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 따윈 넣어둬

by 도희

겨울 방학이 끝날 무렵 남해읍에서 학교 근처로 자취방을 옮겼다. 40분이나 걸리는 비포장 도로 위를 하루 두 번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젓가락 같은 내 몸이 더 이상 말라비틀어지지 않도록 편케 해 주고 싶은 나름의 처방책이었다. 학교 뒷문 옆에 아주머니 한 분이 방이 6개나 되는 대궐 같은 집에 사셨다. 주로 초. 중학교 교사나 근처 공무원에게 세를 주셨다. 읍내 공무원이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기고 간 선물이라는 둥, 말 못 할 사연이 있다는 둥 뒷얘기가 많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마침 학기가 끝나 방 4개가 한꺼번에 비었다. 이런 로또 같은 행운은 쉽게 오지 않는다. 또래 여교사 4명은 작정하고 함께 이사를 했다. 나는 아래채에서 J선생과 마주 보는 방을 사용했다. 식사는 2인 1조. 나머지 2명의 여교사도 같은 방식이다. 한 지붕 4인의 따로 또 같이 동거가 시작됐다.


소꿉장난 같은 살림살이지만 함께 지내니 적적함도 덜어졌다. 우리는 종종 부침개를 하거나 비빔밥 같은 별식을 먹는 날이면 아주머니의 대청마루에 모여 원팀이 되었다. 저녁 식사 후 걸핏하면 한 방에 모여 차 마시기를 핑계로 수다타임을 가졌다. 그래봤자 주로 골탕 먹이는 얘들 이야기와 교장. 교감 흉보기였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오늘 수업 시간에 이랬다. 저랬다. 속풀이를 늘어놓았다. 5시 40분이면 읍내로 나가는 버스마저 끊기는 적막강산인 곳에서 달리 무얼 하겠는가? 20대 초반 여교사 4명이 학교 생활의 스트레스 푸는 데는 수다만 한 게 없었다. 그걸 요즘은 파자마 파티라고 한다던가.


2월 말. 교장 선생님은 퇴직을 하고, 교감선생님은 전근을 가셨다.(이하 교장 교감으로 호칭) 새 교장은 자그마한 키에 볼살이 늘어져 못내 불만이 가득해서 별명이 안경 낀 불독이었다. 교장 첫 부임지가 깡촌이라 실망을 해서인지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물어뜯었다. 인격과 배 둘레가 비례한다는 말이 거짓임을 그를 보고 확실히 알았다. 교감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흥타령의 전수자였다. 시시때때로 학교에서의 그의 존재 이유가 궁금했다.


교장이 학교 옆 사택으로 이사하는 일요일. 남선생들은 이삿짐을 날랐다. 젊은 여선생들은 집 정리와 청소를 하고 점심으로 국수를 삶았다. 여교사 4명은 자취방을 옮긴 후 처음으로 읍내에 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우리 4명은 수시로 ‘다 가족 같은 사이 아이가?’를 들으며 그 외 자질구레한 일을 파트타임 알바생처럼 했다.


불독은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근성을 자주 발휘하였다. 비 새는 교무실 천장을 고치는 남선생을 위해(?) 의리를 지켜야 한다며 퇴근한 우리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정작 수리하는 선생님은 부담스럽다고 제발 집에 돌아 가라 했지만 어림멊었다. 그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응원가라도 불러야 될 판이다. 2시간 동안 사다리 위에 있는 체육선생님을 올려보다가 목이 꺾일 뻔했다.


언제 불호령이 내릴지 몰라 날마다 새가슴을 부여잡았고, 때론 옆자리 동료에게 손수건을 건네야 했다. 그 당시 교장은 무소불위. 서슬이 시퍼런 살아 있는 권력이었다.

교직원은 자기가 부리는 사람처럼, 학교 물건은 자기 사유재산으로 착각하는 납득하기 곤란한 사고의 소유자

였다.


숨구멍이 트이기만 기다리던 여름 방학 날. 교장은 점심으로 국수를 삶아 먹고 수박도 나눠 먹잔다.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린가. 벽지에서 객지 생활하는 우리에겐 아이들만큼이나 기다리는 방학이다.

그런데 국수라니 그것도 사 주는 게 아니라 여선생들더러 준비하란다. 모름지기 방학하는 날은 12시 이전에 마치는 게 정답이다. 두 사람 빼고 교직원 남녀노소 모두 반기를 들었다. 이렇게 의견 일치를 본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불독교장은 온다 간다 말도 없이 교감과 함께 점심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교무실의 우리 모두는 점심도 굶은 채 텅 빈 교정을 바라보며 마그마 같은 분노를 잠재웠다.


교장은 전화로 오후 3시 반에 직원회의를 소집했다. 교장이 미안하단 말은커녕 인화 단결이 안 된다는 따위의 수박씨 발라 먹는 소릴 하는 동안 책상 위에 놓인 수박에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시곗바늘은 어느 듯 4시 반을 가르치고 있었다.

시시 때때로 대문을 두드리던 아이들은 불독에게 억눌린 시간들에 대한 보상이었다.

퇴근 후 아이들은 가끔 고구마나 감자 삶은 것, 떡 같은 주전부리를 들고 우리 집 대문을 넘나들었다. 여름에는 해가 길어 아이들과 함께 라면도 끓여 먹었다. 아이들이 들고 온 반찬으로 저녁상을 차리며 밥만 한 주제에 생색도 낸다. 해 질 녘이면 선창가에 앉아 노을을 보며 떼창을 하거나, 갯바위 틈에서 조개를 줍기도 했다. 아이들은 서툰 우리보다 훨씬 빨리, 크고 좋은 놈으로 바구니를 채웠다. 즉석에서 끓인 조갯국은 시원하기가 말할 수 없었다. 가끔 모래가 씹히긴 했지만. 방파제에서 아이들이 끼워 주는 미끼로 피라미보다 작은 고기를 낚으며 그것도 손맛이라고 짜릿함을 느꼈다. 사립문에 달이 걸리고 뒷산의 밤새 소리도 희미해져 가는 즈음에야 아이들이 돌아가면 나는 고요 속에서 또 다른 새벽을 맞았다.


교장의 포악함을 견디기에 우리는 너무 젊었고, 나약했다. 부당한 처우에 대처하기보단 떠남을 택했다. 관리자 때문이라는 시답잖은 핑계를 대며 아이들을 너무 일찍 떠나온 것이 미안했다.

34년이 지난 오늘에야 닿지도 못할 변명을 늘어놓으며 후회하는 내가 부끄럽다.

하지만 더 이상 빛이 바래기 전에 서머서머하여 차마 꺼내 볼 수 없었던 추억들을 이제 가만히 들여다본다.


대문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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