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수네(가명) 집은 오늘도 허탕이다. 엊그제 왔을 때도 대문이 닫혀 있었다. 찌그러진 파란 대문 사이로 널브러진 그물과 녹슨 농기구 몇 개만 보인다. 이 동네 사는 우리 반 길잡이 아이 둘과 가정방문을 다니는 중이다. 요즘처럼 주소가 정확하지도 않던 시절이다. 언덕바지 골목 구석구석 숨어 있는 집들을 주소만 들고 찾기는 나 같은 청맹과니 길치에겐 서울서 김서방 찾기다. 막 고샅을 돌아 나오는 데 “선생님, 저기 갑수요.” 옆의 아이가 가리키는 손끝으로 달아나는 아이의 남루한 옷자락이 보인다.
갑수는 나이에 비해 유난히 키가 작고 깡말랐다.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해서인지 힘없이 비실거리는 모습이 늘 눈에 밟히는 아이다. 갑수 어머니는 애가 예닐곱 살 때 집을 나갔다. 갑수를 키워 주신 친할머니도 재작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본래 뱃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술 마시는 게 주업이 되었다. 담임의 가정방문을 알고 부자지간에 쓸데없는 의기투합을 했는지 아무튼 일부러 집을 비운 것 같다. 오늘이 두 번째다. 아마 올해 안에 갑수 아버지를 만나기는 틀린 것 같다. 차라리 그 시간에 갑수의 끼니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고, 갑수 등 한 번 더 다독여 주는 게 낫겠다.
이 마을 아이들의 가정 사정은 대부분 복잡하고 딱했다. 같은 학년이라 이란성 쌍둥인 줄 알았는데 이복형제이거나 심지어 아이가 4명인 집에 엄마, 아빠가 다른 집도 있었다. 25명의 학생 중 한부모 가정이 서넛이나 됐다. 요즘 같으면 동행, 인간극장에 나올 법한 스토리가 그 당시 이 마을에선 흔한 일이었다. 버스도 없는 흙먼지 나는 길을 물어물어 찾아가도 못 만나기 비일비재했다. 그 당시 가정방문은 이 열악한 환경의 시골 학교에서 아이들의 사정을 그나마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이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다정한 말 몇 마디와 그들의 손을 잡아 주는 일이 고작이었다.
다음 차례는 이란성쌍둥이 자매집이다. 길잡이 아이 둘은 천사 같은 손길로 나를 인도해 주고 시크하게 제 갈 길로 갔다. 쌍둥이 중 동생 영이(가명)는 가녀리고 눈이 똥그래서 귀염성 있는 얼굴이다. 행동도 말도 재바르다. 언니 순이(가명)는 통통하고, 아무리 봐도 예쁜 얼굴은 아닌 데다 행동마저 굼떴다. 학교에서 영이는 순이를 챙겨주긴 하지만 창피하게 여겼다. 순이가 말귀를 잘 못 알아듣거나 수업 시간에 딴짓이라도 할라치면, 금세 새초롬한 얼굴이 되어 눈을 흘겼다. 집에서 본 쌍둥이는 여느 자매와 다름없이 밝고 환한 웃음을 띠는 사이좋은 자매였다.
쌍둥이의 어머니는 싱싱한 쏙을 한 소쿠리 삶아 내왔다. 난생처음 보는 쏙이란 놈은 갯가재 친구나 새우의 팔촌쯤 되는 놈이다. 영이와 순이는 서로 많이 잡은 공치사를 하며 살을 발라 내민다. 쌍둥이 자매가 쏙을 캐듯이 경쟁하며 반 아이들의 정보를 일러 준다. 누구네 집은 막내가 아직 젖먹이라는 둥, 누구는 엄마 아빠가 재혼한 집이라는 둥 이런저런 얘기를 듣다 보면 간혹 알짜배기도 있는 법이다.
쏙으로 속도 든든히 채우고, 정보도 쏙 빼내고 마지막 철수(가명)네 집으로 향한다.
이런 경험 처음이야. 철수네는 어머니, 할머니도 모자라 철수 친구 바둑이까지 대문 앞에 마중을 나왔다. 철수가 유독 웃음이 많고 쾌활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의 얼굴은 빛이 났다. 온전한 가족 구성원에 따뜻함이 물씬 풍기는 집이 몇 집이나 되던가. 저녁 먹고 가라며 붙잡는 철수 할머니에게 곧 막차 시간임을 얘기하니 마지못해 내 손을 놓으신다. 밥때에 손님이 오면 그저 보내지 않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는 잠시 기다리라 하시곤 집안으로 가시더니 까만 비닐봉지에 뭔가를 담아 내 손에 봉지를 잡혀주신다.
“이게 뭡니까?”
“아이고, 참말로 별거 아이라요”
“할머니 이런 거 받으면 안 됩니다.” 봉지 속 물건의 정체도 모른 채 일단 할머니에게 다시 봉지를 돌려 드렸다.
할머니는 그때 마침 할머니에게 눈 흘기며 앞마당을 지나가는 암탉을 가리킨다.
“선샘 오신다캐서 닭알을 모아놨다 아임니꺼”하며 봉지를 다시 내미신다.
철수 할머니는 귀한 손자의 담임에게 주려고 일주일 치 계란을 모아두셨다. 서운함과 섭섭함이 가득한 할머니 얼굴을 보니 할머니의 선물을 더 이상 뿌리치는 건 무례함이었다.
그사이 막차 시간이 5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버스를 놓치면 아름다운 남도길이 아니라 흙길을 터덜터덜 1시간을 넘게 걸어야 한다. 그것도 산을 넘어.
까만 봉지를 들고 냅다 뛰었다. 저 멀리 모퉁이를 돌아오는 버스가 눈앞에 보였다.
마지막 고지가 저긴데, 아뿔싸 나는 봉지를 떨어뜨렸다. 할머니의 계란은 박살이 났다. 신문지로 감싼 계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비닐봉지 밖으로 노오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버스가 도착했는데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연자실 찢어진 비닐 봉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재촉하는 버스 기사 아저씨의 등쌀에 비닐봉지를 그냥 두고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그 자리에 비닐봉지만 두고 온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귀한 마음을 두고 왔다. 지금도 철수와 할머니가 계란이 깨진 사실을 모르기를 바란다. 나는 속죄하는 한 마리 양처럼 그때 먹지 못한 계란을 대신해 할머니께 사죄하는 맘으로 날마다 계란프라이를 먹는다.
대문사진: 다음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