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영문으로 읽고

by Dee

​안 좋은 시선을 보내는 몇몇 이에게 왜 이 소설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비 때문이라고 하겠다. 비를 어떤 음으로 표현한다면 이 소설은 같은 음을 가지고 있고 이 음을 들으면 마치 엄마 뱃속에서 손가락을 빠는 것 같이 한없이 늘어지고 눈이 감긴다

와타나베 토루, 나오코, 미도리의 청춘의 방황과 사랑. 청소년기에 받아들이는 죽음은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자연사이든 자살이든 죽음은 삶의 다른 부분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 말한다. 삶을 끝내는 요소가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한 요소일 뿐이라고.

​Death in that place was not a decisive element that brought life to an end. There, death was but one of many elements comprising life. (Page 360)

​청소년기에 이 소설을 접했을 때 성표현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감성적인 두드림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그들의 솔직함, 소설다운 캐릭터에 내 인생의 소설로 점찍었다. 문제는 sentimental 할 때 읽으면 물속을 허우적거리듯 한없이 감성적이게 된다는 것, 저기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가 올라오기 싫다는 것. 20대가 되고 Borders 서점에서 이 영영 소설을 보고는 바로 구매했다.

​주인공 와타나베 토루. 17살에 가장 친한 친구인 기즈키를 잃고 그 상처로 인해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살아간다. 그의 대학 입학 후 결심은 다음과 같다.

​"There was only one thing for me to do when I started my new life in the dorm: stop taking everything so seriously:establish a proper distance between myself and everything else."(Page 30)

​그 후 죽은 기즈키의 연인인 나오코와 역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들만의 관계를 이어나간다. 친언니를 이미 자살로 보낸 나오코. 나오코는 대학생활을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요양원으로 들어가 토루와의 만남을 가지고 서신 왕래를 한다. 죽음에 둘러싸인 영혼들로 괴로워하는 나오코. 와타나베도 몇몇 사람과 친분을 이어가지만 늘 기즈키를 떠올리며 그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초록빛같이 산뜻한 그녀- 미도리가 나타난다. 밝고 솔직하고 토루에게 마음을 여는 그녀. 그녀 역시 남자 친구가 있지만 친구로 와타나베를 좋아한다. 미도리 또한 죽음과 반대편에 서있지 않다. 뇌종양으로 어머니를 잃고 1년이 안돼서 아버지마저 뇌종양으로 투병 중이다. 이렇듯 죽음 속에 살며 아빠 간호와 대학생활을 겨우 겨우 이어가는 그녀. 하지만 그녀는 아침 햇빛 속에 꼬리 치는 강아지처럼 밝다. 성에 대해 솔직하고 야동을 군침 흘리며 보는 귀여운 그녀. 그녀도 결국 아버지의 죽음을 맞고 힘들어하지만 세상과 담을 쌓거나 숨지 않는다. 당당히 자기만의 애도 시간을 가진다.

그리고 나오코의 요양원 룸메이트 레이코. 천재 피아니스트의 길을 가다 어느 날 알 수 없는 스트레스 장애로 꿈을 잃고 정신병원을 in and out 하던 그녀. 행운같이 멋진 남자가 나타나 결혼하고 딸을 낳지만 사악한 정신병자 제자를 만나 다시 자살을 시도하고 세상과 등을 진다.

와타나베라는 인물. Hiking, swimming, reading 등의 혼자 하는 활동을 좋아하고 사색적이다. 사람들에게 실망할까 봐 고독을 선택한 것뿐이라는 그. 세상과 막을 쳐놓고 무관심한척하지만 따뜻한 그. 자전적인 소설이라니 하루키의 경험이 투영되지 않았을까 했는데 저자는 절대 아니란다. 자기 삶은 정말 less dramatic 하고 boring 하다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한다.

이 네 인물에게 닥친 우발적인 사건을 볼 때 그들은 모두 생의 피해자인 동시에 죽음의 피해자이다. 그런 구절이 있다. 나오코가 기즈키가 살아있었다면 그들은 결국 unhappy ending으로 끝났을 거라고... 왜냐고 묻는 와타나베에게 나오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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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성장에의 고통이 있어야 사회로 나갔을 때 견뎌야 하는 진통을 그들을 견디지 못한 걸까? 충분히 단단해졌다 생각하고 나가서도 부딪히는 족족히 깨지는 우리 아니던가? 자살이 옳다 그르다 할 수 있을까? 우리 몸의 주인이 신이 아닌 우리인 이상 그 책임도 권한도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린 이 세상에 올 때 홀로 오지 않았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엄마의 배를 빌려 온 것이다. 우리에겐 그 빚이 있다. 남아있는 그들을 위해 나와 단 한 가닥의 가느다란 끈이라도 연결되어있는 그들을 위해 우린 살아갈 의무가 있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문학적인, 교훈적인 면을 차치하더라도 그의 소설이 언더그라운드 소설이라고 불려도 그만의 감성적인 색깔과 흡입력, 살아있는 캐릭터가 있기에 그는 superstar 소설가다.
그의 소설에는 유독 몽환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성적인 표현. 이 성적 표현이 없다면 그의 소설은 어떻게 전개가 되었을까? 반향을 불러일으켰을까? 자유로운 성적 표현을 통해 그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걸까?

작품 해설을 보니 '죽은 친구'는 주인공의 분신이며 또 다른 나라고 한다. 주인공들의 삼각관계에서 인물이 서로서로를 맺어주고 지탱해주는 역할이라고. 와타나베-나오코 관계를 지탱해주는 건 기즈키와 레이코이고, 와타나베-미도리를 이어주는 건 미도리의 전 애인이라는 것. 사회의 일원으로 둘만 바라보는 관계는 성립할 수 없을 걸까? 그래서 삼각관계의 한 각은 제 삼자, 사회를 뜻하는 걸까?

소설은 나오코가 결국 자살을 하고 와타나베는 남아있는 삶을 미도리와 함께 하기로 한다. 나오코도 레이코도 와타나베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말은 Don't forget me. Don't forget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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