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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야 May 20. 2022

5. 스페인에서 얼굴이 마비되었다.

[스페인, 가슴이 이끄는 곳] 1부. 말라가 교환학생 이야기

[스페인, 가슴이 이끄는 곳]

1부 - 말라가 교환학생 이야기

 1-5. 스페인에서 얼굴이 마비되었다.


*BGM:: El triste - José José*






 나의 말라가 첫 보금자리에서의 첫째날. 짐을 정리하고 볼 일을 보고 오느라 늦은 밤 도착하게 되었다. 주인아주머니는 그런 나를 위해서 피자 몇 조각과 파인애플 주스를 테이블에 미리 준비해 주셨다. 그녀의 따뜻한 맞이에 이곳에서 지낼 일이 더욱 기대되었다.


그녀에게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딸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대략 우리 엄마와 비슷한 연배이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스페인에 오기 전, 나만의 '교환학생 버킷리스트'를 작성했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스페인 가족 만들기. 왠지 그녀가 내 스페인 엄마 같은 존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김칫국을 미리 마셔보았다.


피자를 먹으면서 스페인어가 들리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니 해외에서 살고 있음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토록 꿈꾸던 순간이었다.


누군가 내게 스페인이 좋은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첫 번째 이유를 '스페인식 스페인어'가 너무 좋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언어를 원체 좋아하는 나인데, 스페인어는 조금 더 특별하다. 리드미컬하고 흥겨운 스페인어 억양이 들리면 행복해지며 스페인어로 떠드는 내 모습이 너무 좋다. 하나의 언어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자아를 갖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스페인어를 할 때의 나는 목소리 톤도 한껏 높아지고, 좀 더 활발한 또 다른 내가 되는 기분이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주인아주머니는 집 구경을 한번 더 시켜주며 이것저것 생활 규칙이나 필요한 사항들을 설명해주셨다. 그녀는 나를 위해서 미리 장을 봐서 먹을 음식도 마련해주셨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은 언제든 먹고 싶을 때 꺼내먹으라는 말도 빼놓지 않고 말이다. 내가 운이 좋은 것일까? 아니면 말라가 사람들이 다 이렇게 친절하고 마음씨가 고운 것일까? 타지에서 느끼는 따스함은 언제나 배가되어 다가온다.


미식과 요리에 관심이 많은 나는 현지인의 냉장고를 들여다보는 일도 무척이나 즐겁고 흥미로웠다. 더운 남부 지방에서 자주 먹는 차가운 토마토 수프인 살모레호와 다양한 과일, 그리고 늘 채워져 있는 다양한 맛의 요거트들. 내일 아침이 밝으면 가장 먼저 집 근처의 대형마트인 메르까도나에 가야지.







 그리고 대망의 내가 지낼 방. 사실 넓지는 않지만, 창문 너머로 바다가 내다보이는 뷰가 마음에 들었고 꽤나 적당한 사이즈의 침대와 수납공간이 넓은 붙박이장이 만족스러웠다. 나는 한국에서 덮을 이불을 미리 가져왔으나 첫날밤은 너무 피곤해서 이미 덮혀진 다소 낡아 보이는 이불을 덮고 자기로 했다. 그리고 이것이 화근이었다.


자는 내내 온몸이 간지러웠다. 아직 더운 말라가라 모기이겠거니 생각하며 애써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간지러웠던 부위들을 살펴보니 생전 처음 보는 빨간 점의 자국들이 줄줄이 나있는 것이다. 놀란 나는 바로 네이버에 검색해보았고, 이는 말로만 들어봤던 '베드 버그'의 흔적이었다.


오 마이 갓... 나는 급히 아주머니께 이를 알렸고, 벌레는 결국 발견하지 못했지만 아주머니는 매트리스, 커튼, 책상까지 모두 새로 사서 바꿔주셨다. 괴팍한 집주인, 돈을 떼먹는 집주인들도 종종 있다던데 적어도 나는 참 좋은 분을 만났음에 감사했다.


