를 받아들이기엔 이미 상처와 정열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끝내 용신의 힘을 생활 속에 정착시키지 못한 채 격국의 파국을 맞이한다. 안나의 인생 경로를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초년의 평탄함 → 중년의 불길한 사랑 → 말년의 파국으로 요약된다. 처음 몇년간 그녀는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들 사이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렸으나 이는 격국상 필요한 기운이 억지로 눌려 있던 정체된 운이었다.


브론스키를 만난 것은 운세 대운에서 갑자기 찾아온 상관대운이나 도화살 운에 해당할 것이다. 이 시기 그녀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따라 비약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안정된 세계가 무너지는 전환기를 맞는다. 불균형하게 기울어진 사주의 구조는 결국 극단으로 치달아, 안나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의 터널로 이끈다. 이는 마치 사주의 한 오행 기운이 과도하여 다른 기운을 완전히 제압할 때 오는 파국과 같다. 안나의 경우 사랑과 열정(火木)이 현실과 이성(金水)을 완전히 압도했고, 끝내 자신을 태워버린 불꽃처럼 삶을 스스로 마감하고 만다.


안나의 사주는 마치 한겨울의 찬 기운 속 외롭게 놓인 불과 같다. 초기의 그녀는 차갑고 질서 정연한 상류 사회(금수 기운)에서 역할에 충실한 아내로 지냈다. 이것은 조후적으로 보면 한겨울 혹한에 작은 불씨를 간신히 유지한 상태로, 바깥은 춥지만 내적으로는 온기를 갈망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찾아온 브론스키와의 사랑은 맹렬한 불기운으로 그녀의 삶에 번져나갔다. 이는 혹한의 겨울에 갑자기 따뜻한 봄바람이 불며 불씨가 거대한 불길로 번진 격이었다. 시기적으로 안나에게 사랑의 만남은 일종의 운기 조절 작용이었는데, 실제로는 안나의 영혼의 냉기를 녹여주는 따뜻한 용광로와 같았다. 사랑에 빠진 안나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생기를 얻고 삶의 전부를 브론스키와의 사랑으로 채웠다고 할 만큼 위험한 열정에 몰입한다.


그러나 조후의 균형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리면 부작용이 오듯, 지나친 화기가 그녀 삶을 태우기 시작했다. 불은 크게 타오를수록 주변의 산소를 소모하고 결국 스스로도 꺼지기 마련이다. 안나가 사랑에 몰입한 나머지 아들부터 사회적 지위까지 모두 포기하고, 오직 브론스키만을 바라보게 된 점은 그녀 삶에서 화기가 토양도 태워버리고 물기도 말려버린 형국이다. 이때부터 안나의 운세 곡선은 불안정한 진폭을 그리기 시작한다. 사랑의 열정으로 행복감에 차올랐다가도, 조금만 브론스키의 애정이 식어 보이면 곧바로 극도의 불안과 질투에 괴로워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 고립은 다시 그녀 주위에 냉혹한 금수의 한기를 가득 채우게 된다.


이 두 기운이 충돌하면서 안나의 정신은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조후적으로 볼 때, 그녀에게는 불을 조절해 줄 차가운 물(이성)과 불을 지켜줄 완충의 흙(현실 기반)이 모두 필요했지만, 이미 흙은 다 태워졌고 물은 증발해버린 상태였을 것이다.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졌을 때가 운세의 정점이었다면, 이후 결혼 생활의 파탄, 출산 후의 불안, 사회적 고립 등의 사건이 연이어 닥치며 급속한 추락이 시작된다.


마지막에는 극심한 절망 속에 환각과 망상까지 겪으며 삶의 의지를 잃게 되는데, 이는 명리에서 말하는 겁살(劫殺)의 시기와도 같다. 겁살의 기운은 외부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기고 위협받는 운을 뜻하는데, 실제로 안나는 사랑도 행복도 사회적 명예도 모조리 잃고 극단적 선택으로 생명까지 잃게 된다. 안나의 자살은 운세 곡선이 마침내 바닥을 친 지점으로, 불기운이 암흑 속에 완전히 사그라든 순간이다. 이처럼 안나의 삶은 뜨겁게 타올랐다가 한순간에 꺼지는 화(火)의 일생으로 비유되며, 명리학적으로는 조후와 기세의 극심한 불균형이 부른 비극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안나에게는 도화살(桃花煞)이 강하게 있는 것 같다. 도화살은 사람을 매혹하고 이성의 눈길을 끄는 아름다움과 치명적 로맨스를 뜻하는 별로서, 안나는 등장부터 반짝이는 눈빛과 미소로 모든 이를 매료시키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미남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 톨스토이의 작품속 잘생기고 예쁜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평탄한 삶을 사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어쨌거나, 안나의 도화적 매력은 브론스키를 운명처럼 끌어당겨 불같은 사랑에 빠지게 했지만, 동시에 이것이 불륜이라는 사회적 낙인을 찍으며 파국의 씨앗이 된다. 도화살이 과하면 정욕과 스캔들로 망신을 당한다 하였는데, 안나는 결국 사교계에서 손가락질받고 평판이 추락하는 망신살(亡身殺)의 흉화도 피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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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의 최후에는 겁살(劫殺)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겁살은 강탈당하고 위협받는 불운을 상징하는 별로서, 안나는 마지막에 자신이 누리던 모든 행복을 운명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사랑의 대상이었던 브론스키의 마음마저 자신에게서 멀어져 간다고 느낀 그녀는 극도의 공포와 절망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이는 겁살의 에너지가 자아마저 파괴하는 결과로 볼 수 있다. 한편, 그녀가 택한 죽음의 방식이 기차에 몸을 던지는 것이었다는 점도 상징적이다.


기차는 끊임없이 달리는 쇳덩어리로 역마살(驛馬煞)과 금(金)기운을 모두 지닌 상징인데, 역마살은 빠른 변화와 이동, 통제 불능의 운명을 의미한다. 안나의 삶은 사랑을 따라 러시아를 떠나 외국을 떠돌고 다시 돌아오는 등 역마의 경로를 밟았고, 마지막 순간에도 달리는 기차라는 역마의 상징 앞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는 그녀의 운명이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끝내 파국으로 치달았음을 나타낸다. 요컨대 안나 카레니나의 운명은 도화살로 시작해 망신살과 겁살로 끝나는 흐름으로 점철된 것이다. 젊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찾아온 숙명적 사랑은 달콤한 도화의 꽃이었지만, 사회적 굴레와 충돌하며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치명적인 폭풍이 된 것이다.


P. S: 이 글을 쓰면서 1998년 소피마르소가 주연한 영화를 다시 봤는데, 브론스키역을 했던 배우는 숀 빈이었다. 왕좌의 게임에 나왔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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