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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석문 Jun 22. 2022

고요의 바다

    그녀는 자화상을 들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스케치 북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가장자리에 빙 둘러 서 있었다. 상기되거나 즐거워 보이는 표정들 사이로 미술 교사는 2B 연필로 소묘한 얼굴들을 유심히 살피며 걸었다. 학생들은 교사의 지시에 따라 서로 자리를 바다. 모두 교실 앞 쪽 첫 번째 자리를 원했다. 등의 자리였다. 앞으로 올라가는 얼굴은 미소와 부끄러움을 뒤로 내려가는 얼굴은 아쉬움과 실망감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가끔 교실 뒤 쪽에서 앞 쪽으로 한 번에 크게 자리를 이동하는 얼굴이 있으면 학생들은 믿기 어려운 묘기를 본 것처럼 놀라움과 동시에 부러운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그녀는 중간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앞 쪽으로 이동했다. 이제 그녀 앞에는 몇 명 남지 않았다. 미술 교사는 그녀의 자화상을 한참 들여다보며 난처해했다.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음영 표현도 세부 묘사도 아쉽고..... 분명 잘 그린 건 아닌데, 똑같네."

미술 교사는 그녀의 팔을 끌어다 그녀를 맨 앞자리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학생들 중 한 아이가 불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쟤는 그리기 쉬운 얼굴이잖아요."

그녀는 스케치북을 돌려 자신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새벽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여름의 이른 새벽은 다른 계절과 다른 특별함이 있었다. 차가운 밤 기운과 숨 막힐 듯한 한낮의 더위를 예견하는 뜨거운 기운이 조화를 이루었다. 그녀는 매일 같은 시간 그 공기를 마시며 집을 나서는 것이 좋았다. 그녀처럼 출근을 위해 광역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정류장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미묘하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눈을 카메라의 뷰 파인더가 유려하게 움직이듯이 자신의 눈에 담아냈다.

   그 해 여름이 끝날 무렵, 그녀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가족들에게 암에 걸렸단 사실을 숨기고 손을 쓸 수 없게 될 때까지 방치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감정을 투명하게 드러내 맑은 계곡 물을 보는 것 같이 누구라도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모든 감정에 반응하고 동시에 반작용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잔잔한 호수 같았다. 작은 모래알도 커다란 돌덩이처럼 큰 파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누구도 해치거나 다치게 하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를 상처 입혔다. 그녀는 피 흘리며 상처를 연신 핥아대는 연약한 짐승을 떠올렸다. 차라리 그가 다른 누군가를 다치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다정했던 것만큼 종종 적의를 드러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수평선을 응시하듯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그녀의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고요의 바다가 있다며 말갛게 웃었다.

   국화 한 무더기가 쑥스럽게 웃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의 사진 앞에 놓여있었다. 조금씩 커지는 국화 더미가 마치 무덤처럼 보였다. 그 곁에서 그녀의 고모는 어린 시절 오빠와의 추억을 토해내 듯 풀어놓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똑똑하고 공부도 잘했던 여동생이 대학에 꼭 가야 한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고모의 뒷바라지를 했는데, 서울로 대학을 간 자신을 가끔 찾아와 자장면도 사주고 용돈도 주며 살뜰히 챙겼다고 했다. 하루는 동물원에 데려갔는데 사실은 오빠가 나보다 더 즐거워 보여 그렇게 미안했었다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알 수 없는 낡은 자전거를 가져와 그럭저럭 굴러가게 고쳐 같이 논길을 달릴 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기억과 추억들이 고모의 두 눈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러다 고모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보며 말했다.

   "너는 눈물도 참 없구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두 눈으로 고모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비치지도 않았다.

   장례식장에는 조문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거기에 그녀가 아는 아버지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뿌옇게 비추어진 소주잔을 서로 주고받았다. 술잔이 부딪히고 흔들리며 술이 흘러내렸다. 대수롭지 않게 흔들어 털어내거나 옷에 슥슥 문질러 닦아냈다. 그 자리에는 여전히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남아 있었다.

