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생일이 지나고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을 때 연수네 집은 냉장고, 세탁기, 옷장 할 것 없이 빨간딱지가 붙었다. 동업자에게 배신당해 큰 빚을 진 아빠는 술에 취해 자책했고, 엄마는 빨간딱지의 사주를 받아 날마다 아빠의 숨통을 조였다. 아빠는 제 살을 파먹는 짐승처럼 조금씩 삶을 갉아먹었다.
아빠의 장례를 치르고 얼마 후, 전에 살던 동네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했다. 좁은 골목은 군데군데 말라붙은 토사물의 악취로 진동했고 깨진 보도블록 틈으로 잡초가 무성했다. 연수네가 세든 방은 길가로 난 창문이 꽉 닫히지 않아 바람이 불면 덜컹거렸고 벽지는 누렇게 떠 있었다. 무엇보다 곤욕스러웠던 건 화장실에 가는 일이었다. 다섯 가구가 사는 집이라 아침마다 화장실 앞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연수는 볼일을 채 마치기도 전에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엄마는 돈을 벌어 본 적도, 특별한 기술도 없었다. 여고를 나와 삼 년 후 자신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남자와 결혼한 1남 3녀의 막내인 엄마는 손끝이 야물지 못했고 살림이 서툴렀다. 아빠는 덜렁대는 엄마를 챙겼고 ‘끌끌’하고 혀를 차는 일이 잦았지만, 눈은 엄마를 보고 웃고 있었다. 엄마는 애교 많고 다정한 성격이었지만 어쩌다 아빠가 싫은 소리라도 할라치면 밥숟갈을 놓고 팽 돌아앉아 입을 다물었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며칠씩이나 어르고 달랬고 그러면 겨우 웃는 낯을 보였다.
아빠의 빈자리는 컸다. 남편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슬픔에 파묻힌 엄마에게 아빠를 잃은 딸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는 연수의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로 하루 종일 누워만 지냈다. 외할머니나 이모들이 가끔 집에 들렀다. 올 때마다 양손 가득 쌀이며 김치, 반찬거리를 들고 왔다. 할머니는 대문간에 따라 나온 연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 에미 불쌍해서 어짜노’ 하며 울먹였다. 집이 텅 빈 것 같았다. 연수는 해가 내리쬐는 한낮에 축담에 쪼그리고 앉아 무서움과 외로움에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엄마의 첫 일자리는 고깃집 주방이었다. 무쇠 불판을 들어 나르고 쭈그리고 앉아 씻느라 엄마의 어깨와 무릎, 손목은 성할 날이 없었다. 밤마다 엄마의 가녀린 어깨에 파스를 붙였고 끙끙 앓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연수는 무엇을 사달라고 조르거나 싫다고 떼쓸 줄 모르는 아이로 자랐고, 설거지든 청소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했다. 엄마의 기분이 가라앉은 날은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식당은 한 달에 두 번 문을 닫았다. 엄마는 오전에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고 긴 낮잠을 잤다. 하루 종일 해가 들지 않는 방은 잠을 자기엔 좋았다. 엄마도 연수에게도 눅눅한 벽지처럼 음습하고 칙칙한 날들이었다.
언제부턴가 엄마의 귀가 시간이 늦어졌고 가끔은 술 냄새가 났다. 그런 날이면 등 뒤에 누워 잠든 연수를 껴안고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연수는 잠결에도 그 소리가 종이에 손가락을 베인 것처럼 아팠다.
벚꽃이 필 무렵, 엄마는 핏기 없는 입술에 립스틱을 발랐고 낡은 비닐 옷장을 뒤졌다. 몇 년째 옷을 산 적 없는 엄마는 그나마 제일 괜찮아 보이는 하얀 바탕의 검정 땡땡이 블라우스와 검정 치마를 받쳐 입고 집을 나섰다. 후줄근하게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가디건 차림만 보던 연수에게 화장을 한 모습도, 동창회에 간다는 엄마도 낯설었다. 엄마의 외출이 잦아지면서 연수는 마음을 저울질했다. 어떤 날은 엄마가 행복하길 바랐고, 또 다른 날은 혼자 남게 될까 두려웠다.
중 1 여름방학에 엄마는 연수의 짐을 꾸려 S 읍의 외할머니댁으로 데려갔다. J시에서 버스로 세 시간 거리였다.
-할머니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라.
엄마가 시선을 피하며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걱정마, 내가 어린애야.
연수는 눈물을 들킬까 봐 일부러 입을 샐쭉해 보였다.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는 길 위에 우두커니 서서 엄마를 태운 버스가 사라지는 걸 보며 다시는 엄마와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붙잡고 싶었다. J시로 돌아간 엄마는 한 달에 두어 번 전화했고, 계절이 바뀔 때면 연수의 옷과 운동화, 속옷 따위를 사 들고 왔다. 엄마의 볼은 발그레하니 생기가 돌았고 아빠와 사이가 좋았던 예전처럼 웃음이 많아졌다. 언젠가 연노랑 바탕에 잔잔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온 엄마에게서 프리지어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엄마 나이 서른일곱, 지금의 내 나이였다.
-좋은 대학 갈라믄 고등학교는 도시에서 다녀야 하는데…….
-내 걱정하지 마. S고등학교가 얼마나 좋은데 그래. 시설도 좋고 사립이라 장학금도 준대. 여기서도 충분히 대학 잘 갈 수 있어.
삼 학년이 되자 엄마는 고등학교 진학을 걱정했다. 하지만 J시로 데려간다는 말은 없었고 엄마의 전화도 뜸해졌다. 계절이 바뀌면서 엄마 대신 운동화나 점퍼가 든 소포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