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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볕 Oct 15. 2024

어떻게 사랑하고 살아갈 것인가

소설 <독일인의 사랑>을 읽고


T와 F의 비율이 6:4 정도 되는, 그다지 썩 감성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나도 가을엔 시인의 마음을 갖게 된다.


'가을에 읽으면 좋을 책'이라는 문구(였던가.. 아무튼 그 비슷한 테마)와 함께 밀리의 서재 추천도서 목록에 떠 있던 이 책을 선택한 것도 아마 그런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감을 안고 읽기 시작한 소설은 이내 내게 지루함을 안겼다.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 작사가 잘 알려진 낭만주의 시인 뷜헬름 뮐러를 부친으로 두어서일까. 막스 뮐러가 쓴 이 작품은 온통 시적인 문장들로 가득하다. 길게 이어지는 수사적 표현들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앞서 읽은 단어들은 이미 기억에서 지워져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유튜브 쇼츠가 그동안 내 문해력과 집중력을 얼마나 파괴한 것인지...


하지만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은 그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인내하며 읽다 보니 비로소 아름다운 문장들이 조금씩 마음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한 남자가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8개의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 '나'는 어릴 적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마을의 지체 높은 귀족인 후작 부부의 성을 찾는다. 그 후로 그 집안의 자녀들과 어울려 지내며 후작의 전처소생인 '마리아'라는 딸을 알게 된다. 그녀는 심장병 때문에 침대에 누워 생활하는 병약한 소녀이다. 그들은 신분과 육체의 문제를 극복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마리아는 곧 세상을 떠나고 '나'는 홀로 남겨진다.


별다른 사건 없이 유년시절의 회상과 두 남녀의 대화 위주로 이어지는 소설의 구성은 빠르고 드라마틱한 전개에 익숙해져 있는 요즘 독자들에게 지나치게 단조롭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언어학자인 막스 뮐러가 심혈을 기울여 선별한 단어들로 완성한, 사랑과 인생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문장들은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할 이유라고 본다.


우리의 둔한 눈을 예리하게 모아 초인적인 힘을 갖고 자연의 비밀 속에 보다 깊은 시선을 던져보라. 이 현미경이 씨앗과 꽃봉오리와 꽃의 소리 없는 공장들을 열어 보이면, 그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조직과 세포 안에서 우리는 무한히 반복되는 형태를, 섬세한 섬유질 안에서 자연의 설계의 영원한 불가변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중략)
그리고 또 창공을 보라. 거기에도 영원한 질서가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위성은 유성의 주위를, 유성은 항성의 주위를, 항성은 또 다른 항성의 주위를 맴돈다.
(중략)
푸른 꽃받침 속에서 요람을 타고 있는 딱정벌레를 보라. 그것들이 생명체로 깨어나며 현존을 누리고 생명의 호흡을 하는 것은, 꽃의 조직이나 생명 없는 천체의 기구보다 더욱 경이로운 사실이다. 너 역시 이와 같은 영원한 총체 속에 속해 있음을 느껴보라. 그러면 너와 더불어 지구를 타고 돌아가며 너와 함께 살다가 시들어가는 저 무한한 피조물들로 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
(중략)
꽃의 세포나 별의 세계, 딱정벌레의 생성보다 더 무한하고 영원한 무엇이 네 안에 있음을 느낀다면―마치 그림자 같은 너의 내부에 영원한 분의 광채가 두루 비침을 인식한다면―너의 내면과 너의 발밑, 그리고 머리 위에서 반영에 불과한 너를 존재로 만들며, 너의 불안을 평안으로, 너의 고독을 보편으로 화하게 하는 실재자의 편재를 느낀다면, 그때에는 너는 알게 되리라.
(중략)
그때에는 네 마음속과 주변이 밝아지고 새벽의 어둠이 차가운 안개와 더불어 걷히며, 새로운 따스함이 진동하는 자연 속을 관류할 것이다. 너는 다시는 놓지 않을 하나의 손길을 찾아낸 것이다. 그 손은 산이 흔들리고 달과 별이 사라져도 너를 지켜줄 것이다.
- <독일인의 사랑>, '일곱 번째 회상' 중에서


너의 오빠라도 좋고
너의 아버지라도 좋다. 아니, 너를 위해 세상의 무엇이라도 되고 싶다.
- <독일인의 사랑>, '마지막 회상' 중에서


신은 당신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주셨지만 그 고통을 당신과 나누도록 나를 당신에게 보내신 겁니다. 당신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어야 합니다. 한 척의 배가 무거운 돛들을 감당하듯이, 우리는 그 고통을 같이 짊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고통이라는 돛이 인생의 폭풍을 헤치고 마침내 안전한 항구로 안내해 줄 겁니다.”
- <독일인의 사랑>, '마지막 회상' 중에서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아직도 남아 있다. 눈물 한 방울이 대양에 합류하듯이 그녀에 대한 사랑은 이제 살아 있는 인류의 대양 속에 합류하며, 수백만―어린 시절부터 내가 사랑했던 수백만 ‘타인들’의 마음에 스며들어 그들을 포옹하고 있다. 다만 오늘처럼 고요한 여름날, 홀로 푸른 숲 속에서 자연의 품에 안겨 저 바깥에 인간들이 있는지, 아니면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혼자 외톨이로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르면, 기억의 묘지에서는 소생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죽어버린 생각들이 되살아나고, 엄청난 사랑의 힘이 마음속으로 되돌아와, 지금까지도 그윽하고 바닥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저 아름다운 존재를 향해 흘러간다. 그러면 수백만을 향한 사랑이 이 사랑 안으로―나의 수호천사를 향한 이 사랑 안으로 수렴되는 것만 같다.
- <독일인의 사랑>, '마지막 회상' 중에서



마리아에 대한 주인공의 마음은 처음엔 남녀 간의 사랑에 머물러 있었지만 문학, 철학, 종교를 아우르는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점점 포괄적이고 근원적인 사랑으로 발전해 간다. 마리아가 사망한 후 가슴에 깊게 각인된 그 사랑을 만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사랑의 의미와 그것을 실천하는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볼 수 있었다.


어떻게 사랑하고 살아갈 것인가. 이 소설이 던지는 화두는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시대를 살아가느라 메말라버린 우리 가슴에 단비처럼 스며드는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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