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샛길 프로젝트 열 번째, 희애 이야기
이 글은 현지의 개-샛길 프로젝트 일환으로 작성됐습니다. 개-샛길 프로젝트는 획일적인 목표를 강요하는 사회 압박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샛길로 빠져보자는 취지로 시작됐습니다.
현지의 개-샛길 프로젝트는 2021년 12월까지 주위 사람 100명에게, 그들 자신에 대한 글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삶이 무료한 사람에겐 모든 순간이 반짝이는 극적 장면임을, 삶이 풍랑 같다고 느끼는 이에겐 결국 삶이란 조각들의 연속에 불과하다는 걸 전달해 따스함을 나누고자 합니다. 부족한 표현으로 글이 누군갈 찌르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더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자 이러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기꺼이 제 주위가 되어준 모든 이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
말랑하고 섬세한 단어로 채워진 글을 선물하고 싶었어. 희애는 내가 아는, 가장 그런 시선을 가진 사람이므로. 글은 이렇게 시작되는 거지, 소녀여. 내가 아는 넌, 흔들리며 그래서 강인한 존재이므로. 그 뒤로 온갖 사랑스러운 단어를 나열하는 거야. 출렁이는 파도, 후드득 떨어지는 비, 함께 든 우산, 희애와 내가 함께 좋아하는 것들을.
주고픈 건 하나의 ‘길’이었어. 세상을 조금 더 말랑하고 섬세하게 사는 네가 재빠르게 안전 가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을 주고팠지. 다행스럽게도 난 너의 안전 가옥 몇몇의 위치를 어렴풋이 알고 있어. 그곳은 너와 나 동일한 속도의 고른 숨일 때도 있었고 누런 종이 위 모음과 자음의 일정한 간격, 활자가 내뿜는 쾌쾌한 종이 냄새일 때도 있었어. 아니면 믿는 존재의 발치이던가 간혹 끝없이 아래로 침전하는 마음 깊숙한 곳일 때도 있었지.
물론 내가 아는 곳보다 훨씬 많겠지. 희애는 그곳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니까. 섬세하기 때문에 다치는 너의 마음을 보며 언젠가 너에게도 굳은살이 박히겠지 싶었던 적이 있어. 또 그걸 바라기도 했지, 말랑하기보다 단단한 게 덜 다치니까. 글쎄, 지금은 그걸 바라진 않아. 달라진 어미의 미묘함을 읽고 흐릿하게 드러났던 표정에서 감정의 단서를 찾는 모습이 어쩌면 희애의 가장 밑부분일 수 있잖아. 단단해지기보단 끊임없이 흔들릴 힘을 주는 안전 가옥을 함께 찾아 나서는 것도 즐겁겠단 생각이 들어.
앨리스를 그곳으로 이끌었던 시계 토끼와 알고 지내거나 ‘Drink me’ 약을 매일 쥐고 사는 건 어떨까? 자꾸만 뒤바뀌는 시선의 위치와 온갖 상식들을 쓰레기 통에 던져버린 세상에 적응하느라, 아마 그곳에 들어간 희애는 마음을 짓누르던 것 따윈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 거야. 그리고 거기서 시간이란 자를 만나게 되겠지. 난 늘 그가 심통이 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 생각해왔어. 잘 떠올려봐, 그가 알맞게 움직인 적 있었던가. 늘 너무 빠르거나 느려서 우릴 지치게 했지. 그와 만난다면 알맞게 스쳐 지나가 달라고 부탁해보면 좋을 것 같아. 그러면 넌 더할 나위 없이 널 배려하며 흘러가는 시간을 느낄 수 있겠지.
그곳으로 향하는 길도 분명 아름다울 거야. 소녀여, 하고 부르는 소리에 넌 고개를 들어. 잠이 덜 깼는지 눈을 비비적대다가 이윽고 넌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려. 넘실대는 바다의 인사가 새하얗게 널 감싸고 포근하도록 아늑한 바람도 널 반겨. 사뿐하게 몸을 일으킨 넌 길 위에 놓인 들꽃을 봐. 종종 너의 삶을 위로했던 그 들꽃들이 오늘도 너와 함께하고 있지. 충만하게 차오르는 감격을 느끼며 행복한 여정이 시작돼. 끝이 보이는 여정, 끝이 더욱 아름다울 산책이.
이런 길이 적힌 지도를 주고 싶었는데, 혹시 ‘니글의 이파리’란 톨킨의 이야기를 들어봤을까. 니글이란 이름의 한 화가가 살고 있었대. 그는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나무 한 그루를 그려야만 하는 자였어. 니글은 커다란 캔버스를 준비해 나무를 그리고자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죽음의 사자가 그를 찾아왔을 때 그가 평생 동안 그려낸 건 이파리 한 장이었지. 이파리 단 한 장. 니글은 죽음 다음의 세계 속으로 접어들었어. 니글은 그곳에서 바라고 또 염원하던 그 나무를 발견했지. 캔버스에 박제되지 않은, 살아 심어진 나무를.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너무 생생하고 살아 있어서 박제할 수 없나 봐. 끝내 실패하고 말았어. 지금은 나뭇잎 한 장만 그려내 선물해줄 뿐이지만 언젠가 그곳을 생생하게 눈으로 담아낼 순간이 오겠지.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지름길을 일러주는 거로 하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