 

   쌀쌀한 바람이 강해다. 곧 겨울이 온다는 신호를 알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사를 앞두고 방에서 책 장을 정리했다. 대학 전공 서적이며 자격증 시험서, 소설 등의 다양한 책들이 포개어지기도 하고 반쯤 누운 채로 조금씩 섞여 꽂혀 있었다. 책 장 맨 아래층에는 평소엔 잘 꺼내보지 않는 사진첩이나 노트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 있었다. 그녀는 모두 꺼내 한 권씩 닦았다. 그러다 사진첩 밑에 깔려 잘 보이지 않던 낡은 스크랩 북을 발견했다. 오래된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마도 본가에서 나올 때 잘못 가져온 아버지의 물건인 것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스크랩 북을 펼쳤다. 매캐한 종이 냄새가 코 끝을 스쳤다. 그 안에는 수 십 년 전 신문 기사들이 깔끔하게 오려져 정리되어 있었다. 대부분 오래된 신문들이라 신문지는 누렇게 변색되어있었다. 가끔 어떤 기사에는 붉은색 펜으로 동그라미나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주로 세계의 문화나 풍물에 관한 기사들이었다. 한참을 넘기자 동물과 식물들 그리고 과학 기사들도 있었다. 기사에 첨부된 사진들은 흑백인 데다가 화질도 좋지 않아 대부분 정확히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다 유난히 눈에 띄게 커다란 기사를 보았다.

'인간 달을 딛고 서다. 1969년 7월 21일 상오 11시 56분 31초. 작은 한 발짝, 인류엔 큰 도약. 숯가루처럼 부드러워 발이 쑥쑥 빠진다.'

기사는 헤드라인 아래로 그 순간의 흥분과 감동을 감추지 못하고 달 착륙에 관한 내용들을 자세히 싣고 있었다. 그녀는 기사에 첨부된 흑백 사진을 보았다. 달 표면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우주 비행사의 사진이었다. 사진의 뒷 배경에는 흐릿한 명암으로만 처리된 '고요의 바다'가 보였다.

   그 해 겨울 그녀는 그를 영화 동호회에서 만났다. 서울의 어느 카페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은 영화에 대한 지식과 애정을 쉴 새 없이 주고받고 있었다. 그녀는 TV 프로그램을 구경 온 방청객처럼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들만큼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영화관 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좋았다. 영화를 시작하기 직전 암전의 순간은 그녀에게 평온함을 주었다.

   그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평소보다 얼굴이 더 붉어졌던 날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졸업>이라고 했다. 더스틴 호프먼의 권태로운 눈과 마지막 씬의 호기심과 불안으로 가득 찬 눈이 그를 사로잡았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이전에 몇 번의 연애를 했다. 그녀의 곁을 떠났던 그 누구매번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대개 얼버무리거나 침묵했다. 가끔은 그녀의 무심함을 탓했고 부족했던 관심과 사랑 때문이라고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그들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막연한 호기심과 환상, 결핍, 열등감, 성욕이 혼재된 어딘가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영화 동호회에서 만난 그는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만났던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어색한 친절함을 보이지 않았다. 출입문을 굳이 먼저 열어주거나 식사 테이블에 수저를 가지런히 놓아주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음식을 덜어주거나 티슈를 챙겨주지 않았다. 뜻 모를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는 숙련된 배우처럼 애쓰지 않았다. 훌륭한 연기는 억지로 꾸며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그녀가 그의 수저를 챙기면 그는 그녀의 물 잔을 채웠다. 접시가 비어 있으면 각자 알아서 음식을 덜거나 서로 적당히 채워주었다. 그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 항해한 노련한 뱃사람들처럼 몸 짓이나 말없이 부족한 부분을 찾아 착착 해냈다. 듣기 좋은 음악의 화음 같았다. 그녀는 그와 꽤 잘 어울린다고 여겼다.

   처음으로 가 본 그의 방은 그 무엇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일관된 블랙 톤의 가구들은 자리를 지키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흔한 액자나 벽걸이도 최소한의 실내 장식도 없었다. 조화로움과 엄숙한 질서가 느껴졌다. 가톨릭 수도사의 방 같았다. 그의 얼굴도 그랬다. 과장되거나 절제하지 않는 표정이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속을 좀처럼 들여다볼 수 없는 깊은 동굴 같았지만 그의 미소는 정돈되어 있고 아름다웠다. 그는 말을 삼키지 않았다. 필요할 땐 부드럽게 뱉을 줄 알았다.

