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기행 - 시애틀 4
도착한 다음날부터 어김없이 비가 내리는 시애틀. 게다가 9월 하순의 가을은 제법 쌀쌀하기까지 해서 걸어 다니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시내 도로 경사는 샌프란시스코보다 오히려 양호하지만, 날씨라는 복병 때문에 시애틀에서는 주로 실내 공간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중 제일 자주 갔던 곳이 바로 공공도서관 센트럴 지점이다.
책이라는 매체를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공간과
공공영역으로서의 복지 공간을 모두 갖춘 도서관
시애틀의 도심 한가운데에서 유리와 철골로 온통 뒤덮인 이 난해하면서도 눈부시게 빛나는 건물은 아무리 봐도 도서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건물의 외벽이 사방으로 삐져나와 있어 불안하면서도 의외로 안정적으로 얹혀 있는 느낌인데, 이런 자유분방함은 '비정형'을 추구하는 렘 콜하스의 건축 특징이라고 한다. 도로 경사가 만만찮은 시애틀의 지형적 특성상 설계가 꽤 어려웠을 텐데도, 오히려 그는 그런 비정형마저 설계에 적극 반영하였다.
그는 건축을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바라보았다. 즉, 공공의 장소에서도 시민들의 생활은 얼마든지 영위될 수 있어야 하며, 서가의 공간 역시 언제든지 변형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건물을 모듈형으로 설계한 것이다. 각 모듈은 도로의 경사가 다양한 점을 고려하여 지그재그로 연결하였으며, 향후 공간이 더 필요할 경우 그 위에 모듈을 얹어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도록 하였다. 덧붙이자면, 과거의 카네기가 그러했듯 지금의 도서관을 짓는 데는 이 지역의 대표 유지인 빌 게이츠의 자금 지원이 있었다고 한다.
4번가에 있는 도서관 입구로 들어가면 바로 3층으로 연결된다. 이는 도로 경사 때문에 벌어지는 신기한 경험 중 하나이다. 벽면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눈부신 것도 잠시, 커다란 기둥을 중심으로 안내 데스크에 'Living Room'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수많은 탁자와 의자가 카페와 함께 어우러져 널찍하게 비치되어 있고, 그 사이로 아이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야말로 누구든지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공의 거실'인 셈이다.
모듈 사이로 이어진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은 방대한 서가에서 행여 길이라도 잃을까 봐 선명한 원색으로 칠해져 있어 또 한 번의 눈길을 끈다. 이 화려한 색감에 유리 채광까지 더해져서 마치 현대미술관에라도 온 것 같은 착각이 드는데, 그 사이로 더욱 놀라운 반전의 공간을 발견했다. 바로 Book Spiral Zone이다.
도서관의 6층부터 10층에 해당하는 서가의 둘레에는 기다란 복도가 끝없이 이어져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이, 미미하게 경사가 져 있어서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10층 같은 9층, 9층 같은 8층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러한 나선형(Spiral)의 복도에서는 장애인도 노약자도 무리 없이 층간을 드나들 수가 있다. 그야말로 '모두를 위한 도서관'이라는 슬로건에 걸맞는 지식의 공간인 셈이다.
빌딩으로 빽빽하게 둘러싸인 차가운 도시에서 유리로써 건물의 벽을 투명하게 허물고, 모듈 설계로써 하늘 위로 무한한 확장을 가능케 했던, 그리하여 '공공으로의 소통'을 실현했던 렘 콜하스. 이제 사람들은 그가 만든 공간에서 현재를 배우고 미래를 꿈꾸며 이 사회와 소통해나갈 것이다. 가장 정적인 모습과 가장 동적인 생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