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오직 한 사람의 차지
김금희 단편소설집, 문학동네, 2019
"아름다움이 있다면 아름답다고 썼다. 사랑이 있다면 사랑이 있다고, 잃어버리거나 비극과 직면했다면 슬프다고 썼다. 어리석었다면 고통스러울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용서할 수 없을 듯한 순간에는 용서할 수 없으리라고 썼다. 완전히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이 강제적인 고립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썼다. 우리는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하며 상처 이후의 시간을 예비할 수 있다고" - 작가의 말
'풋'하고 미처 막지 못한 웃음이 터지는 순간과 책 속 인물의 수치가 진하게 느껴져 얼굴을 찡그리게 되는 순간이 책을 읽는 내내 번갈아 찾아왔다. 책 속에 등장하는 산발적인 감정들이 엮이지 않을 듯하면서 공존하고 있었고, 결국 그런 집합체야말로 '있으면 있다고 쓴' 소설인 것 같았다. 사랑이 있다면 사랑이 있다고 비극과 직면했다면 슬프다고 썼다는 작가의 말이 생각났다.
이 책은 단편집이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의 김금희 작가의 단편 소설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렇기에 이 책의 주제를 한 단어 내지 한 문장으로 정의하긴 어렵다. 언어의 불충분함을 감안하고 효율을 위해 애써 정의해본다면, 상처 그리고 사랑일 것이다. 특히 이 작품 속 사랑은 현재적이지 않는 듯하다. 현재보다는 회상하듯 과거를 그리고 있고, 누군가를 향하기 보다는 과거의 자신의 사랑을 용인해주는 느낌이다. 사랑이 아니라고 자신을 상처내며 거부해왔지만 이젠 따뜻하게 인정해줄 자신이 있는, 성숙해진 자아가 반복적으로 사랑 이야기에 등장한다. 그래서일까 등장인물의 이름을 성으로 축약하는 게 좋았다. 대상의 매력이 아니라 사랑의 주체의 마음을 파고들고, 더 파고드는 방식이 내 마음을 따듯하게 데우는 것 같아 더 깊게 빠져들고 싶었기 때문에.
소설마다 한 문장씩 꼽아봤다.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건 <체스의 모든 것>, 그리고 <문상>.
체스의 모든 것
"선배를 국화를 참아냈고 그렇게 선배가 참는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마음이 서늘했다. 그 모든 것을 참아내는 것이란 안 그러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절박함에서야 가능한데 그렇다면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
"다만 우리가 그 로커룸에서 머리를 맞대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시 거기에서 나와 모든 잠든 사이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을 누볐던 그 시간이 뭔가 특별하고 소중한 것이 아닐까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가 특별해질 수 있었다면 그것이 멈춰져야 하는데도 일정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직 한 사람의 차지
"나는 그러면 어럽겠네요, 하며 돌아섰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내가 그렇게 누군가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똑똑히 느껴졌다. ... 그렇게 벌어지는 간격이 눈으로 보인다면, 연의 얼레가 풀리고 풀리듯 멀어짐이 물리적으로 측정된다면 남은 사람에게는 그것 역시 특별한 상처가 되겠구나 싶었다."
레이디
"그러자 좀 슬퍼졌는데 우리가 뭘 가진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건 빈곤함에 대한 자각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몸을 만질 때나 함께 걸을 때나 사랑해, 라고 표현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마음에 비해 그걸 드러낼 방법이 없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건 원래 없다기보다는 우리의 무지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문상
"송은 문득 내가 나빳지,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런 나쁘지 않음에 대한 기대. 이를테면 속죄 같은 것은 그 공허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지 않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
새 보러 간다
"수집은 목록의 작성이고 애호는 취향의 드러냄인데 그런 걸 전달할 수 있는 글을 쓰기란 어려웠다. ... 취향은 물질이기 어렵지 않은가. 하지만 책은 물질이고 원고지 매수로 카운트되고 가격으로 치환된다.
모리와 무라
"이윽고 숙부는 아주 조그마한 소리로 "눈을 감으라고 했지"라고 했다. "눈을 감으라고 했다고요?" "응, 그러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나는 눈을 감으라는 게 뭐가 그렇게 큰 모욕인가 싶어서 김이 샜다."
누구 친구의 류
"윤은 내가 마음이 약해 그렇다고 했지만 나는 내심으로 계급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돈을 가지는 건 세련되어진다는 것이고 세상의 많은 일들에 대한 분명한 지침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라는 생각."
쇼퍼, 미스터리, 픽션
"그 백인 소녀는 어떤 샴푸를 살지 고민하고 숍에 가서 신중하게 골랐다. 자기에게 맞는 샴푸를 사기 위해. ... 샴푸는 향이 있고 매끄러운 감촉이 있으며 역할을 다하고 쿨하게 사라지는 소모품이 아닌가. k가 특만 나면 먹으려고 하는 그 달고 진득진득한 것들처럼 말초적인 감각이 아니라 뭔가 형이상학적인 감각을 위한 것이 아닌가."