    이듬해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 저녁노을이 지던 때 그녀는 그의 방에서 깨어났다. 그는 침대 옆 테이블에 꼿꼿이 앉아 앞으로 자신과 같이 살아가겠냐고 물었다. 그들 사이에 부드러운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이대로 시간이 잠시 멈춰도 괜찮을 것 같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소리 없이 끄덕였다.


   그녀는 그와 결혼했다. 소박하고 단정한 결혼식이었다. 그들 모두 가족과 지인들이 많지 않았기에 식장은 하객들로 크게 붐비지 않았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결혼식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간소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연애 시절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보다 그 점이 좋았다. 누군가는 정체된 일상에 짓눌려 쉽게 권태를 느끼지만 그녀는 오히려 안온함을 느꼈다. 그녀는 그도 같은 생각을 할 거라 여겼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를 처음 만나고부터 지금까지 그는 특별한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다. 연애를 할 때도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지낼지, 하나부터 열까지 그녀가 결정했다. 그녀가 그 일을 반드시 원하거나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둘 중 누군가는 꼭 해야 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업무의 일부처럼 효과적으로 해냈다.

   그는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다. 커피 포트의 끓어오르는 요란한 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오던 이른 아침이었다. 잠에서 막 깨어난 그녀를 보며 그는 아이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녀가 한 번도 그에게서 들어본 적 없는 톤의 말투였다. 그녀는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뜨거운 물이 완성됐다는 커피 포트의 알람 소리가 부엌에서 연신 울려댔다.

    그는 연애를 하던 때나 신혼 초에도 아이를 갖는 일에 관심을 보이거나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렸고 지금과 대조시켰다. 친근한 기시감은 온 데 간데없고 낯선 이질감이 밀려왔다. 영문도 모른 채 낯선 장소에 끌려 온 사람처럼 그녀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가 아이를 특별히 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되어 아이를 돌보고 책임지는 일을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문제가 없다고 해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를 잘못 판단한 것인지 갑자기 변해버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서로 원하는 것이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었다. 그 간극은 우주의 이 끝에서 저 끝에 이를 만큼 먼 거리일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작은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잡동사니가 쌓여 있던 방은 이제 그의 독차지가 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가뒀다. 대화는 없었다. 그림자조차 서로 닿지 않았다.  신호가 기계적으로 옮겨 가 듯 꼭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 오갔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마치 자신의 소행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그 감정이 온전한 것인지 자꾸만 되새겼다. 그럴수록 가슴 한 곳에 깊숙이 각인되는 것 같았다.

   희뿌연 안개로 가득했던 새벽에 그는 그녀에게 이 집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고 했다. 그 여자도 아이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손에는 캐리어가 들려있었다. 그 캐리어는 무척 컸다. 그녀는 거칠게 요동치는 그녀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다. 살아남기 위해 이렇게까지 심장이 처절하게 뜀박질을 해야 했는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이내 그녀의 불규칙한 호흡 소리가 심장 박동과 엉키기 시작했다. 완전히 뒤엉켜 풀어낼 수 없는 실뭉치 같았다.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그녀는 몇 가지 없는 표정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좋은지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몸으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안간힘을 써서 두 팔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호기심과 불안이 넘실거렸다.

   이혼 조정 과정은 빠르게 진행됐다. 그들은 모든 것을 변호사에게 위임했다. 서로 마주칠 일조차 없었다. 가능한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됐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어야만 했다는 듯 너무나 쉽게 흘러갔다. 그렇게 그녀는 이 십 개월 간의 결혼 생활을 끝냈다. 그녀에게 남은 건 한 줄의 문장뿐이었다.

   회사 동료들은 이제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다루 듯이 그녀를 대했다.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고 친절했다. 그들은 지나치게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 몸짓을 쉽게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불륜'이나 '외도'라는 단어를 소리 낸 적이 없었지만 어느새 귀에 와닿아 있었다. 그녀가 겪은 고통과 기억들은 증발되어 타인들은 볼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가십처럼 내뱉는 그 말들에 대해 그들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그들의 시선이 닿으면 작은 초식동물처럼 움츠러들었다. 타인의 사소한 짓에 그녀의 몸은 작게 떨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럴 때면 그녀는 여름의 새벽 공기를 떠올렸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뒤섞인 공기를 폐가 터질 듯이 가득 들이마셨다가 한순간 뿜어낼 때 전해지는 통증을 생각했다.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도무지 사그라들지 않았다.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이 하늘을 빈틈없이 채웠다. 거리는 평소보다 한산했다. 그녀는 예전부터 친구들과 자주 모였던 카페에서 그들을 만났다. 그곳은 아이들의 아지트처럼 세련되지 않았지만 포근했다. 카페의 중앙에는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손님들은 바닷가의 바위 구석에 조밀하게 붙어있는 따개비처럼 모여 있었다. 거친 파도에도 쓸려 나가지 않을 것 같았다. 선희, 은수, 영애는 그녀의 유일한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고등학교를 함께 다니고 졸업했다. 그들은 다른 행성에서 온 생명체들처럼 서로 달랐다. 다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일상적인 모임인 것처럼 자연스러웠지만 그 이유를 모두 알고 있었다. 누구도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다.