그런데 더 큰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일이 있고 다음날, 여느 때와 같이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양칫물을 뱉는데 물이 입 한쪽으로만 흘렀다. 세수를 하는 한쪽 눈은 잘 감아지지 않아 따갑고 말이다. 내가 잠이 덜 깼나? 하며 화장을 하려는데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얼굴 반쪽이 마비되었다.'


그렇다. 정확히 자로 잰 듯이 얼굴 한가운데를 기준으로 오른쪽이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이마, 눈썹, 입술, 하물며 콧구멍 마저도. 너무 당황스러워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도 바닥에 떨어뜨렸다.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도무지 현실감각이 없었다. 또다시 네이버에 증상을 검색해보았다. 그랬더니 나오는 결과는 '구안와사'.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병명이었다. 대학 동기가 찬 바닥에서 자서 며칠 입 돌아갔다던 얘기는 들어봤지만, 입도 아니고 얼굴 반이 마비되는 병이라니. 원인과 치료법을 열심히 검색해 보았으나 대부분 한의원에서 치료해야 한다는 말, 게다가 완치까지는 몇 달이 걸리며, 심지어 여전히 후유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꽤나 많았다. 덜컥 겁이 났고 온갖 걱정을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아니야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혹시나 안 고쳐지면 어쩌지? 취업, 결혼은 할 수 있을까?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당시 병원에서 받은 처방전



 나는 곧장 엄마에게 전화로 상황을 알렸고, 엄마는 나를 달래며 일단 근처 병원으로 당장 가보라고 하셨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직 의지할 사람도 한 명 없는 이곳에서 살면서 가장 큰 병을 겪다니. 너무 무섭고 서러웠다.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마음이 착잡했다. 아직 스페인어를  못하는데 의사 선생님과 소통은 어떻게 지에 대한 걱정이 덜컥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나마 친한 마리오에게 바로 이를 알렸고, 고마운 마리오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오겠다고 해주었다.


도착한 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아셨고, 얼굴이 사색이 된 나와는 다르게 태평한 얼굴로 심지어 웃기까지 하면서 진찰을 하셨다. 병의 원인은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로 인한 면역력 저하 및 베드 버그로 인한 바이러스 쇼크. 그녀는 내게 2주간의 약을 처방해 줄 테니 이를 섭취하며 반드시 금주 및 차가운 물이나 음료, 카페인도 피하라고 하셨다. 매일 파티가 열리는 교환학생 2주 차에 이 무슨 고난이란 말인가. 내가 하도 불안해 보였는지 그녀는 너무 걱정 말라며 영양 섭취를 잘하면서 약을 다 먹으면 다 나을 거라고 말했다.


병원에서 나와 마리오를 만났다. 그를 보자마자 반가움과 고마움에 다리 힘이 털썩 풀렸다. 내가 너무 무섭다고 하자 그는 내게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언제 네가 이런 병을 스페인에서 겪어보겠어."라고 했다. 순간 나를 놀리나? 싶었지만, 이 정도로 스페인 사람들은 낙천적이다. 특히 남부 지방 사람들은 더더욱. 그래도 덕분에 마인드 컨트롤이 좀 더 쉬워지긴 했으니 고마워해야 하나.







 그렇게 나는 2주간 탄단지를 골고루 잘 챙겨 먹으며 약을 꼬박꼬박 먹었다. 다만 매일 열리는 교환학생 파티는 빠지지 않으며. 얼굴이 창피하고 우울하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초반에 친구들을 사귀고 최대한 모든 순간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모두가 맥주를 마시는 동안 나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흥에 취했다.


다행히도 정말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매일 볼 때마다 그들은 내게 오늘 상태가 더 좋아진 것 같다며 위로해주었다. 그 덕분에 정말 신기하게도 나는 정확히 2주 치의 약을 모두 다 섭취한 뒤, 안면마비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내 교환학생 6개월 중 가장 큰 위기이자 인생을 통틀어 제일 끔찍하고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사건이다.


지금은 이렇게 웃으면서 회상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정신적으로 정말 고통스러웠다. 친구들과 있을 때는 애써 밝아 보이려 하고, 평소에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지만 종종 혼자 있을 때는 눈물을 쏟아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더욱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게 되었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외치는 주문도 하나 생겼다.



"괜찮아. 적어도 더 이상 안면 마비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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