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현지 Aug 25. 2021

[독후감] 선의 법칙

편혜영 장편소설 ,문학동네, 2015

도서관에서 책을 고른다. 현대소설 코너에 들어서면 위에서부터 가나다 순이다. 옆칸도 마찬가지다, 라마바사 순으로 작가 이름이 주욱 이어진다. 작가 이름을 먼저 찾아간다. 김금희 작가 쪽도 갔다가 'ㄱ'과 가장 먼 곳에 있는 'ㅎ'도 들려서 한강 작가 책을 확인한다. 그러다 그 옆에 편혜영 작가 부분으로 간다. <호텔창문>이란 단편소설을 읽고 나서부턴 'ㅍ' 코너도 빠지지 않고 들려본다. <선의 법칙>이란 책을 집어 들었다.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선, 점과 점으로 이어진 선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악인 선인 할 때의 그 선을 말하는 걸까. 사실 선이라는 말도 흥미로웠지만 난 언제나 법칙 같은 것에 끌리곤 했다. 법칙의 단호함, 하나의 다름도 허용하지 않는 법칙의 법칙. '이건 법칙이야'란 주장을 들었을 때 내 나름대로 '에이 그건 아니지, 이런 경우가 있잖아'하고 반론을 제시할 수 있는 그런 단호함이 법칙이란 말엔 있으니까. 간혹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밍숭생숭한 소설을 읽고 나면 재밌던 꿈에서 갑자기 깬 것 같아 싫었다. 아무튼, 난 '선의 법칙'을 집어 들었다.


P77
"피곤해서 선량하게 느껴지는 모습과 달리 이수호는 선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선하지 않아 피로해진 사람이었다. 끈질기게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신경질적이며 강압적인 말을 퍼부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채무자들이 도와줄 형편이 안 되는 가족을 원망하거나 가족에게 짐이 되는 걸 미안해하게 했다. 그간의 성실하고 소박한 인생을 혐오하게 만들었다."
P86
"적당히 구겨진 양복에 넥타이를 느슨히 풀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올린 채 덜 익은 돼지갈비를 집어먹으며 소주를 마시는 동기는 근사해 보였다. 가게에는 동기말고도 그런 사무원들 천지였다. 그들은 너나없이 에이, 시발, 좆같아, 하면서 누군가를 욕하고 있었다. 부러웠다. 이수호가 욕할 수 있는 사람은 무능한 자신뿐이었다."


작가는 악인에게 변명 거리를 쥐여 준 뒤, 곧바로 선인의 악의를 주목한다.

P100 
"악의가 악이 되는 것은 언제부터일까, 상상하고 품는 것만으로 악이 되는 걸까, 실행될 때 비로소 악이 될까...악의는 윤세오에게 할 일을 주었다. 슬픔을 떨치고 일어나게 했다." 


그럼 윤세오는 이제 뭔가, 그는 그냥 인간이다. 나도 될 수 있고 너도 될 수 있고 윤세오도 그러한, 그냥 인간. 악은 너무도 쉽게 선을 침범한다. 그러나 마치 법칙처럼, 하나라도 용납되면 더이상 그것 자체가 될 수 없다. 하얀 바다에 까만 잉크 한 점 떨어져도 그건 이제 더이상 하얀 바다가 아니다. 선은 희귀하고 또 오래 유지하기가 힘들다.


밍숭생숭한 소설은 아니었지만, 일주일을 마무리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볼만한 책도 아니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선,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윤세오의 삶이 너무 가깝게 느껴져서. 그의 인생 한 켠에 놓인 우정에 대한 실망감과 낙오에 대한 두려움, 가족에 대한 뒤늦은 후회가 언젠가 내 인생에도 발견됐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서 있는 선과 악의 경계가 내 발 밑에서도 발견된 적 있었던 것만 같아, 책을 읽고 나서 한참 동안 마음이 섬뜩했다.

작가의 이전글 [독후감]피로사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