   카페 직원은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커다란 팥빙수를 가져왔다. 팥빙수의 아래쪽은 얼린 우유를 곱게 갈아 새하얀 눈꽃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 같았다. 그 위에 끈적하게 윤기 나는 팥과 알록달록한 젤리가 한가득 올려져 있었다. 꼭대기에는 달팽이 집처럼 떠서 올린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더해져 있었다. 너무 예뻐서 손을 대면 망가져 버릴 것 같았다. 가능한 본래 형태를 유지하려 숨 죽이며 조심스럽게 떠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여지없이 모두 섞여 엉망진창이 되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그 빙수를 계속 나눠 먹었다.

   단조로운 침묵과 간헐적인 웃음, 소곤거리는 말소리를 뚫고 선희가 눈썹을 힘껏 모으며 선언하듯 말했다. "좋은 남자 소개해줄게" 카랑카랑한 선희의 목소리는 작은 시골 마을의 종소리처럼 카페 곳곳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는 선희의 손을 느꼈다. 그 손은 유난히 작았다. 그녀의 창백한 긴 머리카락에서 따뜻한 마찰음이 들렸다. 선희는 그녀가 아무 말도 없이 어딘가를 응시할 때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신입생 때 선희와 도서부 활동을 같이 했다. 부원들은 돌아가며 도서대출을 관리했는데 그녀가 담당이던 날 책 두 권이 분실되었다. 도서부 선배들은 그녀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분실된 책을 책임지고 채워 놓으라고 했다. 도서 분실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사고였지만 선배들은 그녀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사라진 책의 행방인지 다른 무엇인지 그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때 선희는 그녀의 곁에 함께 서서 그녀의 머리를 작은 그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선희는 다음 날 사라진 책 두 권을 들고 도서실에 나타났다. 선배들 앞으로 다가가 새에게 모이를 주듯 한 권 씩 차례로 던졌다. 그리고 다시는 도서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선희의 선언이 끝나자마자 친구들은 그녀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달리기 주자들처럼 앞다투어하고 싶던 말들을 쏟아냈다. 그를 향한 험담도 그 순간만큼은 그녀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카페는 에스프레소 머신이 뿜어내는 기계 소리와 쏟아지는 수돗물 소리로 가득 찼다. 믹서기의 둔탁한 진동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녀는 잔뜩 웅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은수를 보았다. 은수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는 은수의 곁으로 다가가 나란히 앉았다. 은수의 긴 생머리는 조금 전에 만났을 때보다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머리를 묶고 있던 검은색 머리끈을 풀어내 은수의 머리카락을 한 올도 빠짐없이 모아 묶었다. 그러자 은수의 눈물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눈에 은수의 눈물이 비쳤다.

  그녀는 은수를 처음 보았을 때 귀여운 다람쥐를 떠올렸다. 조그만 얼굴에 눈, 코, 입이 빈틈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그란 입술이 말할 때면 도토리 껍질을 벗겨내듯 바삐 움직였다. 어느 날 은수는 교실에 앉아 공부하는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더니 머리카락이 꼭 미역 줄기 같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틈만 나면 머리 끈과 머리띠를 챙겨 와 그녀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머리 모양은 은수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곤 했는데 대부분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은수는 입버릇처럼 현모양처가 되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 현모양처가 꿈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면 은수는 동그란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 누구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은수는 팔짱을 끼며 코를 찡긋거렸다.

