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왔다. 석 달 만이던가, 아니 반년 만이던가. S고로 진학하겠다고 담임과 상담을 한 이틀 뒤였다. 엄마의 눈은 퀭했고 피부는 거칠어 물기 없는 마른나무 같았다. 엄마는 바빴다고 했다가 아팠다고도 했다. 집을 옮겼다거나 분식집을 차렸다는 얘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안방에서 할머니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엄마는 연수를 데리고 J시로 돌아왔다. 오래됐지만 깨끗한 주택가 3층 빌라, 방 둘에 거실과 주방이 딸린 집이었다. 엄마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연수는 방을 구경했다. 햇살이 드는 작은 창 앞에는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는 책상, 벽 쪽으로는 서랍이 달린 나무 침대가 있었다. 연수는 삐거덕 소리를 내는 침대 위에 걸터앉아 상표를 떼지 않은 연보라색 꽃무늬 잠옷을 쓰다듬었다.
-맘에 들제?
등 뒤에서 묻는 엄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내한테 인자 니밖에 없다.
엄마가 와락 껴안았다. 따뜻했다. 오래오래 마주 보며 웃었다. 엄마는 공부 잘하고 착한 딸을 자랑했고 사람들은 둘을 보고 모녀가 아니라 자매 같다고 했다. 엄마와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연수의 먹는 것, 입는 것을 일일이 간섭했고 친구들과 맘 놓고 외출 한번 하기 어려웠다. 사춘기의 사소한 말대꾸에도 불같이 화를 내거나, 며칠씩 입을 꾹 닫아 사람을 미치게 했다. 연수가 이유도 모른 채 ‘내가 잘못했어’라고 빌어도 소용없었다. 그러다 제풀에 지치면 ‘내한테 니밖에 없다’는 말을 주문처럼 뇌까렸고, 말은 자라 돌덩이에서 바위가 되어 연수의 가슴을 지금까지 짓누르고 있다. 서로를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오히려 엄마와 연수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내렸다. 다음 날 출근 걱정이 없으니 잠을 설친다 해도 상관없다. 소파에 앉자마자 가방을 열어 세정의 편지를 꺼냈다. A4용지에 또박또박 써 내려간 단정한 글씨는 군데군데 얼룩져 있었다. 연수는 심호흡을 한 후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일 년 전, 아빠가 여자 친구와 프랑스로 떠났어요. 아빠 여친을 만난 적도 있어요. 솔직하고 웃음이 많더라고요. 아빠는 교환교수를 신청해서 미술을 더 공부하고 싶다는 그녀와 떠났어요. 엄마는 처음엔 무심한 것 같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못 견뎌 하데요. 그제야 아빠가 엄마를 버렸다는 걸 실감한 것 같았어요.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엄마는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고 그게 저였어요.
미친!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세정은 엄마와 자주 다툰다고만 했다. 세정의 엄마가 술 마시고 물건을 집어 던지며 소리 지르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더군다나 손찌검까지.
…… 다음 날이면 제게 사과 한마디 없이 평소처럼 행동했죠. 남들 앞에선 여전히 교양 있고 도도한 척하는 게 역겨웠어요. 전 그냥 엄마의 진심 어린 사과가 듣고 싶었어요. 엄마는 아빠가 생각나면 싸늘한 표정으로 저를 할퀴었어요. ……
열일곱 세정이 혼자 감당했을 두터운 절망과 슬픔, 외로움이 비명처럼 묻어 나왔다. 편지는 누군가에게 이 얘기를 털어놓고 싶었고 그게 연수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엄마 때문에 인생을 망가뜨리지 않겠다고, 아빠에게 가겠다는 말로 끝맺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들키고 싶지 않은, 그렇지만 속엣말을 털어놓고 싶은 하얀 밤들을 견뎌 왔던 연수였기에 누구보다 세정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