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석문 Jun 27. 2022

죄송합니다


   지하철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릴 때 내는 파열음은 묘한 쾌감을 준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가장자리에 앉는다. 내가 아는 한 최고의 자리다. 우선 한 편에 사람이 없고 손잡이에 머리를 기댈 수 있다. 지하철을 오래 타다 보면 졸다가 옆사람에게 민폐를 끼칠 수 있는데 이 자리는 그럴 확률이 낮다. 바로 맞은편에 50대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앉아 있다. 금테 안경, 갈색 폴로셔츠 위에 체크무늬가 들어간 아이보리 색 집업 점퍼와 밤색 바지를 입었다. 조금 과장하면 오늘도 스무 번 이상은 본 의상이다. 중년 남성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꾹 다문 두꺼운 입술이 검푸르다.

바로 옆에는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스마트폰을 우아한 몸짓으로 밀며 무료함을 드러내고 있다. 웨이브가 잘 들어간 갈색 단발머리에 본래 피부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메이크업이 조화롭다. 입술은 어울리지 않게 빨갛다. 오뚝한 코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무릎 위에 놓인 검은색 핸드백의 금색 장식이 조명을 받아 빛을 낸다. 내 시야에는 부득이하게 그들이 계속 들어온다.

   지하철에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어려운 점은 시선처리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마트 폰을 열심히 들여다보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선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응시하는 건 꽤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좋은 방법은 맞은편 사람의 머리 위 30cm 정도 위에 가상의 점을 찍고 그곳을 적당히 풀린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오해받을 우려가 있으므로 너무 풀어서도 바짝 조여서도 안 된다. 대개 그러고 있다 보면 최면에 걸리 듯 졸기 시작한다.

   다음 역에 이르자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온다. 지하철 플랫폼에서만 풍기는 고유의 냄새가 바람과 함께 밀려들어온다. 한 여성이 내 앞을 지나 바로 옆자리에 앉는다. 청바지, 회색 후드, 지나치게 큰 흰색 백팩이 잔상으로 남는다. 얼핏 봐도 그녀는 미인이다. 20대 정도로 보인다. 내 또래 같지만 확실치는 않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오후 6시는 지하철 타기 좋은 시간이다. 퇴근시간 전이라 사람도 적당하다. 역을 지날 때마다 적당히 내리고 그만큼 탄다. 플랫폼 냄새에 산뜻한 오렌지 향이 섞여 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출입구를 봤지만 별 다른 건 없다. 그때 오른쪽 어깨에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짐을 느낀다. 그녀는 머리를 좌우로 휘청거리며 내 어깨에 닿을 듯 닿지 않는다. 그리고 이내 묵직하게 안착한다. 흔한 일이다. 당황해선 안 된다. 어쩌면 괜찮은 일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여성이 내 어깨에 기댈 일은 매우 적다. 무엇보다 그녀에게서 술 냄새는 나지 않는다. 오렌지 향이 은은하게 풍긴다. 향수는 아니고 샴푸 향인 것 같다.

   내 어깨에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녀가 너무 자신을 놓아버린 건 아닌지 싶다. 나는 그녀의 하루 일과를 상상해본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든 직장이든 어딘가를 갔고 몸과 마음이 지칠 만큼 시달렸다. 그래서 지금 몹시 피곤해 주위는 안중에도 없이 낯선 남자 어깨를 무단으로 빌리고 있다고. 이런 합리화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도움이 된다.

   그녀는 이제 자신을 완전히 놓아버리려는 것 같다. 내 어깨에 걸터 있던 그녀의 머리는 스키를 타 듯 더 아래로 미끄러져간다. 이제는 내 쇄골 아래에서 오렌지 향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나는 그녀가 침 흘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맞은 편의 중년 남성은 못 마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노려보는 것 같다. 누가 맘에 안 드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녀는 의식 없이 깊은 잠에 빠져있고 나는 당황스럽다. 왠지 모를 죄의식을 느끼며 내 난처함을 드러내고 싶어 일부러 과장된 표정연기를 한다.

   그 옆에 기품 있어 보이던 중년 여성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재밌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드라마를 보고 있다는 듯이. 나는 구조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간절함을 담아 중년 여성을 바라보았지만 닿을 리는 없다. 그때 내 시야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분홍색 점퍼와 하얗게 샌 고불고불한 파마머리 아래로 곱게 주름진 얼굴을 한 7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무언의 손짓을 하고 있다. 그녀는 내 눈을 마주쳐주며 안타까움으로 가득한 얼굴로 연신 손을 까딱인다. 나는 고마움과 위안을 느낀다. 모두가 나를 외면할 때 내게 내미는 유일한 손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손짓이 그냥 신경 쓰지 말고 옆으로 치워버리라는 것임을 곧 깨닫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얼굴로 웃고만 있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 사람들이 들어왔고 그들은 나와 내게 기대고 있는 그녀를 본다. 흘깃 보거나 빤히 보거나. 나는 그들과 눈을 마주쳤고 그들은 얼른 시선을 거둔다. 표정에는 분명 목소리가 있다. 그러기를 수 차례 반복하고 오렌지향이 훅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자던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허리를 반듯이 세우고 앉아 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본다. 대단한 걸 기대하진 않았지만 미안해 보이는 수줍은 미소라든가 내지는 나지막하게 들리는 "죄송합니다" 정도를 생각한다. 그럴 자격이 있을 만큼 충분히 난처했으니까. 내가 빤히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도 시선을 의식했는지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미인이다. 그녀는 꾸밈없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미소를 보인다. 아름답다. 나도 애써 그 표정을 흉내 낸다. 마치 잘 모르겠다는 듯이.

   나른하게 들리던 지하철 안내 방송이 들리자 그녀는 백팩을 메고 출입문을 통과해 나간다. 은은한 오렌지 향이 자리에 머물다 사라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국어의 이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