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에서 강화도까지

by 도희

“아이고, 인자 슬슬 아~들 결석할 때가 됐네요.”

“네, 왜요?”

옆 자리 J선생은 나보다 일 년 반 먼저 부임한 동갑내기로 본캐는 미술, 부캐는 생물교사다. 미켈란젤로의 후예답게 그림과 조각과 해부학을 넘나드는 그녀는 능력자다.

쉬는 시간 그녀 옆엔 시도 때도 없이 아이들이 몰려든다. 질투? 부러움? 노 노.


그녀가 맡은 업무는 보건이다. 그 당시 양호교사라 불리던 보건 선생님이 작은 시골 학교에 있을 리가 만무하다. 교무실 한쪽 벽을 등지고 작은 약장이 있다. 기껏해야 감기약, 진통제, 소화제, 반창고, 빨간 약이 대부분이다. 그녀 주위에는 늘 손가락을 다친 아이, 감기 걸린 학생, 생리통이 심한 여자애들이 시골 장날 떨이 물건을 사려는 것처럼 몰려들었다.


“여는 또 와 다칬노? 문디 자슥. 조심 쫌 해라” J선생은 서부 경남 특유의 진한 사투리와 유머 감각으로 아픈 아이들에게 웃음도 처방해 준다. 가끔은 나도 그 처방을 받는다. 어느 날부턴가 J선생이 자리를 비우면 나도 백의의 천사 흉내를 내고 있었다.


“머시마들은 밭 갈고 여자아~들은 밥 한다 아인교”

J선생의 신음 같은 한숨이 옆자리에 앉은 나까지 그늘지게 만든다.


남해는 마늘이 유명한 곳이다. 9월 하순이면 마늘을 심기 시작한다. 바닷가지만 밭농사에 의존하며 생활하는 이 동네의 주요 수입원은 마늘 농사다. 마늘종과 마늘은 쌀이 되고 등록금이 되고, 교복이 되고 운동화도 된다. 그러니 마늘 농사지을 철이면 부지깽이라도 거들어야 한다.

마늘을 심거나 수확할 철이면 여자애들은 새벽녘 밭에 나간 엄마를 대신해 아침밥을 짓고 도시락을 준비한다. 동생을 깨우고 먹이고 건사하는 건 그들의 몫이다. 10살 남짓 되면 솔가지를 분질러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안친다. 매캐한 연기 마시며 밥 짓고 국 끓이는 일은 그녀들의 삶이었다.


이곳 남자아이들은 중학교 2학년쯤 되면 경운기를 다룬다. 식전에 경운기를 몰고 가 밭 한 뙈기 갈아 놓고 등교한다. 시커먼 얼굴로 땀 냄새 풍기며 학교로 와선 쌓인 피곤을 푼다. 어깨를 툭 치면 한숨 잘 잔 아이들은 멀뚱한 표정으로 멋쩍게 씨익 웃는다. 요즘은 주무시는 학생님들 함부로 깨우면 큰일 난다. 몇 년 전 동료 B는 잠자는 남학생의 어깨를 아무 말없이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112에 신고를 당했다. 죄목은 구타. B는 40대 초반 미니미니한 체구의 여교사였다.


영어 시간. 카세트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꽂으며 “아끼다 똥 된다. 집에 있는 사람은 부지런히 들어.”라고 했더니 순심이가

“샘, 그거 마늘 몇 접 팔아야 되는지 알아요?” 선생을 철없는 아이 보듯 딱한 시선으로 말한다. 아이들은 책, 지도, 물감 무엇이든 “마늘 몇 접이면 돼요?” 하고 묻는다. 돈에 조금이라도 관련되는 이야기는 마늘로 시작해서 마늘로 끝난다. A중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지독한 마늘 냄새처럼 마늘은 맵고 지겹게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일 년 내 마늘과 사투를 벌이는 아이들을 데리고 J선생과 나는 간 큰 짓을 했다.

J는 2학년 남학생, 나는 여학생반 담임이었다. 이십 대 초반의 두 애송이 여선생은 야심만만한 수학여행 계획을 세웠다. 남해에서 무려 강화도까지 가는 여행계획은 어찌 보면 무모하고 철이 없었다.


그 당시 시골 학교의 수학여행지는 대부분 서울과 용인에 있는 **랜드였다. 서울은 오히려 가기 쉬울 수도 있지만 강화도는 이번 기회 아니면 힘들다고 생각했다. 끈질기게 윗분들을 설득했고 여행사와 협의했다. 남해읍의 여행사는 처음 있는 일이라 코스를 어찌 잡아야 할지 난감해했다. J와 나는 머리를 맞대고 코스를 짜고 숙박업소를 점검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내게는 길고 고단했던 낮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전등사 아래 여관에 도착했다. 여관이라긴 보다 방이 아~주 크고 많은 옛날 기와집 같았다. 두반 합해야 40여 명 남짓의 아이들이니 방 4개면 충분했다. 게임과 베개싸움에 휘말리며 뜬 눈을 지새다시피 한 다음 날 아침. 식사지도를 준비하던 내게 반장이 달려왔다.

“샘, 옆반 길상이가 칼에 베어 피가 철철 나요.”

탈출하려는 정신을 붙들어 매고 신발을 꿰는 둥 마는 둥 달려갔다. 길상은 사찰 입구 기념품 가게에서 산 무늬만 은장도로 장난을 치다 그예 손을 베어 피를 철철 까지는 아니고 뚝뚝 흘리고 있었다.

담임인 J가 택시로 길상과 병원을 간 사이 나는 두 개반의 아이를 단속하고 버스에 태워 오전 관광에 나섰다. 아이들이 관광지를 돌아보는 동안 내 영혼은 안드로메다에 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독립기념관에서 우리 반 순이를 잃어버렸다. 3살 꼬맹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으로 그 넓은 곳을 사방팔방 뛰어다녀도 온 데 간데없었다. 방송의 힘을 믿고 기다린 지 30분이 넘어서야 저 멀리 숨차게 달려오는 순이가 보였다. 오기만 하면 등짝 스매싱을 날리려고 마음먹었건만 왜 눈물부터 나오는지.



온몸으로 가난을 익힌 아이들은 그들의 노동만이 또 다른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걸 너무 일찍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웃음 속에는 싱싱함이 있었고 말속엔 진실함과 사랑이 묻어났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센 척, 있어 보이는 척할 필요가 없었다. 풋내기 여교사는 애써 아이들을 이해하려 하기보단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외지인인 내게 정을 주었고, 자신들의 삶 속의 일부로 나를 받아들였다. 근데 어째 갈수록 가르치는 일이 어렵게 느껴졌다. 교과서 속 지식만 전달하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알아 갈수록 나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사춘기 소녀처럼 고민이 깊어갔다. 날마다 밥값을 제대로 해내기가 역도 선수가 바벨의 무게를 늘려 신기록을 경신하는 것 마냥 어려웠다. 선생 노릇이 머리와 입 손끝으로만 되는 것 아니었다.

결론은 세상에 돈 벌기 쉬운 일은 없다는 것이다.


대문사진: 픽사베이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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