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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희 Dec 12. 2022

우리 동네 민여사는요~

시골은 해만 지면 깜깜 절벽인 데다, 오늘따라 볼을 할퀴는 듯한 면도날 같은 바람이 얄밉게 마당을 돌아다닌다. 갑작스레 기온이 뚝 떨어져 서둘러 저녁식사 준비를 하는데 전화벨이 다급하게 울린다. 아랫집 민여사다.


“ 어서 와서 여어 무시 좀 갖고 가라~”

괜찮다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손사래를 쳤지만, 한사코 어서 가지러 오라고 성화다.

“ 그럼 두어 개만 주세요.”

늘 받기만 하는 것이 미안한 데다, 마침 우리 텃밭의 무 여닐곱개도 때 이른 추위에 얼 까 봐 어제 모두 갈무리해 둔 터였다.

“뭔 소리 하노? 그까짓 거 갖고 누구 코에 붙일라꼬. 겨우내 묵어야재.”


그렇다. 작년에 먹어 본 민여사의 무는 황토밭에서 자라서인지 달고 아삭한 맛이 일품으로 내가 먹어 본 무 중에 최고였다. 염치 불고하고 잽싸게 무를 가지러 간다.       


민여사는 우리 동네 터줏대감이자 전원주택지의 땅 소유주이다.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봐 왔으니 그녀를 안 지 2년이 넘었다. 신축 전원주택단지인 우리 동네는 현재 6가구가 집을 지어 살고 있다. 민여사는 이곳에서 결혼 후 지금까지 40년을 소도 키우고 과수원과 농사일을 하며 3남매를 키웠다.  

 그녀는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이 동네에서 가장 연장자이다. 난 언니들이 많지만 예전부터 아무리 친하게 지내는 지인에게도 언니 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물론 대부분  학교에서 만났으니 ㅇㅇ선생님이라고 불러, 달리 호칭이 필요 없기도 했다. 하지만 민여사는 달랐다. 앞으로 한 동네에서 늘 마주쳐야 하는, 가족보다 자주 볼 이웃이다. 이사 오기 전 처음 몇 번은 호칭 없이 어정쩡하게 얼버무렸지만 어색하고 불편함을 오래 둘 순 없었다.      


어느 날 “언니, 이것 좀 드세요” 망설임 없이 언니라 부르며 먹거리가 든 봉지를 쑥 내밀자 그녀는 다소 놀랐다는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후로도 만날 때마다 언니라고 불렀지만 내가 전직 교사여서 그런지 그녀는 선뜻 내게 말을 놓지 못했다. 존대하는 것도, 놓는 것도 아닌 말의 어색함을 하나, 둘 내려놓을 때마다 우리의 관계도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민여사는 주택 공사가 있을 때면 인부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함바집을 연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식당이 아니라 일하시는 분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실비만 받고 점심식사를 제공하는 곳이다. 그러니 식사도 마치 가족에게 주는 집밥 같은 느낌이다. 때때로 근처 공사장 인부들도  오게 되면 20여 명이 넘는 사람의 식사 준비도 혼자서 거뜬히 해 낸다. 아니 해 치운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함바집은 때때로 마을 연회 장소가 되기도 한다.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의 전입 신고식(?)도 치르고, 특별 한 날 모임의 장소로도 이용된다. 그럴 때면 언니는 김치를 척척 썰어 담고, 밑반찬을 준비하여 순식간에 손님 맞을 채비를 끝낸다.     


작년 여름 복날. 그녀는 큰 가마솥에 불을 지펴 닭을 삶았다. 한낮의 열기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집어삼킬 듯이 위력을 뽐낼 때 팥죽 같이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갖은 약재를 넣고 정성껏 닭백숙을 끓였다. 뜨거운 열기가 치솟는 불 앞에서 커다란 국자로 솥을 젓는 그녀는 위대한 전사 같았다.

우리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으로 여름 무더위를 잘 넘겼고, 또 다른 핑곗거리를 만들어 함바집에 모이면서 차곡차곡 정을 쌓았다.


마을의 중심인 민여사가 없었다면 타지에서 이사 온 우리는 쉬이 가까워질 수 없었을지 모른다. 함바집과 민여사는 우리 마을의 광장이고 기둥이고 나눔 장터다.     


농사일에 문외한이던 남편이 유튜버로 나름 열심히 텃밭 가꾸기 공부를 해 보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의문점이 많다. 전문가인 그녀에게 조언을 구할라치면 질문에 대한 답만 오는 게 아니라, 그 옆에 자라는 채소에 대한 안부와 덤으로 비료까지 온다.     


내가 사과 몇 알을 들고 가면 포도 한 박스로, 과자 몇 개를 들고 가면 고구마로 또 어떤 때는 깻잎이며 고추로 되돌아온다. 그냥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늘 되로 주고 말로 받아 오는 격이다. 도시생활을 했던 나는 마트에서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사 오던 터라 민여사의 입장에서 보면 ‘손이 작아도 어째 저리 작나’ 싶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조금만’과 나의 ‘조금만’은 조금이 아니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녀는 ‘조금만’이라고 말하고 ‘더, 더, 더’로 행동한다. 그러다 보니 그녀가 주는 채소의 양들은 언제나 내게는 넘치도록 많은 양이다.

힘들게 농사지은 것들을 한 방울의 땀도 보태지 않고 얻어먹는 것이 언제나 미안하고 빚을 안고 있는 기분이다.      


나도 중. 고등학교 시절 시골에서 자라 농사일의 힘듦을 누구보다 잘 안다. 농사짓는 이들은 빈 땅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한다. 몸이 지칠 것을 알면서도 일을 두려워하거나 지나치지 않는다.

그녀의 삶도 외지인의 눈으로 본다면 고달프기 그지없다. 그녀의 매일은 쉴 틈이 없다. 철마다 작물을 바꾸어 감자, 대파, 도라지 등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고, 그것들을 새벽마다 지역 원예 농협에 납품하기도 한다. 겨울철엔 김장 배추와 무를 심고, 김장용 배추를 절여 팔기도 한다. 굳이 저렇게까지 쉴 틈 없이 살아야 하나 싶다가도 그것이 그녀의 삶이거니 생각한다.


30여 호가 넘게 들어설 넓은 전원주택지의 실 소유지인 그녀는 편히 쉬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이제 농사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밭일과 함바집 식당 일, 도라지 까는 일들은 그녀의 삶이고 기쁨과 보람이며, 정을 나누는 의식 같은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며칠 전에도 김장김치를 담가 동네 여섯 집 모두에게 나눠 주었다.


“우리 집 꺼는 먼저 보는 기이 임자다.”

깻잎을 따다 만나면 깻잎 한 바구니를, 고추밭을 지나면 어느새 내 손에 고추가 든 봉지가 쥐어져 있다.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내 어머니의 굴곡진 삶이 보이고, 무엇이든 아낌없이 나눠 주는 내 올케 언니를 보는 것 같다.      


 오늘도 우리 동네 통 큰 여자 민여사는 무를 양껏 가져가라 한다.

그녀의 무는 뽀얗고 달짝지근한 무나물로. 생선보다 맛난 무조림으로, 때로는 시원한 국물 맛을 내는 육수로 올 겨울 내내 나의 밥상을 풍요롭게 해 줄 것이다.

 무와 함께 무청처럼 달려온 그녀의 정은  내 서랍 속에 쌓여 어느 날 불쑥 고개를 내밀 것이다.  그러면 나는 조용히 그녀의 낯익은 인생을 들여다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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