   은수는 남아 있는 눈물을 훔쳐냈다. 그녀를 보기에 민망한 듯 애써 웃어 보였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길게 팔을 뻗어 은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은수에게 딸아이의 사진을 보고 싶다고 했다. 은수의 얼굴에 이제 막 햇살이 드리웠다. 은수는 스마트 폰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흡족해하며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다. 양 갈래로 곱게 땋은 머리를 한 여자 아이가 그녀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는 은수가 딸아이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땋아 주는 모습을 떠올렸다. 은수의 그 손길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했다. 어쩌면 은수의 꿈은 사랑하는 이들을 돌보고 위로하며 지키는 일인지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꿈이 어린 시절 아버지와 유원지에 놀러 갈 때면 그녀에게 사주었던 솜사탕 같다고 느꼈다. 노랑, 빨강, 파랑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솜사탕은 입 안에 희미한 달콤함을 남긴 채 녹아 없어졌다. 그 달콤함을 그녀는 가능한 오래도록 기억해내려 애썼다.

   카페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빈자리를 남기고 떠나갔다.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도 차츰 어두운 밤에 녹아 내려갔다. 선희와 은수도 그들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돌아갔고 카페에는 영애와 그녀만이 남아있었다.

   영애는 이 년 전 이혼했다. 영애는 이제는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 잔을 무척 중요한 물건인 양 움켜쥐고 있었다. 비어있는 커피잔을 보고 카페 직원이 다가와 리필할 의사를 물었다. 영애는 괜찮다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영애의 좁은 어깨가 옅은 한숨을 쉬 듯이 미세하게 들썩거렸다. 그녀는 영애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맞추었다. 서로를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영애는 해가 지고 어두컴컴한 밤의 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영애가 보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들은 다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거리를 바삐 지나가는 행인들과 도로 위의 차량들이 일상적인 풍경을 연출하며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영애는 이윽고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작은 펜던트가 달린 빛바랜 은색 목걸이를 풀어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그녀의 손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녀는 동그란 펜던트에 무언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섬세하게 필기체로 쓰인 문장이 있었다.

   'nec spe, nec metu.'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영애를 보았다. 영애는 창 밖을 내다보며 나지막하게 읊조리 듯 말했다.

   "꿈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카페 직원들은 마감을 앞두고 분주하게 오갔다. 그들은 내일 다시 이곳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떠나간 그들의 자리를 정리할 것이었다. 카페를 함께 나서면서 영애는 이제부터 자주 보자고 했다. 그녀는 말갛게 웃었다. 그녀의 쇄골 사이에서 목걸이가 반짝거렸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 노트북을 켜 개인용 이메일을 확인했다. 한동안 읽지 않은 메일이 가득 쌓여 있었다. 첫 페이지 상단에 영화 동호회에서 온 메일이 있었다. 그녀는 꽤 오래전부터 읽지 않고 지웠다. 제목에 <퍼스트 맨>이란 단어가 눈에 띄었다. 메일에는 영화 관람 일정과 장소를 비롯한 다양한 안내사항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스크롤을 내리자 관람 예정인 영화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 <라라 랜드>로 잘 알려진 데미안 셰젤 감독이 연출한 <퍼스트 맨>이었다. '고요의 바다'에 내려 인류 최초로 달 표면을 밟은 루이 암스트롱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녀는 참석 여부를 알리기 위해 답신 메일을 작성했다. 그녀는 의자에 기대어 '고요의 바다'를 상상했다. 보고 싶었다.


