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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4시간전

멀쩡한 사람


문화센터에서 뜨개질을 배운다. 얼마 전 새로이 70대 어르신께서 등록하셨다. 두 명의 초등학생 친구들과 함께 셋이서 실을 뜨다 한 명이 늘었다. 삶의 짬밥이 다른 만큼 남다른 여유로움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신다. 재료비 안내 문자에 0 하나가 더 붙어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나도 놀랐다.), 센터 수영장에서 저렴한 값으로 수영에 샤워에 찜질방까지 쓸 수 있어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 그리고 당신은 ‘멀쩡한 사람’이 아니라 할인을 받아서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 70세 이상이면 아주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데 나는 멀쩡하지 않으니까, ‘멀쩡한 사람’들은 제 값 주고 다니면 되지, 라며. 70세 이상 할인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로 ‘멀쩡한 사람’과 아닌 사람이 나뉘는 누군가의 세상. 생전 처음 들어보는 구분법에 줄줄 엮인 눈앞의 실타래처럼 머릿속이 뒤엉킨다. 곧이어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를 뜨끔함에 화끈거리는 양심. 조금 덜 살아 ‘멀쩡한 사람’이라 불려도 되나.


뜨개질을 손을 이용하는 명상법이라 한다. 바늘에 실을 한번 휘감을 때마다 머릿속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생각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것을 차분해진다고 해얄 지, 복잡해진다고 해얄 지. 어쨌든 오늘은 수세미를 뜨는 까슬까슬한 실에 ‘멀쩡한 사람’이라는 말이 착착 달라붙어 엮인다. 이런 순서로, 저런 방향으로, 실을 감아 돌리고, 바늘을 꿰어내세요,라고 했지. 분명 들은 대로 이렇게 저렇게 실과 바늘을 움직이는데 얼기설기 꼬여만 가게 만드는 야속한 나의 손놀림. 꼭 한 번씩 어디서 이상해져 알 수 없는 고비가 온다. 가만히 앉아 평화롭게 휘적휘적 손가락만 움직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초심자의 뜨개질이란 수도 없이 선택의 기로에 서는 법이다. 다시 시작할지, 실수를 모른 척할지. 뜨개질 이게 뭐라고! 오기로 풀었다 떴다 난리를 친다. 시간이 약이랬던가. 꼴은 우스워도 째깍이는 초침을 따라 그럭저럭 진행이 된다. 분명 똑같이 손을 움직였는데, 반복을 거듭해 익숙해져야 비로소 그럴듯해지니 희한할 노릇이다. 의도치 않았으나 한 코씩 없어지고 많아지는 당황스러운 순간을 만나도 어찌어찌 수습하며 뜨다 보면 어찌어찌 완성이 된다.


여적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풀어내고 엮고, 풀어내고 엮기를 반복하는 수렁에 빠진 시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겨우 완성을 해낸들 오점 같은 구멍이 지독하게도 따라다니는데, 이런 내가 ‘멀쩡한 사람’이라니!  청춘을 헤집기만 할뿐 착착 엮어가지도 못하는 초보는 안정기에 접어들어 여유롭게 생을 완성해가는 고수의 말에 괜시리 움츠러든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반듯하고 탄탄한 수세미를 만들어내는 사람이야말로 멀쩡해 보이는 것을. 나의 수세미에 완벽이라는 기준을 들이밀고 한코한코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제대로 완성된 단 몇 줄도 찾기가 힘들 것이다. 여태 떠낸것들을 죽 줄지어 놓아도 나의 성취는 어설프기 짝이 없을 것이다. 코를 박고 들여다본다. 그저 어찌어찌 실을 엮어내고 있는 내 모습을. 나의 수세미는 늘 어찌어찌 완성된다.


뜨개질을 손으로 하는 명상법이라 했다. 머릿속은 ‘멀쩡한 사람‘이라 쓰인 창이 끝도 없이 솟아오르는 바이러스에 걸렸으나, 손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멍하니 반복에 반복을 거듭한다. 백지가된 손끝을 타고 문득 생각이 스친다. 느닷없는 오기로 실을 풀었다 꿰었다 한동안 진전은 없지만, 제대로 시작해 보려 한두 줄 엮인 실을 풀어내는 것이 멀쩡하지 못할 이유는 무어랴. 완성된 수세미를 둘둘 풀어내는 미친 짓도 아닌것을. 오히려 갈길이 멀기에 해볼 수 있는 선택. 어깨를 펴고 자세를 고쳐 앉으니 멀리 보인다. ‘멀쩡한 사람’ 이 되어 바삐 손을 움직이는 내 모습이. 나의 수세미는 멀끔하진 못해도 멀쩡하다. 멀쩡하게 박박 잘만 닦인다.


어설픈 성취도 성취. 어찌 됐든 시도하고 완성하며 사는 우리는 멀쩡한 사람들이다.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무어 있으랴.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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