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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Jul 04. 2024

여름 이불


심각한 수족냉증이 머쓱하게도 더우면 잠들지 못한다. 반팔, 반바지에 보온부츠를 신은 요상한 차림새로 시작되는 취침준비. 철부지 애처럼 나쁜 건 빨리도 배우는 내 작은 방은 여름의 기운이 기승을 부리기도 전에 더위와 습기를 잔뜩 배워놨다.


사각사각한 여름 이불을 깐다. 마음은 하얗고 보드라운 미지의 호텔방 이부자리에 가 있지만 바스러지는 나의 침구 위로 몸을 뉘인다. 아, 우리 엄마 집에는 혼수로 싸 온 부들부들한 분홍 누빔 이불이 있는데. 그 이불을 덮으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는데. 묵직한 이불의 안정감을 떠올리며 볼품없이 야트막한 나의 여름이불을 미련 없이 걷어낸다. 순간, 배는 덮어야지,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슬그머니 발꼬락으로 이불을 끌고 온다. 등짝을 맞아도 흘려듣던 엄마 말을 혼자 누운 방에서 들어먹고는 나 잘했지, 생각하는 청승으론 칭찬을 못 받는다. 왜 늘 깨달음은 느지막이 얼굴을 들이밀고 뻔뻔한 줄도 모르는지.


속상한 하루였어. 하고 괜스레 이불을 헤집어대다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누운 어느 날. 좀 더 폭신한 위로가 필요한 어느 날. 보드랍지도 따스하지도 그리하여 이불 답지도 못한 이놈의 여름 이불을 에잇. 걷어차고 대자로 사지를 뻗으니 고새 배가 허전하다. 날갯죽지며 허리며 온몸이 배기는 야속한 침구의 두께에 오늘의 무거운 속상함을 옮겨보지만, 여전히 바람이 숭숭 들게 가벼운 나의 여름 이불. 괜찮아, 괜찮아. 하면 더 어리광을 부려댈 약은 마음을 읽고서 있는 듯 없는 듯 살풋 덮여있는 나의 여름이불.


배는 덮어야지.


엄마는 왜 모르는 게 없을까. 요따위 두께가 소용이나 있으려나 코웃음을 쳤는데. 배를 덮으면 괜찮은 것만 같다. 답지 않은 긍정감이 도진다. 그래, 배는 덮었으니까 됐어. 괜찮아, 감기는 안 걸릴 거야. 산뜻하게 배 언저리를 감싸는 무심한 무게감. 어떤 일도 괜찮아질 것만 같다. 한없이 푹신하게 나를 막아주진 않아도 어쩐지 그럴 것만 같다. 뒤척일 때마다 닿는 뼈마디에 나의 단단함마저 느껴지는 듯. 내일 아침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자랑을 늘어놔야지. 엄마, 나 어제 이불 잘 덮고 잤어. 어이없을만치 별 것 아닌 얘기들을 엄마는 다 들어줄 게다.


폭닥이는 위로는 건네지 못해도, 작게 머물던 여름이불 같은 마음을 떠올려 보는 것. 꽤 만족스런 하루의 마무리.


오늘 밤엔 더워도 배는 덮으세요.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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