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학교는 드라마 세트장

by 도희

“아~~ 직 멀었으니 내년까지 기다려요”

서류를 넘겨보던 장학사는 헛꿈 꾸지 말라는 듯한 뚱한 표정으로 힐끗 보며 말했다.

졸업한 지 1년 반. 그 무렵 사회과의 적체 현상이 심해 2~3년 기다리는 건 보통이었다. 9월에 대거 발령이 난다는 소문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 마냥 내 마음을 들쑤셨다. 혹시나 하는 맘에 찾아가 본 도 교육청의 대답은 ‘기대 따윈 넣어 둬’였다.


쓰린 마음 다잡고 일상을 보내고 있던 3일 만에 연락이 왔다. ‘이기 무슨 일이고’

남해교육청으로 가 보란다. 발령. 발령이라니 우하하하. 발령이다.!!!!!

남해교육청에서 받은 통지서에는 A중학교라고 적혀 있다. 어딘들 어떤가?

멍청한지 순박한지 세상 물정 모르던 나는 발령이 난 것만으로도 좋아 그곳이 어떤 곳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외버스에 부풀어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안고 몸을 실었다.


남해읍에서 00면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몇 대 없었다. 그만큼 시골이다. A중학교로 향하는 빨간 줄무늬 버스 의자의 머리 닿는 부분은 고단한 이들의 기름때가 묻어 회색빛으로 찌들어 있었다. 버스는 울퉁불퉁 비포장 길을 힘겹게 달렸다. 가끔은 머리가 천장에 닿을 뻔하며 40분이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도착한 나의 첫 학교. 버스는 기대 반 걱정 반인 나를 남겨 두고 뒤꽁무니에 흙먼지를 잔뜩 일으키며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언덕 아래 나지막한 곳에 있는 학교는 교문으로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외벽은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도 모르게 군데군데 바래고 금마저 가 있었다. 잡초가 뒤덮여 뱀이 나올 것 같은 화단, 뒤틀어진 창틀에 매달린 거미줄. 한눈에 봐도 정겹기보단 검정 고무신에 나올 법하다. 내가 아는 남해가 맞나 싶다.


영화나 TV에서 본 남해는 비췻빛 바다에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한가로운 오후에 석양빛에 반짝이는 윤슬을 보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 곳. 그도 아니면 하얀 스티로폼이 바다를 꽃처럼 수놓고 굴과 각종 조개류를 양식하는 어부들의 활기찬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었다.


양식업은 개뿔. 저 멀리 귀퉁이에 남루한 바다 한 조각이 보인다. 사방천지 둘러봐도 내 눈이 닿는 곳에 하얀 스티로폼 따위는 없었다. 나의 첫 학교는 언덕배기에 일구어 놓은 밭뙈기 몇 자락과 작은 통통배 서너 척이 전부인 곳. 반농반어촌의 가난이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는 그런 동네에 있었다.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일제히 쏠리는 20개의 눈동자. 부담 백배. 순간 내가 그렇게 미인인가 착각했지만 단지 뉴페이스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당장 해야 할 업무와 과목이 분에 넘치도록 텁썩 안겨왔다. 2학기에 발령받은 교사는 선택의 여지없이 전임 교사의 과목을 이어받는다.

전공은 일반사회. 나는 그곳에서 2학년 사회, 2, 3학년 국사, 그리고 맙소사!

1학년 영어라니!

하지만 난 속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각 학년 2개 반에 12명의 교사뿐이니 *상치과목은 예사로 있는 일이었다.


나는 증오할 정도로 수학이 싫다. 지금 같으면 대학을 못 갈 정도의 거스름돈이나 셀 줄 아는 실력.

산수를 하는 내게 수학을 가르치라 했다면 시작도 하기 전에 교직을 박차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대한민국 교육계의 큰 손실이었겠지만.


1교시엔 강과 바다를 넘나들고, 3교시엔 고구려 고분 속을 들락거렸다.

다시 오후엔 I am a student를 떠들어대니 어지러워 멀미가 날 것 같았다.

4과목 교재 연구를 위해 난 밤마다 빨간 펜, 파란 펜 부여잡고 머리가 깨질 정도로 교과서를 파고 또 팠다.


영어 그 까이 거 뭐 아무리 내 실력이 형편없다 해도 중1에게 뾰롱 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나의 뻣뻣한 혀다. 버터와 라면을 들이대도 좀체 내 혀는 말랑말랑 해지지 않았다. 방법은 세뇌다.

‘너는 미국인이다.’ ‘너는 미국인이다.’

상상하지 마시라. 콧구멍만 한 자취방에서 카세트테이프 틀어 놓고 발을 까딱거리며 중1 영어 문장을 앵무새처럼 뇌까리는 새내기 교사의 꼬락서니를. 덕분에 ‘선생님 발음이 구려요.’ 소리는 면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아이들이 물었다. “선생님은 4과목 가르치니까 월급도 많이 받겠네요?”

그렇다고 뻥을 치기엔 아이들의 눈망울이 너무 맑았다.

“아니, 쥐꼬리보단 쬐끔 더 많아.”

(그 당시 약 40만 원 정도)


늦가을 장대비에 교무실 천장에서 새는 비가 마룻바닥 사이로 스며드는 것처럼 나도 드라마틱한 현실 속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매주 수요일 4시면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찬 체육 선생님 목소리가 들린다.

“모두 운동장으로 갑시다.” 직원 체육 시간이다. 운동이라면 질색을 하는 나도 예외 없다.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고 배구 네트 앞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제일 고역은 직체가 끝나고 치킨 냄새를 맡아야 하는 일이다. 닭을 못 먹는다는 소릴 하지 못해 어정쩡하게 젓가락만 들고 있던 내가 퍽퍽한 닭가슴살이라도 집어 들 무렵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 상치과목:특정 과목의 교사가 모자랄 경우, 해당 과목을 전공하지 않은 교사가 담당하는 교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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