   영화관은 달짝지근한 팝콘 향기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깔려 있었다. 그 위로 커다란 스크린에 고막을 때리는 듯한 소리와 현란한 영상이 펼쳐졌다. 상영이 예정된 영화 예고편이 줄기차게 흘러나왔다. 그녀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동호회 사람들은 중앙 로비 한편에 모여 있었다. 익숙한 얼굴도 있었고 낯선 이도 있었다. 한 중년의 남자가 오랜만에 오셨다고 말하며 반가움을 나타내려는 듯 푸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보다 작은 키에 진하게 화장을 한 여자는 그녀를 향해 씩씩하게 걸어왔다. 도드라진 눈 화장이 시선을 끌었다. 그리곤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 여자는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이 영화를 보는 게 두 번째이며 다시 보고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고 했다. 그 여자는 오늘 볼 영화의 감독이 누구인지 그의 전작을 본 적이 있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라라 랜드>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라라 랜드>의 흥행 성공 요인과 작품적 성취, 고전 할리우드 시기의 뮤지컬 장르의 가치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강연하듯이 말했다. 그 모습이 즐겁고 보람되어 보였다. 그녀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반 발 정도 뒤로 물러나 계속 들었다. 그 여자는 자연스럽게 <퍼스트 맨>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 여자는 루이 암스트롱이 자신이 이룬 업적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영광을 뒤로한 채 언론과 세간의 뜨거운 관심에 큰 부담을 느꼈다고 했다. 특히 말년에는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했는데 실제로 그 이유에 대한 추측만 난무할 뿐, 정확한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자신도 무척 궁금하다면서 덧붙이기를 중요한 건 아니지만 루이 암스트롱이 달 탐사를 준비하던 중 어린 딸을 잃은 사실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순간 멈칫거리며 어깨를 감쌌다. 그 여자는 어느새 동호회의 다른 사람과 마주 보며 대화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할 얘기가 끝났는지 그 여자는 아쉬워하며 그녀의 얼굴을 살피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 여자는 <퍼스트 맨>이 미국 내에서 전작만큼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 여론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이전 작품과는 전혀 다른 형식과 스타일의 영화이고, 달을 처음으로 밟은 최초의 인간이자 미국인인 루이 암스트롱의 영웅적 면모를 충분히 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여자는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며 안타까운 표정을 드러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머뭇거렸다. 이내 그녀의 화장기 없는 입가가 흔들렸다. 그 여자는 여전히 두리번거리며 입술을 끊임없이 달싹거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흔들리던 입가에서 또랑또랑한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

"원하는 걸 보여 주지 않았으니까요."

그 여자는 그녀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 끄덕거리더니 그녀를 보았다. 조금 전 보다 약간 높은 톤의 목소리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진한 눈썹이 씰룩거리며 크게 웃었다. 화장에 덮여 드러나지 않던 잔주름이 얼굴에 파여 있었다.

   그들의 뒤편에 설치된 입간판에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주인공이 진지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고유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팝콘의 고소하고 달큼한 향기가 점점 더 진해져 갔다. 빠른 숏으로 이어 붙인 영화 예고편은 더 큰 굉음과 시뻘건 화염을 뿜어냈다.

   상영 시간이 가까워오자 그녀는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각자의 리듬대로 자리를 채워 나갔다. 스크린에선 영화 예고편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 영화관 안내 영상과 주의사항이 나왔다. 곧 영화가 시작하려고 했다. 곧 조명이 모두 꺼지고 완전히 어두워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적막했다. 그녀는 그 짧은 찰나의 순간을 즐겼다.

영화는 어느덧 마지막 씬에 이르고 있었다. 달 착륙선이 굉음을 내고 요동치며 달 표면에 빠르게 다가갔다. 격렬한 진동이 계속되다 일순간 멈추더니 내려앉았다. 루이 암스트롱을 연기한 라이언 고슬링이 착륙선에서 사다리를 타고 천천히 내려왔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고요의 바다'였다. 그는 '고요의 바다'를 잠시 응시했다. 적막했다. 고독했다. 평온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아버지의 스크랩 북에서 본 흑백 사진을 떠올렸다. 그녀는 말갛게 웃었다.

   그는 착륙선에서 멀어지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지나간 자리에 발자국이 남았다. 그녀도 그 흔적따라 '고요의 바다'를 걷고 있었다.

  

   그녀는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다. 미묘한 새벽 공기는 평소와 같았다. 그녀는 인파에 섞여 광역버스에 올랐다. 자리에 앉았다. 평소에 가장 즐겨 듣던 곡을 골랐다. 그녀는 두 눈을 감은 채 음악에 집중했다. 귀를 따라 흐르던 멜로디는 그녀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그리곤 서서히 내려가 오른손에 이르렀다. 그 손은 무릎을 일정한 리듬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광역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정류장에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신호등 건널목 앞에 멈춰 섰다. 사거리에 놓여 있는 차량들과 인파는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각자 원하는 색을 보면 지체 없이 전진했다. 그녀는 그 뒤에서 숨을 고르고 천천히 나아갔다. 그녀의 어깨에서 베이지 색 숄더 백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팔을 올려 고쳐 멨다. 한 손으로 단단히 부여잡았다. 그렇게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낙엽들이 그녀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선선한 바람에 나부꼈다. 이른 아침의 뜨거운 햇살은 거대한 유리벽에 산란되어 불규칙적으로 퍼져나갔다. 그녀는 그 속으로 사라져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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